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인네 산에 붙혀진 이름은 '장군산'
여인네 산에 붙혀진 이름은 '장군산'
  • 이정우
  • 승인 2013.08.29 16:52
  • 댓글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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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정우의 Story in 세종]장군면의 장군, 김종서 장군..."밤실을 아시나요"

   김종서 장군 유허지
세종시의 서남쪽 방면에 장군면이 있다. 원래 공주시 장기면과 의당면에 속했던 지역인데, 행정구역 개편에 따라 세종특별자치시에 편입되어 장군면이라 이름 지어진 곳이다. 이곳은 박정희 전 대통령에 의해서 1966년 4월에 계획에 들어가 10여년이 지난 1977년 12월에 완성되어 최종 보고된 ‘새서울백지계획(白紙計劃)’의 중심지였다.

박정희 전 대통령은 남북대치의 군사적 상황에서, 휴전선에서 평양까지의 거리인 70km 보다 더 이남인 지역, 그리고 해안선으로부터 40km 떨어진 곳을 선택하도록 했는데, 장군면 지역은 수도 이전 1차후보지였던 천안 · 진천 · 충주 중원· 공주 · 연기 대평 · 청원 부강 · 보은 · 논산 · 옥천 · 금산 등과 함께 선정되었고, 다시 공주, 천안, 논산 등 3곳으로 압축된 2차 후보지였으며, 마지막 최종후보지로 선정됐던 곳이다. 곧 이 지역은 박정희 전 대통령이 추진한 ‘새서울’ ‘신수도’ 자리였다.

 

세종시 장군면의 북쪽과 남쪽에는 그리 높지는 않은 두 개의 산이 있는데, 이 산들이 지역을 양분하고 있다. 위쪽은 국사봉(國師峰)이, 아래쪽은 장군산(將軍山)이 있다. 국사봉이라 이름 지어진 산은 전국적으로 몇 곳이 있다. 산천이 변하고 인걸이 변해도 변화하지 않고 그 존재를 강하게 유지하는 것 중에 지명이 있다.

그런 지명중에 ‘국사’라는 이름이 들어가 있는 산은 그렇게 많지 않거니와, 그렇게 이름이 지어진 산 주변 지역에 사는 사람들은 그 지역에서 나라를 위한 큰 인물이 배출되었거나, 또는 언제가 그런 인물이 태어나게 될 것이라고 믿고 있다. 그런 점에서 세종시 장군면의 국사봉도 그러한 곳 중의 하나라고 할 수 있다.

국사봉은 높이가 210여 미터 정도로, 산으로 보자면 그리 높은 것은 아닌데 골짜기가 깊고, 자락이 길다. 품고 있는 마을도 송문리 · 송정리 · 평기리 · 대교리 · 하봉리 · 도계리 · 봉안리 · 용현리 · 송학리 · 태산리 · 용암리 등으로 적은 수가 아니다. 또 그 산에 올라가보면 가히 먼 곳 산들이 연꽃잎처럼 포개지고 다시 또 포개지는 절경를 이룬다. 나라를 이끌어가는 인물이 배출될 기운이 서리어 있는 곳이라 하겠다.

장군산은 은용리 · 금암리에서 공주시의 석장리 · 동현리에 걸쳐 있는 산으로 350여 미터 높이로 타원형의 토산이다. 여인네 한복 치마자락을 자락자락 펼쳤을 때와 같은 형태로 부지가 넓고 골짜기 또한 길다. 이는 금강을 사이에 두고 강 건너의, 높은 바위머리 관을 쓰고 있는 남정네 계룡산과 비교가 된다. 계룡산은 금강으로 막혀서 그리운 여인을 만나지 못하고, 다만 높은 곳에서 마냥 여인네를 내려 보아야만 하는 애틋함을 지니고 있는 형상이다. 백두대간의 금북정맥과 금남정맥의 만나지 못하는 슬픔이라고나 할까?

그런데 아이러니한 것은 이 산의 형상은 여인네 산임에도 불구하고 이름은 장군산이다. 이름이 이렇게 정해지게 된 데는 분명하지 않지만, 이 지역의 대표인물이라 할 수 있는 김종서 장군과 깊은 관련이 있다고 옛이야기가 전한다. 이 산에 대해 전해오는 구전에 따르면 김종서장군이 이곳에서 무예를 닦았다는 것이다. 그래서 이 산을 김종서 장군이 활동했던 산이라 하여 장군산이라 이름 지어졌다고도 한다.

