동상이몽 '취리산 회맹', 결국 백제는 사라졌다
동상이몽 '취리산 회맹', 결국 백제는 사라졌다
  • 송두범
  • 승인 2024.07.09 08: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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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송두범칼럼] 웅진도독 부여 '융'-신라 문무왕이 맺었던 취리산 회맹
신라-당, 모두 백제 지배 야욕 숨긴 채 허울뿐인 웅진 도독 '융' 임명
금강에서 바라본 취리산

지금부터 1,360년 전인 665년 공주에서는 당나라 고종(高宗)이 주체가 되어 유인원(劉仁願)의 입회하에 웅진도독 부여융(扶餘隆)과 신라 문무왕간 동맹서약인 취리산회맹(就利山會盟)이 있었다.

백제와 신라는 554년 관산성 전투에서 백제의 성왕이 신라 진흥왕의 배신으로 사망한 이래 오랜 원한 관계가 지속되었다. 두 나라의 관계는 결국 660년 나당 연합군이 백제를 멸망시키는 것으로 종료되었다.

그러나 나당연합은 그 목적이 달라 백제멸망 후 양국간 갈등이 여러 형태로 나타나게 되었다. 신라는 일단 백제에 대한 기득권을 가졌으나 당나라는 신라를 견제하면서도 한반도를 지배할 야욕을 구체화할 과정으로 취리산회맹을 추진하였다.

당나라는 백제 부흥군을 진압한 후 백제 유민을 무마하기 위하여 포로로 당 나라 수도까지 압송했던 의자왕의 아들 부여융을 귀환시켜 웅진도독(熊津都督)으로 삼았다.

이는 백제 유민의 안녕과 백제 재건을 통해 신라를 견제하며 백제 고토(故土)에 대한 신라의 권리 주장을 봉쇄하기 위함이었다. 즉, 당이 웅진도독부를 설치한 것은 백제 고토가 신라영토로 귀속되는 것을 저지하기 위한 것이지 결코 백제국을 부활시키려는 것은 아니었다.

취리산회맹을 계기로 백제 유민들은 부여융을 국왕으로 삼아 백제의 국권을 회복할 수 있게 된 것으로 믿었다. 반면 신라는 당의 강권에 마지못해 백제와 회맹을 하였을 뿐 백제의 실체를 인정하지 않으려는 태도를 보였다.

신라본기에는 흰말을 잡아 하늘과 땅의 신, 강과 계곡의 신께 제사지낸 뒤 그 피를 마셔 함께 맹세했다. 맹세가 끝나자 희생과 예물은 제단의 북쪽 땅에 묻었다. 취리산에서 이루어진 맹약에는 태산의 봉선의식에 참여하기 위해 탐라와 왜(倭)의 사신도 함께 지켜보았다.

유인궤(劉仁軌)가 지은 취리산맹세문은 다음과 같다.

“지난날 백제의 선왕은 반역과 순종 사이에 길을 잃고 이웃과 우호를 돈독히 하지 않았으며, 친·인척과도 화목하지 않았다. 고구려와 결탁하고 왜국과 서로 통하여 함께 잔인하고 포악한 일을 하며 신라를 침략하여 고을을 약탈하고 성(城)을 도륙하니 편안한 해가 거의 없었다. 천자께서는 물건 하나라도 제 자리를 잃는 것을 불쌍히 여기시고 무고한 백성을 가엾게 생각하셔서, 자주 사람을 보내어 화목하게 잘 지내도록 하셨다. 그러나 백제는 지세가 험하고 거리가 멀다는 것을 믿고 하늘의 도리를 업신여겼다.

황제께서 크게 노하시므로 백제의 임금을 벌하고 백성을 위로하였는데[弔伐], 깃발이 가리키는 곳마다 한 번의 싸움만으로 크게 평정되었다. 진실로 궁궐과 집을 허물어 웅덩이로 만들어서 후예들의 경계로 삼고, 근원을 막고 뿌리를 뽑아 후손들에게 교훈을 줄 만하였다. 그러나 복종하는 자를 품고 배반한 자를 정벌하는 것은 선왕의 아름다운 법도이며, 망한 나라를 흥하게 하고 끊어진 대를 잇게 하는 것은 옛 성현들의 공통된 법도이다.

