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학사랑방에 시 한편, 공주와의 인연 설명하는 안내판 필요
경상남도 고성에서 태어난 박목월(朴泳鐘, 1915~1978) 시인은 1919년 경북 경주시 건천읍 모량리로 이주하였고 건천공립보통학교, 대구 계성고등보통학교를 졸업하고 경주군 동부금융조합에 취직했다가 일본으로 건너갔다. 광복 이후 귀국하여 동부금융조합 부이사로 승진했으나 사임하고 대구 계성중학교를 시작으로 1978년 사망할 때까지 한양대 국어국문학과 교수로 근무했다.
1938년 5월 20일 공주제일감리교회에서 공주영명학교 출신 유익순(劉益順, 1920~1997) 여사와 운명적인 결혼식을 올리게 된다. 운명적이라고 하는 데는 두 가지 이유가 있다.먼저, 1937년 크리스마스 날 박목월이 진주까지 선을 보러 가기로 약속이 되어 있어 기차를 타게 되었다. 이때 우연히 한 처녀와 동석을 하면서 인사를 나누고 헤어졌다. 다음날 진주로 선을 보러 간 목월이 시간이 늦어 진주에서 묵게 되었는데 그 때 꿈에 한 노인이 나타나 아내 될 사람이 성이 ‘유’씨라고 말했다는 것이다.
이듬해 봄 화창한 일요일 오후였다. 박목월이 경주에서 금융조합 서기로 일할 때 혼자서 불국사 경내를 산책하다 직장동료와 그 일행을 만났다. 그 일행 중에는 동료의 처제가 있었다. 처제는 공주에서 올 봄 여학교를 졸업한 18세의 처녀였는데 그녀가 바로 진주행 기차에서 동석한 그 처녀였던 것이다. 이때 목월은 그녀의 이름이 유익순이라는 것을 알게 된다. 그리고 진주에서의 꿈을 다시 떠올린다.
꿈에서 노인은 분명 아내 될 사람의 성이 ‘유’씨라고 했다. 기차에서의 동석, 그리고 불국사에서의 재회, 유익순이라는 이름, 목월은 이 모든 일들이 단순한 우연이 아니라 운명이라고 확신한다. 목월은 어머니에게 조심스럽게 자신이 겪은 운명 같은 이야기를 전한다. 목월의 어머니 역시 신부감이 기독교를 믿는 집안의 규수라는 사실에 흡족해 했다고 한다.
공주 원도심에 있는 공주기독교박물관(등록문화재 제472호, 1931년 건립)에 가면 박목월과 유익순의 결혼식 관련 자료들을 볼 수 있다. 목월은 ‘나무’라는 시에서 공주를 언급한다. 아마 처가가 있는 공주를 방문한 것이 아닌가 한다.
'유성에서 조치원으로 가는 어느 들판에 우두커니 서 있는 한 그루 늙은 나무를 만났다. 수도승일까, 묵중하게 서 있다. 다음 날은 조치원에서 공주로 가는 어느 가난한 마을 어귀에 그들을 떼를 져 몰려 있었다. 멍청하게 몰려 있는 그들은 어설픈 과객일까. 몹시 추워 보였다. 공주에서 온양으로 우회하는 뒷길 어느 산마루에 그들은 멀리 서 있었다...(이하 생략).
나태주 시인은 박목월 시인을 ‘나에게 아버지 같은 시인’이라고 했다. 공주시 봉황산 아래 자리 잡은 풀꽃문학관에서 문인이나 문학지망생들을 만나며, 야생화를 키우는 나태주 시인은 중학교 2학년 때 ‘산이 날 에워싸고’라는 시를 통해 박목월의 이름을 알았다고 했다. 1971년 ‘대숲아래서’라는 시로 서울신문 신춘문예를 통해 등단했는데 박목월 시인이 당시 신춘문예 심사위원이었다고 한다. 이러한 인연으로 박목월 시인은 1973년 10월 21일 나태주 시인의 결혼식 주례를 맡아 다음과 같은 주례사를 남겼다고 한다.
“내가 생각하기에는 이 나군이 시골에서 독학을 하다시피 하면서 문단에 등단한다는 이것은 대단히 어려운 일의 하나입니다. 더구나 그가 시골의 두메산골에서 교편을 잡아가면서 그의 작품을 혼자서 연마시켜 가지고 우리 문단에 자기 혼자의 힘으로 등단해 가지고 또한 오늘날의 그 같은 어떠한 지위를 획득한다는 것은 그 나군 자신의 충분한 노력이 뒷받침하지 않고서는 가능하지 않습니다만, 그 이상으로 그에게 있어서는 천사람 만사람 가운데 하나쯤일 수 있는 그 이상의 많은 사람 중에 하나에 하나일 수 있는 남다른 뛰어난 재질을 가졌습니다.”
나태주 시인은 ‘공주를 살그머니 안아봅니다’라는 시에서 박목월과 이상화를 언급한다.
