왕건 물 건네주고 받은 이름 '이도'
왕건 물 건네주고 받은 이름 '이도'
  • 이정우
  • 승인 2013.09.17 20: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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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정우의 Story in 세종]전의 예안 이씨 시조 이도, 그리고 추석

   전의 이씨 시조의 묘소
음력 팔월 보름 추석(秋夕)이다. 추석이란 어떤 명절인가.
글자대로 풀이하면 가을 저녁인데, 이날의 저녁 달빛이 가장 좋다하니 달빛이 가장 밝은 명절이란 의미이다. 24절기의 하나인 백로(白露)와 가을의 중심인 추분(秋分) 사이에 드는 민속명절이다.

백로는 글자그대로 풀이하자면 ‘흰 이슬’이란 뜻으로 양력으로 9월 9일 무렵이며, 음력 8월초에 든다. 이 절기가 되면 밤의 기온이 내려가기 시작하여 이슬이 생기기 시작한다. 이슬이라는 것은 공기를 천천히 냉각시켜서 특정 온도에 이르면 공기 중의 수증기가 응결되기 시작하여 생기는 것인데, 온도와 공기속의 수증기 양을 나타내는 기준점이 되기도 한다.

민간에서는 백로 전에는 벼가 패야 풍년이 든다고 하는데, 이는 공기가 차면서 생기는 이슬로 인해 벼 이삭이 잘 열지 않는다고 판단했기 때문이다. 또한 백로가 되면 식물이 더 이상 성장하지 않고 마르게 된다. 풀이 마르면 베는 것이 어려워지니 이 절기를 전후하여 조상 묘소에 자란 잡초를 베는 벌초를 하게 되는 것이다. 또, 더 이상 자연재해로서 태풍이 발생하지 않으니 곡식이 청명한 바람과 햇빛에 익어가기 시작하며, 추수하기 전까지 한가한 시기가 마련이 된다. 그리하여 전통사회에서는 이 시기에 시집간 딸이 친정에 가서 부모를 찾아뵙는 근친(覲親)의 풍속을 행하기도 하였다.

추분은 보통 양력으로 9월 23일 무렵이며, 음력으로 8월에 든다. 이 절기는 밤과 낮의 길이가 같게 되니 이절기가 지나면 밤이 길어지고 완연한 가을이 오게 됨을 알 수 있게 된다. 이슬도 점점 생기게 되니, 하늘은 더욱 청명하고 바람은 더욱 시원해지게 되는 것이다. 이러한 백로와 추분사이에 추석이 들게 되는 것이다. 곧 기온 내려가면서 이슬이 생기기 고 지상의 초목은 성장을 멈추며 결실을 맺기 시작하고, 밤이 길어지니 시작하니 겨울로 들어가는 절기의 전환점에 추석이 위치해 있는 것이다.

추석은 음식과 놀이로서 농사를 지은 데에 대한 감사와 노고를 풀어주는 농공감사일이다. 새로운 곡식으로 송편을 빚고 새로 맺은 과실로 조상에 차례(茶禮)를 지내고 조상의 산소를 돌아보며 성묘(省墓)를 한다. 현대에 들어와서도 조상에 차례를 지내고 성묘를 하는 풍속은 여전히 지속되고 있으며, 공식적으로 공휴일로 지정됨으로써 오늘날 우리나라에서 큰 명절로 자리를 지키고 있다.

조선중기에 오면서 유학의 보급에 따라 해마다 돌아가신 날에 지내는 제사인 기제(忌祭)와 묘소에서 지내는 묘제(墓祭)가 매 절기마다 지내는 사시제(四時祭)보다 더 중시되었다. 또 집안에 가묘와 사당이 건립되어 설과 단오, 추석, 동지에 제사가 행해짐에 따라 차례상도 기제상에 준하여 상차림을 마련하게 되었다. 그러나 추석은 한식과 함께 계절의 시작과 끝에 있어 절기의 제사인 절사(節祀)로 비록 축소되기는 하였으나 대표적인 절사로 남아있게 되었다.

