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제 땅으로 간 정인, 끝내 돌아오지 않았다
백제 땅으로 간 정인, 끝내 돌아오지 않았다
  • 송두범
  • 승인 2024.06.14 08:26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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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송두범 칼럼] 백제 땅으로 떠난 정인을 기다리다 돌이 된 '사요히메'(佐用姬)
도요토미히데요시 야욕 히젠나고야성...진솔한 반성 위에 우호협력 꽃 필것

무령왕국제네트워크협의회와 공주향토문화연구회(회장 윤용혁 공주대 명예교수) 주관으로 제23회 무령왕탄생제에 참가하기 위해 5월 29일(수)부터 6월 1일(토)까지 3박 4일 일정으로 일본 사가현(佐賀縣) 가라츠시(唐津市) 북쪽 해상 무령왕탄생지인 가카라시마(加唐島)를 비롯하여 백제 성왕의 셋째 아들로 알려진 임성태자(琳聖太子)의 후손인 오우치(大內)가문, 임진왜란시 조선출병지인 나고야성(名護屋城) 등의 역사문화자원을 답사하였다. 공주와 관련이 많은 일본의 옛 도시를 돌아본 소회를 ‘세종의소리’를 통해 독자들에게 전달하기 위해 글을 썼다.

가라츠만과 무지개송림(虹の松原)을 바라보며‘무령왕 아리랑’ 연습

규슈국립박물관과 이와토야마(岩戶山)고분을 돌아보고 가라츠를 가는 버스 안에서 공주대학교 서정석 교수는 동아시아 역사상 최초・최대의 백강(白村江)전투를 실감나게 들려주었다.

660년 백제가 멸망한 후 야마토정권은 백제부흥군의 요청으로 나당연합군에 대항하여 663년 800척~1,000여척의 배와 최고 2만7천명의 병사를 백제로 파병했다.

나당연합군의 배 170척 및 군사 17,000명과 전투를 벌였으나 4차례의 백강 전투에서 일본 병선 400척이 불타고 군사도 궤멸하였다. 당서(唐書)와 이를 참조한 삼국사기는 이때의 싸움을 두고‘연기와 불꽃은 하늘을 붉게 물들였고, 바닷물마저 핏빛이 되었다’고 기록하고 있다.

사가현 가라츠시(唐津市)에는 가라츠 포구를 무대로 한 백제 원병 오토모노 시데히코(大伴狭手彦)와 그 마을 촌장의 딸 마쓰우라 사요히메(松浦佐用姬)의 사랑이야기가 있다.

사이메이천황(齊明天皇)의 명에 의해 백제로 갈 원병이 출정을 앞두고 가라츠 포구에 집결했다. 마을촌장의 딸인 사요히메와 원병으로 참여할 젊은 호족인 오토모노시데히코는 사랑에 빠졌으나, 시데히코는 천과 거울을 정표로 남긴 뒤 떠났다.

사요히메는 떠나는 배를 보기 위해 가가미산(境山)에 올랐고 배들이 시야에서 멀어지자 배를 따라 요부코(呼子)의 가베섬에 올라 7일 밤낮을 울다 돌이 되었다.

가가미산 정상에는 정인이 떠난 현해탄을 옷자락을 들고 바라보는 사요히메의 동상이 오늘도 정인이 떠난 백제 땅을 바라보고 있다.

가가미산 정상에서 백제 땅을 바라보는 마쓰우라사요히메(松浦佐用姫) 동상<br>
가가미산 정상에서 백제 땅을 바라보는 마쓰우라사요히메(松浦佐用姫) 동상

높이 284m의 가가미산(鏡山)에서 바라본 무지개송림(虹の松原)과 가라츠만은 한 폭의 그림 같은 풍경을 연출한다. 이 풍경을 보니 백제 땅에서 온 무령왕의 후손들은 가카라시마에서 공연해야 할 ‘무령왕 아리랑’이 생각났다. 나정희 선생님의 지도 아래 산 정상에서 ‘무령왕 아리랑’ 공연연습은 마치 정인을 백제로 떠나 보낸 사요히메의 원혼을 달래주는 진혼무라고 생각했다.

무지개송림은 17세기 가라츠 번주 데라자와히로타카(寺沢広高)가 황무지 개간의 일환으로 100만 그루 곰솔로 방풍림과 방사림을 조성하였다. 당초 8km를 조성했으나, 현재 길이 4.5km, 폭 5km, 총면적 70만평 규모로 일본 3대 소나무 숲 중의 하나이며, 국가특별명승지로 지정・관리하고 있다.

400년 전 조성한 곰솔 숲은 사가현삼림관리서, 무지개송림보호대책협의회 등 시민의 자원봉사활동에 의해 보호되고 있다. 숲속에는 산책로가 조성되어 있어 고즈녁한 분위기 속에서 삼림욕을 즐길 수 있다.

한편, 큐슈(九疇) 북부 히가시마쓰우라(東松浦) 반도는 예로부터 일본이 대륙과 교류하는 장소였다. 이 반도 최북단에 히젠나고야성(肥前名護屋城)이 위치하고 있다.

도요토미히데요시(豐臣秀吉)는 이곳에 축성하면서 그의 고향인 나고야(名古屋)와 동일한 이름을 사용하되 전쟁분위기를 살려 발음이 같은 지킬 '호'(護)를 썼다. 옛 지명이 히젠(肥前)이기 때문에 아이치(愛知)현에 있는 나고야성과 구분하기 위해 히젠나고야성이라고 부른다.