'몰랐어요 공주. 공주가 옛 백제의 서울이었고 충남의 도청소재지인 것을 알았지만 유관순 열사 어리고 순하고 아름다운 유관순 낭자 공부하고 꿈을 키운 고장인 걸 나중에야 알았고 김구선생이 잠시 몸을 피해 뜨거운 마음 식히고 가신 곳이 공주인 것 또 나중에 다시 알았고 박목월 시인 청록파 시인 경주의 시인 결혼식 올린 고장이 공주인 것 또 나중에야 알았지요. 아 그랬구나 그랬었구나. 뒤늦은 감회 조금은 부끄러움. 그런데 그런데 말이지요. 빼앗긴 들에도의 시인 이상화 또 다시 공주에 와 결혼식 올리고 공주를 매우 사랑했다는 이야기 뒤늦게 뒤늦게야 알았지요. 아 부끄러워라 감사해라 이제라도 알았으니 감사한 일 좋은 일 아닌가. 공주가 아름다운 고장 뿌리 깊은 고장인 것 다시 알아요. 공주님 예뻐요 사랑해요 공주를 살그머니 안아봅니다.'
또 한사람, 민족시인 이상화(1901~1943) 시인은 1901년 5월 22일 대구광역시 중구 서문로 2가 11에서 이시우와 김신자 사이 차남으로 태어난다. 8세에 부친을 여의지만 이장가(李庄家, 재산을 가족과 친지, 이웃들을 위해 나눈 일에서 유래)로 일컫는 대구 명문가의 부호인 백우 이일우(李一雨)의 보살핌을 받아 우현서루(友弦書樓, 현 대구은행 북성로지점)에서 수학하며 유복하게 자랐다.
1915년 경성부 중앙학교에 입학하였으나 1917년 자퇴하고 강원도 일대를 방랑하였다. 이때 그는 일제에 대한 민족 저항시 ‘신라제(新羅祭)의 노래’를 발표하여 민족의 독립정신을 고취하였다.
1919년 10월 이상화는 큰 아버지 이일우(李一雨)의 강권으로 공주 명문가 서한보(徐漢輔)의 딸이자, 초대 충남도지사를 지낸 율당 서덕순(徐德順)의 여동생 서순애(徐順愛)와 결혼했다고 한다. 이들의 혼인은 서덕순이 와세다 대학시절 이상화의 백부 이일우의 사위인 윤홍열(尹洪烈, 일제 강점기 대구시보 사장 역임)과 교류한 것이 인연이 되었다고 한다.
이상화의 부인 서순애와 애국열사 유관순은 같은 시기 영명학교에 재학하였으나, 이 두 여성의 운명은 달랐다. 1919년 3월 1일 유관순은 아우내 장터에서 만세운동을 주도하다 일본 헌병대에 체포되어 서대문형무소에 수감되어 1920년 9월 18세의 나이로 옥중 순국하였다. 서순애는 1919년 민족시인 이상화와 결혼을 하여 3남을 낳았으나 남편이 항일운동 혐의로 여러 차례 경찰에 구금되고 가택수색을 당하는 등 그녀 역시도 순탄치 않은 삶을 살았을 것이다. 서순애는 동급생 유관순이 옥사한 소식을 듣고 많이 슬퍼했을 것이 분명하다.
서순애의 집은 공주제일교회 맞은편에 80여 칸이 넘는 한옥이었으며, 독립운동의 주요 거점이었던 신간회 공주지회 간부회의 장소(1927), 국어연구회의 창립 장소(1927), 임정 밀사들이 은밀히 묵어가던 장소로 이상화와 서순애는 이곳에서 혼례를 올렸다. 서순애가 살았던 가옥은 6.25전쟁 중 전소되어 현재 반죽동 역사공원 내에 가옥터였다는 안내석만 남아 있다.
이상화는 대구 교남학교(현 대륜고등학교) 교사로 재직하면서 조선어, 영어, 작문 교사로 일하며 교남학교 교가를 작사하기도 했다.
이상화가 마지막 숨을 거둔 대구시 중구 계산동 상화고택을 2002년 대구 시민의 힘으로 지켜내 광복 63년을 맞아 2008년 8월 12일 개관하였다. 시민의 숙원사업으로 이루어진 상화고택은 역사적 장소일 뿐만 아니라 마지막 시 ‘서러운 해조’를 집필한 곳이기도 하다.
박목월 시인은 공주의 여성 유익순과 공주에서 결혼하여 가정을 일구었고, 그의 시를 좋아하던 나태주 시인을 등단시켰으며, 그 인연으로 결혼식 주례까지 맡았다. 이상화 시인 역시 공주의 여성 서순애와 공주에서 결혼한 인연이 있다. 한국의 대표하는 두 시인이 공주와 큰 인연을 맺은 것이다.
공주 원도심 공주기독교박물관에 이런 이야기가 기록되어 있긴 하지만, 박물관 속에만 두기는 너무 아까운 역사가 아닌가. 원도심 공주하숙마을 내 문학사랑방 그 언저리에 박목월·이상화 시인과 공주와의 인연을 설명한 안내판이나 시 한편 이라도 적어 높아도 좋고, 아니면 아래 사진에서 보는 것과 같이 두 시인의 등신대 하나쯤은 설치해도 좋을 것 같다는 생각을 해본다.
송두범, 행정학박사. 공주학연구원 초빙연구위원, 전)공주시도시재생지원센터장, 전)충남연구원 연구실장, 전)세종문화원부원장, 전)세종시 안전도시위원장, 이메일 : songdb@naver.com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