   주호선사의 모습이라고 전해지는 승상

율곡 이이도 추석에는 주자가례의 묘제에 따라 제사 음식을 갖추어 축문을 읽고 토지신에게 제사를 지낼 것을 권하기도 했다. 이러한 이론은 조선 후기에 들어서 사당에서 조상의 차례를 지내고, 집안일가 친척끼리 모여 조상의 묘소를 찾아서 절사를 하거나 성묘를 하는 형태가 되거나, 혹은 이것이 결합되는 형태로 발전되었다. 오늘날에는 절사를 대신하여 성묘를 하며, 추석을 전후로 하여 벌초를 하면서 성묘를 하거나 시제 관행으로서 묘제를 지내기도 한다.

추석에 조상에 제사를 지내는 것을 차례라고 한 것은 무엇 때문인가. 차례는 원래 차(茶)로 올리는 예를 말한다. 신라의 승려이자 향가의 작가였던 충담사(忠談師)는 경덕왕의 부름을 받고 경주 월성의 귀정문 누각에서 왕을 맞아 음력 3월 3일과 음력 9월 9일에 미륵세존에게 드리던 차를 끓여 왕에게 권하였다는 기록이 있다. 고려시대에는 팔관회 연회나, 경령전에서 설, 단오, 추석, 중구(음력 9월 9일)에 차를 올렸으며, 이규보의 동국이상국집에서도 “종의선사(鍾義禪師)의 제사에 차와 과일을 올렸다.”라고 한데서도 차를 올린 것을 알 수 있다.

그러던 것이 언젠가부터 차에서 술을 올리는 형태로 바뀌게 되었다. 추석에는 설 차례와 달리 흰 떡국 대신에 햅쌀로 밥을 짓고 술을 빚게 되었다. 가을에 첫 수확을 하면 햇곡식을 조상에게 먼저 올린 다음에 먹었는데, 추석차례의 경우 조상신에게 올린다는 뜻의 천신(薦神)의 의미가 강했다. 차례 상의 경우 햅쌀로 밥을 지어 조상께 올리고, 떡 대신에 송편을 올리기도 하였다. 만일 절기상 추석이 너무 빨라 들어 곡식이 수확되지 않으면 햇곡식으로 밥을 짓지 못하였으므로 한 줌의 벼를 밥 대신에 그릇에 담아 올리기도 했으며, 추석날 대신에 중구(음력 9월 9일)에 차례를 지내기도 했다. 이런 과정에서 원래 차를 올리던 것에서 차례라는 명칭만 남고, 점차 차를 쓰지 않고 곡식으로 술을 빚어 올리게 되었던 것이다.

또, 일설로는 곡식으로 빚은 술인 곡주(穀酒)를 곡차(穀茶)라고 부른다. 이는 녹차의 나뭇잎으로 빚은 차를 녹차, 국화의 꽃으로 빚은 차를 국화차라 하듯이 곡식으로 빚은 차라하여 이름하는 것이다. 곡주를 곡차라 하는 것에 대한 구전 하나가 있다. 조선시대 인조 때, 이름은 일옥이고 법명이 진묵대사(震默大師 1562~1633)라는 분이 있었다. 그는 김제시 만경읍 화포리에서 태어났다고 하는데, 신통력과 이적이 많은 인물이었다. 그는 술을 즐겨 마셨다고 한다. 그러다 보니 승려가 술을 마신다고 하는 것이 멋쩍었던지 곡주의 이름을 곡차라고 변용하여 불렀는데 이때부터 곡주를 곡차라고 하였다는 것이다.

추석 때는 보통 일가친척 친지 친구들이 모여 곡차를 마신다. 차례를 지낸 후, 조상님의 복을 받아 마신다고 하여 음복이라고 이름 한 술을 뒷 풀이로 마시는 것이다. 그러는 가운데 서로의 회포를 풀고 정을 나누며 세상을 논하는 것이 우리네 정서였다. 이런 가운데 곡차는 서로의 이야기를 술술 풀어내는 매개체였기 때문에 차보다는 술을 더 애용하게 되었던 것이리라.