히젠나고야성 천수각 터에서 바라본 성터와 한국방향 현해탄

도요토미히데요시가 히젠나고야성을 조선 침략을 위한 전초기지로 선정한 것은 지리적, 지형적으로 조선침략을 위해 뛰어난 입지조건을 갖추고 있는 곳이기 때문이다.

히젠나고야는 부산까지 최단거리, 예로부터 ‘1천 척의 배를 숨길 수 있는’항구, 수심이 깊어 큰 선박의 접안 가능, 북쪽 바다 가베시마(加部島)와 가카라시마(加唐島)가 풍파를 막아주는 항구, 양질의 석재와 목재 생산, 우수한 목수와 조선공들로 함선 건조 및 수리 용이, 현해탄의 조류에 익숙하여 조선으로 가는 항로를 안내하는 적임자였다고 할 수 있다.

히젠나고야성은 공식적으로 1591년 10월부터 시작하여 1592년 3월까지 축성하였으며, 축성에 동원된 인원도 2만 7-8천명에 달했다.

도요토미히데요시의 명령으로 전국에서 다이묘들이 히젠나고야로 집결했다. 반도 일대에 다이묘들의 진영이 나고야성을 둘러싸듯이 반경 3km 정도 내의 산야에 배치하였고, 현재 확인된 진영의 수만 130여 곳이며 이곳에 모인 왜병들의 수는 약20만 명에 달했다.

1592년 4월 13일 왜군은 나고야성에서 부대를 재편해 조선반도를 침공하여 파국지세로 북상하였으나 이순신 장군의 선전과 의병들의 분전으로 고전을 겪었다. 마침내 1598년 8월 히데요시가 사망하자 전쟁을 포기하고 완전이 일본으로 패퇴했다.

이후 히젠나고야성에 있던 여러 다이묘들은 자신들의 고향으로 철군했고 이후 패권을 잡은 에도막부 도쿠카아이에야스(德川家康)는 다른 다이묘가 이 성을 활용하는 것을 막고 조선과의 외교관계를 정상화하기 위한 명분으로 이 성을 파괴했다고 알려져 있다.

이 성에서 뜯어낸 부재는 가라츠의 번주 데라자와히로타카가 가라츠 성(城)을 축성(1602)하는데 사용했다고 전해진다.

임진왜란・정유재란을 위해 축성한 히젠나고야성 모형

이후 나고야 성터 및 진영터로 국가사적으로 지정(1926)하고 특별사적으로 지정(1955)하였으며, 1968년 히젠나고야성도(圖) 병풍이 발견되면서 성의 옛 모습을 알게 되었다. 1976년부터‘현상유지적 수리’중심의 보존정비사업을 시작했고, 1993년에는 사가현립 나고야성박물관을 개관하여 오늘에 이르고 있다. 제주올레가 주관하여 나고야성과 다이묘 진영터를 중심으로 큐슈 올레 가라츠코스가 11.2.km개설되어 있다고 한다.

현립 나고야성박물관은 조선 침략을 위해 축성한 히젠나고야성 남쪽에 위치하고 있다. 박물관에서 발간한 브로셔에는 이렇게 적혀있다.

‘중국 및 한반도 침략을 계획한 도요토미히데요시는 이곳에 출병기지인 나고야 성을 짓고 임진왜란・정유재란(文禄・慶長の役, 분로쿠・게이초의 역)을 일으켰습니다. 이 전쟁은 그때까지 이어지고 있던 일본 열도와 한반도의 긴 교류를 일시적으로 단절시킨 불행한 사건이었습니다. 현재 이 전쟁의 무대가 된 나고야성터와 전국에서 모인 장군들의 진영터는 일본의 특별사적 “나고야성터 및 진영터”로 지정되어 있습니다. 나고야성박물관은 이러한 대규모 유적을 보존・정비하는 사업의 중핵시설이 되는 것과 동시에 과거의 역사적 사실에 대한 반성을 통해 일본열도와 한반도의 교류사를 조사・연구・전시・소개하여 앞으로 우호・교류의 추진거점이 되는 것을 목표로 하고 있습니다.’

히젠나고야성 박물관 전경

‘역사적 사실에 대한 반성’이라는 표현은 일본의 입장에서 진전된 표현이지만, 박물관내 전시물이 과연 역사적 사실을 진정으로 반성하는 기반위에 전시하고 있는가에 대해서는 좀 더 살펴볼 필요가 있다. 우리 나라 인물이나, 유산들을 전시한다고 해서 그것이 반성의 표시가 될 수 없다. 좀 더 진솔하게 조선을 유린한 조상들의 잘못을 인정하고, 약탈한 문화재를 반환하며, 전시 역시 임진왜란으로 인한 조선인의 피해상황을 사실대로 전시하는 것이 진정한 반성의 시작이 될 것이고 그것이 일본열도와 한반도간 우호・교류의 출발점이 될 것이다.

 

송두범, 행정학박사. 공주학연구원 초빙연구위원, 전)공주시도시재생지원센터장, 전)충남연구원 연구실장, 전)세종문화원부원장, 전)세종시 안전도시위원장, 이메일 : songdb@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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