일은 반드시 옛 것을 본받아야 함이 여러 옛 책들에 전하는 바이다. 그러므로 전(前) 백제 대사가정경(大司稼正卿) 부여융을 웅진 도독으로 삼아 조상에 대한 제사를 지키고 고향 땅을 보존하게 하니, 신라에 의지하고 기대어서 오래도록 이웃 나라가 되어라. 각각 묵은 원한을 없애고 화친을 맺고, 각자 조명(詔命)을 받들어 영원히 번복(藩服)이 될 것이다. 이에 사신 우위위장군(右威衛將軍) 노성현공(魯城縣公) 유인원을 보내어 친히 임하여 권유하고 황제의 뜻을 선포하게 하니, 혼인으로 약속하고 맹서(盟誓)로써 베풀며, 희생(犧牲)을 잡아 피를 마시고 처음과 끝을 함께 도타이 하여서, 재앙을 나누고 근심을 돌보아 은혜가 형제와 같을 지어다.

쌍신들에서 바라본 취리산<br>
쌍신들에서 바라본 취리산

윤언(綸言)을 크게 받들어 감히 실추시키지 말며, 맹세한 뒤로는 함께 절조를 지켜야 한다. 만약 맹세를 어기고 이랬다저랬다 하여 군대를 일으키고 무리를 움직여 변경을 침범한다면, 밝은 신이 그것을 살펴 온갖 재앙이 내려 자손을 기르지 못하고 사직을 지킬 수 없으며, 제사가 마멸되어 남은 후손이 없게 될 것이다. 그러므로 금서철권(金書鐡券)을 만들어 종묘(宗廟)에 보관하고, 자손만대에 감히 어기지 말지어다. 신이시여, 이를 들으시고 흠향하시어 복을 주소서!”

취리산회맹을 전후하여 신라는 백제를 상당히 불신하는 입장에서 궁극적으로 백제 고토를 차지하고자 하는 움직임을 보여 왔고 부여융은 백제 유민들의 자치를 도모하고자 하였다. 당도 백제를 내세웠지만 백제 고토를 지배하고, 나아가 고구려와 신라, 한반도의 모든 땅을 지배하고자 만든 자리였던 것이다. 결국 671년 웅진도독부가 신라에 의해 한반도에서 축출되면서 맹약도 해소되었다.

취리산회맹지를 공주시 우성면 연미산으로 보는 설과 공주생명과학고등학교 뒤쪽의 작은 산인 취리산(사진)을 회맹장소로 간주하는 설이 있다. 중국의 태산에서 이루어진 봉선의식은 하늘과 땅에 지내는 제사로 이루어지며 그 가운데 하늘에 대한 제사는 높은 산 위에서 이루어졌다.

만약 취리산회맹도 이러한 봉선의식과 연결시킬 수 있다면 금강이 바라다 보이면서 일대를 조망하기 좋은 곳에서 이루어졌을 것이기 때문이다. 그 중에서도 취리산에 무게를 더 두고 있다.

공주시 신관동에 있는 공주생명과학고등학교 뒤편의 나지막한 산을 오늘날 공주사람들은 취미산 또는 치미산이라 부르고 있는데 취리산의 명칭이 변형되고 와전되었으리라는 것이며 취리산 濟・羅회맹단지는 이 산의 정상부에 있었던 것으로 추정된다.

취리산에서 바라본 공주시가지

취리산에서는 장경병(長頸甁) 파편과 함께 산 아래 민가에서 백제토기 두 점을 발견했는데 이것들이 회맹 때 쓰인 술병으로 추측된다. 1997년 공주대학교박물관에서 취리산 발굴을 통해 다수의 백제 토광묘와 토기들을 찾아냄으로써 백제시대 흔적을 직접 확인한 적도 있다.

백제 영역전체를 차지하려던 신라와는 달리 백제의 명맥을 유지시켜주면서 한반도 내에 중국 중심의 국제질서가 아무런 문제없이 통용되도록 만들어 놓으려던 것이 당나라의 궁극적 목적이었다. 따라서 웅진도독 부여융과 신라 문무왕 사이에 취리산회맹이 맺어졌다는 것은 자의건 타의건 신라 역시 백제의 존재를 인정했다는 의미를 지닌다고 볼 수 있다.

송두범, 행정학박사. 공주학연구원 초빙연구위원, 전)공주시도시재생지원센터장, 전)충남연구원 연구실장, 전)세종문화원부원장, 전)세종시 안전도시위원장, 이메일 : songdb@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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