   이성 안내 도로표지판

추석의 곡차와 관련하여 잊을 수 없는 분이 있다. 지금은 입적하셨지만 계룡산 동학사 위쪽에 심우정사(尋牛精舍)라는 토굴형태의 작은 절이 있다. 이곳에 15년 전에 입적하신 목초(木樵)라는 법명의 스님이 계셨다. 그분은 두충차와 붓글씨와 그리고 곡차가 신선의 경지까지 이르렀다고 하는 분이었다. 특히 곡차와 관련해서는 국곡차(國穀茶;우리나라 술)든 양곡차(洋穀茶;서양 술)든 어떤 종류도 어떤 산지도 마다하지 않으셨던 것으로 기억한다. 거칠 것이 없는 삶의 태도와 기행을 남기고 가신 분 이었는데, 특히 곡차의 경지로 말하면 동탁 조지훈 시인이 등급을 먹인 18등급가운데 최고수인 열반주(涅槃酒)급에 해당하는 이른바 열반지존이셨던 분이셨다.

승려의 효에 대한 이야기는 많이 전하고 있는데, 그중에 곡차의 주인공 진묵대사도 한 분이었다. 진묵대사는 6살의 어린나이에 출가했다고 한다. 그러니 마음속에 어머니에 대한 마음이 얼마나 강하게 남아있었겠는가. 그래서 그런지 그는 속가 어머니가 돌아가신 뒤 49재(齋)에 시문을 지었는데, “열달 동안 태중의 은혜로 무엇으로 갚으리오”로 시작하는 망모가(亡母歌)가의 내용이 전하고 있는데, 그 어머니에 대한 그리움과 감사함이 애절하고 간절하게 녹아있어 우리네 범인의 가슴을 저미게 한다.

이렇듯 추석이란 예로부터 우리들에게 있어 조상과 관련해서 중요한 세시풍속의 하나였다. 돌아가신 조상과 현재의 나를 이어주는 역할을 하기도 했으며, 현재를 살고 있는 일가친척의 상호관계를 풀어주고 맺어주는 역할을 하였다. 이와 관련하여 세종시를 본관으로 하는 대표적인 성씨인 전의예안이씨 시조 이도(李棹)에 대해서 알아보고자 한다.

전의예안이씨는 전의를 본관으로 하는 이씨의 성을 가진 사람과 예안을 본관으로 하는 이씨의 성을 가진 사람들을 통칭하는 말인데, 사실은 곧 전의이씨 전체를 일컫는 말이다. 전의이씨는 조선시대 때 의 일부의 사람들이 한때 분지되어 예안이씨를 칭하기도 하였다. 보문각제학을 지낸 이익(李翊)이 안동의 북동쪽 지역인 예안지방의 예안군으로 봉군되어 그곳에 살게 되면서부터 그의 전의이씨 후손이 예안이씨를 칭하였던 것이다. 그러나 실제로는 전의이씨를 칭하는 말이었으며, 현재 전의이씨와 예안이씨는 종중 화수회의 운영 및 제사도 통합하여 운영하고 있다.

이도는 고려 개국기의 사람이다. 그의 원래 이름은 ‘치’(齒)였다. 그랬는데 왕건이 그가 배를 건너 주었다고 하여 ‘배를 젓는다’는 뜻의 도(棹)를 하사하여 이름이 치에서 도로 개명 되었다. 지봉유설 권17, 잡사부 성족편에도 보면 ‘이도는 배의 노를 저어 태조 왕건의 군사가 물을 건너게 하였다. 그리하여 이름을 도라고 하사하였다’고 기록되어있다. 고려 태조가 후백제 견훤을 정벌하고자 남하하여 공주 금강에 이르렀을 때 마침 강물이 불어 넘쳐 강을 건너지 못 하였다. 그러자 이도가 주도하여 왕건이 무사히 금강을 건널 수 있도록 도왔다. 이에 왕건은 이치에게 고마움을 표하고자 이름을 도라 하사 하였던 것이다. 그리고 왕건이 후삼국을 통일하고 명실상부하게 제왕이 되자 이도를 응양군 대장군 삼한 개국익찬공신 2등에 책훈하고, 관직을 삼중대광태사, 작호를 전산후(全山侯; 전의의 옛지명)에 봉했다. 이때부터 이도는 자신이 봉해진 전의의 지명을 따라 본관을 전의이씨라 사용하였던 것이다.