그렇다면 이곳에서 무예를 닦던 김종서 장군은 누구인가. 그는 순천김씨로 공주시 월곡리 지계실에서 태어났다. 문과지평으로 증 찬성 태영(台泳)의 손자였고, 도총제 증 영의정 수(陲)의 아들로, 1390년(공양왕2)에 3남1녀중 차남으로 태어났다. 어머니는 증 정경부인 성주배씨로 조선 태조대에 대사헌의 우두머리를 맡았던 규(規)의 따님이었다. 

김종서 장군이 공주에 어떻게 연고를 맺게 되었는지는 분명치 않다. 분명한 것은 1452년 단종이 즉위하던 해 겨울에 공주에 있던 김종서 자신의 조상무덤에 제사하러 왔었다는 실록기록이 있고, 이듬해 계유정난 이 발생했을 때 그의 아들 김승벽(金承璧)이 공주·전의 등지로 도망을 했으며, 또 아들 김승벽이 공주의 농장(農庄) 등지에 숨어 있었다는 기록이 있다. 그러므로 공주는 김종서의 선향이자 전토가 있던 세거지였음을 알 수 있다.

 
김종서장군의 탄생지에는 재미있는 구전이 전해온다. 장군이 태어난 땅은 그 기운이 쎈 곳이라고 한다. 그리하여 무엇인가 자신의 뜻을 이루려는 사람들이 이곳에 와서 기운을 받고자 살았는데, 뜻을 이루기는 커녕 다들 미쳐서 나갔다는 것이다. 그런데 유달리 불개미만은 이 터에서 왕성하게 집을 짓고 잘 살았다는 것이다. 그만큼 뭇 사람들은 감당하지 못할 강력한 기운의 터이며, 얼마나 생가 터의 기가 쎈 곳인가를 알려주는 구전이다. 그런 한편으로 이런 터에서 불개미가 살았다는 것은, 불개미가 강력한 기운을 갖고 있는 존재임을 방증하는 것이기도 하다. 생가터에 그냥 개미도 아니고 ‘붉은 개미’, 또는 ‘몹시 심한 개미’라는 뜻의 불개미가 살았다는 것은 무엇을 말하는 것일까.

불개미는 식성도 좋을 뿐 아니라 그에게 한 번 물리면 따끔거리니 불개미가 사는 곳에 사람들은 집을 짓고 살기에는 적당치 않는다는 말이리라. 또한 불개미는 자기몸무게의 50~100배정도의 무게를 움직일 수 있는 다른 개미들처럼 힘도 쎄다. 크기는 작아서 일개미가 5~8㎜에 불과한데도 말이다. 또 불개미는 효능이 뛰어난 약재로도 인식되고 있다. 그러니 불개미는 능력자인 셈이다.

그러니 당연히 기가 강한 장군의 생가터에서 살 수 있었던 것이다. 그러면 좀 더 곱씹어 보자. 붉은개미의 붉은색은 무엇을 말하는 것인가? 피요 열정이며 정열이고 충성을 의미한다. 정치적으로 제거가 되어야 했던 김종서장군의 그것을 상징하고자 하는 것은 아니었을까? 또 현실적으로 그러한 인물이 태어난 곳에 자신의 이익만을 도모하고 자신의 뜻만을 이루고자 했던 뭇사람들의 욕망을 경계하고자 하는 것은 아니었을까?

국사봉에서 흘러내린 맥줄기가 내려와 좌청룡 우백호로 갈라지는 대교리 밤실에 김종서 장군의 묘소가 있다. 장군의 묘역은 재실, 신도비, 홍살문, 정려문, 묘소 등으로 이루어져있다. 묘역에 첫 입구에 있는 신도비는 특이한 형상이다. 보통의 신도비는 이수 (螭首:비석의 머리)는 뿔 없는 용을 받치고 있는 받침돌이 거북이 모양의 귀부 (龜趺:거북이 모양의 비석 받침돌)인데, 장군의 신도비 받침돌은 두꺼비 모양의 섬부(蟾趺: 두꺼비 모양의 비석 받침돌)라는 점이 상서롭다. 김종서장군의 역사적 성격도 특별하지만, 신도비를 받치고 있는 받침돌까지 이러하다니 신비롭지 않을 수 없다.

왜 굳이 거북이가 아닌 두꺼비 형상을 신도비에 받침돌

 
로 채택하였을까? 그것은 풍수지리 및 민속신앙과 관련이 있다. 장군의 묘소가 있는 마을은 풍수지리적으로 그 형상이 지네형상이라고 한다. 지네는 몸에 독을 지니고 있어서 그 독성이 유해한 동물이다. 그런데 그러한 지네를 두꺼비가 잡아 먹는다는 것이다. 민속적으로 보자면, 어둡고 음습한 지네를 더 강력한 독과 기운을 가진 두꺼비가 물리쳐 준다는 ‘두꺼비의 지네퇴치’설화인 것이다.

