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생 152년, 사후 63년... 관노에서 조선 최고 갑부까지
충청권에서 김갑순 하면 이름 앞에 ‘공주갑부’라는 접두어가 따라 붙는다. “김갑순이 한양에 갈 때 절반은 자기 땅을, 절반은 남의 땅을 밟고 다녔다”, “관노에서 시작해 군수까지 오른 성공한 인물로 기부도 많이 했다”, “소작인들에게는 인간적이었고 소작료 또한 적게 받았다”, “본명이 순갑(淳甲)이었으나 고종이 갑순이라는 이름을 하사했다”는 전설 같은 이야기가 무수히 많다.
올해로 김갑순 출생 152년, 사후 63년이 되었다. 그가 살았던 삶은 세월이 흐르며 살이 보태지기도 하고 과장되기도 하며 여러 버전이 떠돈다. 그가 1900년대 이후에 남긴 자필이력서에 출생과 본적지, 공직 이력이 상세히 나와 있다. 출생은 명치(明治)5년, 즉 1872년.
생이다. 본적과 주소는 같은데 충남 공주군 공주면 욱정(旭町) 245번지로 지금의 반죽동이다.
당시 충남도청(현 공주사대부고) 정문에서 고작 100m 밖에 떨어지지 않은 곳에 위치했고, 인접한 곳에 일본군 공주수비대가 자리했었다. 김갑순 본가 안에는 애첩의 집이 따로 있었는데 ‘공주하숙마을’이 조성, 리모델링되어 여행자 쉼터로 사용하고 있다.
그에 대한 세간의 이야기를 정리해 보면. 아버지 김현종과 어머니 밀양박씨 사이에서 태어났고 아버지와 형은 김갑순이 어릴 때 사망, 13살에 호주가 되었다. 공주장터에서 국밥장사를 하는 모친에게 한 사람(나뭇꾼 또는 지관)이 찾아와 당대발복(當代發福)의 길지를 소개 했다. 많은 양의 쌀을 주어 그 명당을 샀고 김현종이 사망하자 금계포란(金鷄抱卵)형 명당에 묻었다. 학벌과 집안이 변변치 않은 김갑순은 선친이 묻힌 명당 덕분인지 조선의 거부, 충청권 최고의 부자가 되었다. 대략 이런 줄거리이다.
천하의 명당인 김갑순의 부친 김현종 묘와 1961년에 사망한 김갑순 가족묘는 직선으로 1.3㎞ 남짓한 곳에 따로 조성했었다. 그런데 무슨 연유인지 김현종 묘가 ‘금계포란’의 길지를 떠나 김갑순 곁으로 이장(移葬)해, 현재는 가족 묘역에 안장되어 있다.
필자가 5년 전에 김현종이 처음 묻혔던 공주시 계룡면 소재 당대발복의 명당을 찾아간 적이 있다. 당시에 이미 김현종 묘가 이장한 상태였고, 다른 사람의 가묘와 화강암 상석(床石)이 자리하고 있었다, 주변에는 크게 자란 침엽수와 활엽수가 묘역을 지키고 있었다.
얼마 전 다시 찾은 김갑순 가족묘역은 5년 전과 많은 변화가 있었다. 김갑순 묘와 주변에 따로 있던 정부인(貞夫人) 단양 우씨의 묘가 파묘되었다. 묘를 지키던 비석들은 김현종 묘역 계단 아래 경사지에 위태롭게 세워졌다. 먼저 김갑순비가 세워지고 정부인(貞夫人) 단양우씨 비, 숙부인(淑夫人) 통천김씨 비, 고등법원 판사를 지낸 장남 종석의 비가 맨 아래에 세워졌다. 파묘에서 수습된 유골들은 김현종 묘 곁으로 모아졌다.
김갑순의 정부인 단양우씨 묘역 곁에 있던 제당(齋堂), 복락정(復樂亭)은 김갑순 사후에 가문의 번영과 즐거움이 돌아오길 바라며 세웠다. 그러나 돌보는 사람이 없어 건물은 폐가화 되다가 주저앉았고 지금은 삭아 버린 목재와 무너진 돌담만이 그 존재를 알릴뿐이다
공주장터에서 국밥을 팔아 김갑순을 키운 밀양박씨가 아들의 앞날을 위해 당대에 발복(當代發福)하는 명당을 구했다. 그러나 김현종의 묘를 이장해서인지 김씨 가문에게 있어 당대발복은 단어 그대로 ‘당대’에만 적용된 것 같아 측은한 마음까지 든다.
관노에서 조선총독부 중추원 참의까지 오르고, 전성기 때 대전 땅 40%를 포함해 1000여만 평의 토지를 소유한 조선 최대의 땅 부자 김갑순 또한, 여느 사람과 다르지 않게 빈손으로 왔다가 빈손으로 가는 공수래 공수거(空手來 空手去), 일장춘몽(一場春夢)의 삶을 살다 간 것이다.
전재홍, 상명대대학원 사진학과 졸업(석사), 한남대 대학원 건축공학과 졸업(박사), 조선일보 기자, 대전일보 사진부장, 중부대 사진영상과, 한남대 예술문화학과 겸임교수, 2024 대전국제사진축제 조직위원장, 이메일 : docuin@naver.com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