이도는 전의예안이씨의 시조로 되어있지만, 그의 선대 조상과 그의 묘소가 공주 신관동에 있다. 년대로 따지면 그의 고조나 증조 정도 되는 사람인, 이석재(李碩材)의 묘소가 공주에서 대전으로 향하는 32번국도, 강변도로 북쪽, 금벽로의 금강홍수통제소 뒷산에 있다. 신관동에서 옥룡동으로 이르는 공주대교 건너편에 있는 산으로 묘가 자리한 형국은 목이 마른 용이 물을 마신다는 갈용음수형(渴龍飮水形)에 해당하는 명당이라 한다.

   이성에서 바라본 개성방향, 이도는 이곳에서 왕건을 생각했을까.
이도의 선대 사람인 이석재의 묘가 이곳에 정해 진 전해오는 이야기가 있다. 그의 조상들은 금강을 건너고자 하는 사람들을 건너게 해주고, 가난하고 불우한 자를 구제하며 은혜를 베풀었던 모양이다. 그러던 811(헌덕왕 3)년 10월 어느날 당나라 승려인 주호선사(朱昊禪師)가 이곳을 지나게 되었다. 주호선사는 풍수에 능한 고승으로 신라의 산천을 살펴보고자 우리나라에 왔는데, 그러던 중 금강을 지나게 되었던 모양이다. 사공들에게 강을 건너 달라고 부탁하였으나 오직 이방이(李芳伊)라는 사람만이 주호선사를 건너 주었다고 한다. 이런 이방이의 어질고 유순한 성품에 감복하여, 상중에 있던 이방이에게 아버지의 묘자리를 정했는냐고 묻고, 아직 정하지 못했음을 듣고는 그의 아버지를 장사지낼 산소자리를 정해주었다. 바로 지금의 공주시 신관동 산10번지가 이방이의 아버지 이석재의 묘소이다.

주호선사가 썼다고하는 진양집에 보면 묘자리는 간좌의 언덕인데, 강물이 동쪽에서 흘러들어 서쪽으로 흘러가니 만대토록 부귀영화를 누리 수 있는 땅이라 한다. 이석재의 묘를 쓴 때는 시월 초구일 축시로, 연월일시의 간지를 보면 신묘년 기해월 임인일 축시(辛卯年 己亥月 壬寅日 丑時)였다. 천문으로 풀어보면 지뢰복의 괘이니 칠일 만에 다시 출발 하였던 곳으로 돌아온다는 괘이고, 지리로 풀어보자면 수화미제의 괘이니 꽃이 아직 활짝 피지 아니한 것과 같은 것이고 달이 아직 완전히 둥글지 아니했으니 미래에 창대할 것이란 뜻이다. 역학으로 풀어보면 새로운 역사를 만들어 존귀함과 권세를 잡을 풍운의 운세였다.

그 후 이도가 태어나게 되었고, 무덤을 쓴 후 108년 뒤에 918년 6월에 고려가 건국되었으며 이도가 개국공신이 되었던 것이다. 조상 묘소를 명당에 쓰게 되면서 발복을 한 것이었을까. 이 모든 것이 주호대사가 잡아준 명당 덕분이라 생각한 전의이씨들은 선산사당 영모재 위에 주호대사를 모신 진양각이라는 사당을 건립하고 매년 제향을 지낸다. 진양각은 1칸짜리 맛배지붕의 콘크리트 벽돌로 사당 안에는 주호선사를 상징하는 화강암으로 만들어진 승상을 조각하여 봉안하여 추모하고 있다. 

   전의 이씨 시조 이도 묘소 앞에 위치한 신도비
이도는 자신의 활동무대를 봉작지인 전산(全山, 전의의 옛 이름)지방으로 옮겼다. 곧 선대의 근거지인 공주 금강 변을 떠나 제후에 봉해진 전의 지방으로 근거지를 옮긴 것이었다. 그는 양광도에서 전라도로 가는 군사상 요충지였던 전의의 운주산 주변에 성을 쌓고 살았는데 그가 쌓은 성이라 하여 이름을 이성(李城)이라 하였다.

