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종시 첫 마을을 귀국 후 첫 목회 활동지로 정한 조한수 목사(51).
그는 아직 정리되지 않는 첫 마을 3단지 307동 305호 자신의 자그마한 아파트를 신앙 전파의 교두보로 삼았다. 평범한 가정집이었지만 조목사를 만나고 난 후 느낌은 ‘성령으로 가득한 공간’이었다.
조목사는 현재 홀홀 단신이나 다름없다.
아내와 단 둘이서 만들어야 할 사역 공간은 ‘세종 개혁교회’.
진정한 목회활동을 위해 1992년 뉴질랜드로 떠난 지 20년 만에 돌아와 처음으로 뿌리를 내린 곳이 바로 세종시 첫마을이었다.
그가 한국을 떠난 건 교회 현실에 대한 회의감 때문이었고 새로운 것에 대한 갈증이 현실에 안주하지 않도록 만들었다. 사실 조 목사가 다시 한국으로 돌아가야겠다는 말에 현지 교인은 물론 주민들의 반응은 의외였다.
“이제 고생이 끝나고 편안하게 목회활동을 할 만한데 돌아간다는 게 첫 반응이었습니다. 사실 그랬어요. 저도 그곳에 있으면 편안한데...하면서 고민도 했습니다. 하지만 돌아오는 게 하나님의 길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사서 고생을 한다는 말이 있다. 그는 일궈놓은 터전 위에 안주할 수도 있었다. 편안한 그 길을 버렸다. 조 목사는 뉴질랜드에 있든 세종시에 있든 일관된 생각이 있었다. 바로 교회가 바로서야 된다는 것이었다.
“목사 안수를 하고 항상 그런 생각을 가졌습니다. 성경에서 말씀하신 교회가 뭘까. 예수님이 어떤 교회를 세우시기 위해 오셨을까 하는 것이었죠. 그런데 우리 교회는 어떠합니까. 욕심이 많은 목회자, 가진 자와 그렇지 못한 사람을 차별하는 곳, 큰 교회와 작은 교회의 능력화... 이런 것들이 교회를 수퍼 마켓 경영으로 내몰고 비즈니스 공간으로 만들지 않았습니까. 그게 저에게는 엄청난 충격이었죠.”
결국 뉴질랜드 행에는 이런 한국의 교회 현실이 이면에서 크게 작용했다. 사회의 소금이 되어야 할 교회가 권력화, 상업화, 세속화되는 게 안타까웠다. 예수님과 하나님의 말씀에 충실하면서 사회를 정화하는 게 종교의 역할이라는 생각이 물질을 우선시하는 현실과는 정면을 배치되었다.
“제가 명성 교회 부목사로 있을 때입니다. 그 때 프라이드를 타고 다녔어요. 저는 아무런 불편이 없었어요. 주변에서 말들이 많았어요. 적어도 소나타 정도는 타고 다녀야 한다고...그게 정말 문제가 됩니까.”교회가 파트별로 경쟁을 하고 실적을 따진다. 이건 회사다. 종교의 형식을 빌린 사업체다. 그걸 직접 목격하니 더 싫어졌다.
“92년도에 뉴질랜드 타우랑가라는 항구도시에 갔습니다. 키위로 유명한 곳이죠. 거기서 원주민을 상대로 ‘예배가 무엇인가, 교회는 무엇을 하는 곳인가. 기도는 어떻게 하는가’를 가르치기 시작했어요. 처음에는 복장조차 갖추지 않았던 사람들이 점차 진지해지고 깨끗한 옷을 입고 교회에 오기 시작하더군요.”
그렇게 출발한 목회가 그곳에서만 20년을 보냈다. 그가 평소 그리던 하느님의 교회를 이 땅에 심었다. 그게 이른바 ‘개혁(Reformed)교회’다. 변질되지 않는 신앙과 신학을 몸소 실천한 선지자들의 길을 따라가는 오염되지 않는 교회가 바로 ‘개혁교회’다. 요컨대 상업화, 거대화를 지양하고 단 한명의 교인이라도 정말 그리스도의 정신 실천을 통해 참된 사회를 만들어 보겠다는 의지를 가진 교회를 말한다.
“성경적 교회에 대한 갈등이 많았죠. 그 때 아내가 하느님에 의지하고 다시 성경을 붙잡아보라고 충고를 했습니다. 그 말에 신학공부를 할 때처럼 다시 성경공부를 했었습니다. 그리고 찾은 게 바로 ‘Reformed Church’였습니다.”
철저한 성경 중심이고 신앙고백이 사역활동의 핵이었다. 거기에다가 ‘회개’가 첨가되었다. 교회 안에서 스스로 생활화를 통해 전도하고 교인들을 설복시킨다는 게 이 교회의 특징이었다. 물론 이러한 교리를 실천한 선각자들이 이미 역사 속에는 존재했었다. 다만 교회가 조직화되고 세속화되다 보니 이런 교회의 존재감이 적어졌을 뿐이었다. 케케묵은 방법을 끄집어 낸 건 그만큼 현실 교회가 교리에서 어긋나있었다는 얘기다.
“교회는 권위가 있어야 합니다. 신자수를 늘리려고 용서하지 못할 사람까지 감싸서는 안 됩니다. 아직 한국에는 이런 교회가 생소합니다. 왜냐하면 교회를 문화센터 정도로 생각하는 게 현실이기때문이죠. 교회가 이래서는 절대 안 됩니다.”
뜻을 세우고 온 것이 바로 교회다운 교회에 대한 갈구 때문이었다. 그는 현실 교회에 대해 매우 비판적이었다. 그 비판이 상대를 밟고 일어서는 모양새가 아니었다. 정당하고 설득력이 있었다.
“모든 걸 다시 시작하려고 합니다. 저도 적은 나이는 아니지만 하나님이 이 나이에 부르신 것 마지막 순종하라는 부르심으로 받아들였습니다. 가진 건 의욕과 경험뿐이지만 기독교인 삶에 대한 고뇌를 하는 분이나 신앙 때문에 갈등을 하는 분들께는 좋은 계기가 될 것입니다.”오는 7월이면 출범하는 세종시와 함께 조 목사가 그리려고 하는 그림은 이제 막 스케치가 끝났다. 아직은 신자도 없다. 뜻을 같이 한 이웃 한명이 현재 인원이다. 하지만 ‘하느님께서 보내주신 삶을 보여주면 교인은 오게 된다’는 그의 신념을 보면서 작은 교회에서 훌륭하게 종교적인 삶을 실천하는 목사님이 떠올려진다. 시작은 작아도 끝은 사회에 소금이 되는 그런 교회를 먼저 그려보았다. (연락처) 010-5568-471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