1530(중종25)년에 편찬된 신증동국여지승람의 전의현 고적편에, 이성에 대한 기록을 보면 이도와 관련되어 있음이 확인된다. ‘이성은 운주산 북쪽 봉우리에 있다. 돌로 쌓은 축대에 이도가 옛날에 살았다고 세상에 전해 온다. 성의 가운데는 넓고 평평한데 둘레는 1184척이다. 성안에는 우물하나가 있었는데 지금은 못쓰게 되었다’. 라고 기록이 되어 있다. 1871년 간행 호서읍지에도 이성에 대한 설명이 있는데 그것을 보면 ‘이성은 이성산에 있다. 산정상은 평평하고 넓으며 그 가운데 층을 이뤄진 단이 있다. 고려 때의 태사공 이도가 살았던 유허지라 한다. 단의 남쪽과 북쪽에 각각 하나씩 정자가 있는데, 그는 겨울에는 남쪽에서 살았고, 겨울에는 북쪽에서 살았다”라고 기록되었다. 이로보아 이성은 이도의 근거지 임에 분명하다.

이성에서 집을 짓고 살았던 이도는 전의면 남쪽의 국사봉에서 흘러내린 물이 북류하는 조천 건너편의 유천리 양안이마을에 묘소가 있고, 건너편 기슭에 이도의 재실인 영사재가 있다. 이도의 묘가 위치한 곳은 풍수지리적으로 여러 가지 이야기와 그 사실이 전해져 온다. 이도의 묘자리 형상은 호랑이 형상이라 한다. 그런데 묘소가 위치한 산은 높고 깊은 산이 아니라 야트막한 야산이고 골도 부드럽다. 그러니 이 호랑이는 거대하고 우렁차며 힘쎈 용맹스런 호랑이 형태(猛虎出林形)라기 보다는 작고 귀엽고 부드러워 보이는 마을 뒷동산 언덕에 살고 있는 호랑이 형태(後山伏虎形)의 호랑이인 셈이다. 그래서인지 이 가문에서는 호랑이가 무인을 상징하듯이 무인이 많이 배출 되었어야 함에도 불구하고 무인보다는 문인이 많이 배출되었다.

   이도의 재실, 영사재 입구 안내 표지돌과 홍살문

그런데 이런 모습의 호랑이라 할지라도 호랑이는 호랑이다. 호랑이도 배가 고프면 마을로 내려와 가축과 사람들에게 못된 짓을 하니 항상 사람들에게 근심이 아닐 수 없다. 그런데 이 호랑이는 마을에 해를 끼치는 않은 구조적 장치가 풍수지리적으로, 자연적으로 만들어져 있었다. 이도의 묘소와 재실사이의 양쪽언덕 사이에 지금은 철도가 지나고 있는데 이곳에 호랑이의 배를 채워주는 ‘구암(狗岩)’라 불리우는 개 바위, 강아지 바위가 있다. 개 바위는 큰 바위와 주변의 작은 바위로 이루어져 있는데 큰 바위는 어미 개, 작은 바위는 강아지 개라는 것이다. 강아지들은 어미개 주변에서 일정한 간격을 두고 떨어져 놀고 있는 모습이고 어미개는 나무그늘아래서 배를 깔고 엎드려 있는 자연스럽고 편안한 형상이다. 이렇게 자연스럽게 형성된 개들이 호랑이의 주린 배를 채워주니 호랑이는 마을에 해코지 할 이유가 없는 셈이다. 
 

이와 같이 호랑이 산과 개 바위는 풍수지리에서는 꼭 갖추어야할 최고의 셑트 플레이와 같은 것이니, 전의이씨 시조 이도의 묘를 풍수지리에서 최고의 명당자리 중의 하나라고 이름하는 것이다. 그런 이런 호랑이과 개의 셑트에도 그것이 깨어질 위기가 닥쳤던 적이 있었다. 식민강점기에 경부선 철도를 놓으면서, 설계상 개 바위를 없애야 했던 모양이다. 그런데 이 개 바위가 전의이씨 시조 묘의 풍수지리적 가치를 위해서는 절대적인 것임을 알았던 이도의 후손들은 이 개 바위가 파괴되지 않도록 백방으로 노력하여 철로의 노선을 변경하여 지켜냈던 것이다. 이를 전의이씨는 개 바위 보전의 역사를 비로 건립하여 사람들에게 알리고 있다.

그 내용의 개략을 보면 후손의 선대묘역을 수호하고자 하는 정성이 담겨 있다. 경부선 철도 부설과 관련하여 경부선 철로의 직선이 구암을 통과하여 파괴될 상황에 처하게 되었다. 이에 의정부대신 이근명 · 전검사 이건호 · 성균관사복 이학로 · 참판 이성렬과 이득로가 철도총재 신기선과 주경성공사 임권조에게 구암의 보존을 호소하였으나 이뤄지지 않았다. 그리하여 참장 이희두가 철도주무자인 강남철부를 10여차례 방문하여 간절한 성의로 교섭하였으나 결과를 얻지 못하였고 오히려 철로 이설비 10여만원의 요구를 당하였다. 그러자 이희두는 구암바위는 깰수 없다며 신을 감탄시키고 바위를 뚫을 수 있을 정성으로 강남철부를 설득하였다. 이에 강남철부는 이희두의 조상을 받드는 봉선성의를 칭송하고 철로의 직선노선을 조금 옮겨 주었다. 그러하여 개바위의 일부는 깨어졌으나 개바위의 전형은 남게 되었다.

   유천리 구암, 어미 개 바위와 강아지 바위
이렇듯 이도의 후손들은 조상과 선조를 받드는 봉선사업에 지극정성의 전통을 지니고 있어서인지 전의예안이씨는 조선시대에 대표적인 명문가문의 하나로 칭송되었다. 일찍 고려개국공신가문으로 고려가 멸망할 때까지 그 가문의 지위를 유지한 가문은 몇몇에 불과 했는데, 파평윤씨, 문화류씨, 철원최씨 등과 함께 전의이씨가 있었다. 전의이씨는 조선시대에 들어와서 명문가문으로서 문과급제, 명신록, 상신록, 호당록, 청백리안 등의 명부에 이름을 올린 인물이 많았다.

조선왕조 시대에 선비의 치인을 위한 과정의 하나라고 할 수 있는, 과거시험 급제는 어려운 일이었다. 그런데 전의이씨는 문과에 급제한 인물을 수록한 문과방목에 187명이 올라있다. 조선초기에서 17세기 중반까지의 유명한 신하 407명의 명단을 기록한 명신록에 오른 인물은 34인이었으며, 최고관직인 정1품에 해당하는 영의정·좌의정·우의정의 재상들의 이름이 기록된 상신록에 4인이 올랐다. 세종 때 설치하여 조선전기에 운영된 것으로, 문신 가운데 글재주가 뛰어난 젊은이를 선발하여 그 이름을 기록한 호당록에 4인이 올랐으며, 관직 수행 능력과 청렴·근검·도덕·경효·인의 등의 덕목을 겸비한 조선시대의 이상적인 관료상인 청백리 총 217명의 명단을 기록한 청백리안에 7인이 올랐다.

철마가 지나는 구암 개바위에서 강아지 바위 옆에 앉아 생각해 본다. 이렇듯 전의이씨 가문의 융성은 어디

   
   
 
이정우, 대전출생, 대전고, 충남대 사학과 졸업,충남대 석사, 박사 취득, 한밭대 , 청주대 외래 교수 역임, 공주대, 배재대 외래교수(현),저서 : 조선시대 호서사족 연구, 한국 근세 향촌사회사 연구, 이메일 : sjsori2013@hanmail.net
에서 오는 것일까? 신라말기의 먼 조상 이방이의 착하고 어진 마음씨 때문인가? 아니면 이석재의 무덤을 용자리 명당에 써서 그런 것일까? 아니면 시조 이도의 묘소를 호랑이 자리 명당에 잘 써서 일까? 그렇지 않다면 호랑이의 존재를 있게끔 하는 구암 개바위를 지켜낸 선조들의 봉선정성 때문이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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