지네를 잡아먹을 수 있는 대표적인 동물로 두꺼비 외에 닭이 있다. 닭은 강력한 부리로 지네를 쪼아 먹으니 지네는 꼼짝없이 당하고 마는 것이다. 그래서 민간에서는 ‘지네먹인 닭’을 기력를 돋게 하는 음식으로 인식하기도 한다.

그런데 왜 신도비의 받침돌 형상으로 닭이 아닌 두꺼비 형상을 만든 것일까? 그것은 닭이 ‘제물’, ‘희생’, ‘하찮은 것’ 등을 상징하는 것에 대해, 두꺼비는 ‘다산’, ‘풍요’ 를 상징하는 것과 관련된다. 따라서 장군의 신도비를 만드는데 받침돌의 형상을 닭보다는 두꺼비의 상징성이 더 훌륭하여 이것이 채택되었으리라.

이 곳의 지명은 밤실이다. 다른 말로는 율리(栗里)이니 율곡(栗谷)이고 밤골이다. 옛날에 이곳에 밤나무가 많았었나 보다. 지금도 장군면 · 정안면 · 의당면 지역은 유명한 밤의 주산지인 것을 보면 이와 무관하지는 않은 것 같다. 김종서 장군을 제사지내는 재실은 이곳의 지명과 관련하여 그 이름이 율리재(栗里齋)이다. 말 그대로 ‘밤골재실’이다. 왜 구지 밤골재실일까. 그것은 밤골에 장군의 묘소가 위치해 있어서 그렇겠지만 이외에 밤이 갖고 있는 상징성과 관련이 있다고 생각된다.

밤은 땅속에 들어간 최초의 씨앗 밤이 싹을 틔우고 줄기가 생기고 잎이 생겨 아름드리 나무가 되어도 최초의 씨앗 밤은 땅속에 생밤인 그 상태 그대로 달려있다고 한다. 그리하여 밤의 이러한 생육의 특징은 사람이 자식을 낳고, 그 자식이 아이를 낳고, 또 다시 그가 자식을 낳아, 대가 발전하고 자손이 번성하여도, 최초로 자신을 낳아 준 그 조상은 한 분이라는 것으로 귀결되는 것과 같다.

그것은 현재의 나와 나를 있게 한 먼 옛날의 조상의 관계를 의미한다. 곧 조상은 먼 옛날에 돌아가셨어도 현재의 나에게 영원히 살아계심을 의미하는 것이다. 또 김종서 장군의 재실 이름은, 다른 역사적 인물의 그것에 흔히 들어가는 충(忠) · 모(慕) · 현(顯) · 영(靈) 등의 글자 하나 들어가지 않고 ‘밤골에 있는 재실’이란 뜻으로 ‘율리재’라고 소박하게 지었다. 장군의 이름과 그 정신을 흩트리지 않고 진솔하게 현재에도 전하고 있음에 마음이 숙연해 진다.

또 밤의 열매가 맺어지는 형상이 어떤가. 밤은 한 송이에 여러 톨의 열매가 들어있다. 이런 형상은 곧 한 집에 어울려 사는 사이좋은 형제를 의미한다. 곧 살아있는 형제자손간의 화목과 우애를 의미한다. 밤은 한 나무에서 아주 많은 밤송이와 밤톨이 열린다. 이는 다산과 풍요 그리고 자손의 번성을 의미 한다. 또 밤톨의 색깔은 어떠한가.

표면은 검붉은 색이고, 속은 하얀색이다. 곧 검붉은 색은 피와 열정 그리고 충절을 의미하는 것이며, 하얀색은 청렴과 청결 그리고 순수와 결백을 의미한다. 유교사회에서 요구되는 충절과 청렴의 덕목을 밤은 한 톨에 다 담고 있는 것이다. 따라서 김종서 장군의 재실이름이 율리재라고 이름 지어진 것은 이와 같이 자손들의 발전과 화목 그리고 번성, 나아가 나라에 대한 충성과 결백을 지킬 것을 바라는 뜻에서 그리 된 것은 아닐까.

 

산소는 좌청룡 우백호가 잘 형성되어 있고, 멀리 장군면 남쪽의 중심산인 장군산이 바라보인다. 풍수지리적으로 잘 갖추어져 있으며 문(文)을 상징하는 청룡보다는 무(武)를 상징하는 백호가 발달되어 있는데, 장군이 무인이어서 그런 것일까? 이를 현대적으로 보자면 청용은 명예를 백호는 경제를 의미한다. 곧 장군의 묘소가 백호가 발달되어 있으니 세종시가 경제력 있고, 우리나라가 부자 되는 것은 말해주는 것은 아닐까?

세종시 서쪽에 위치한 장군면은 예사롭지 않은 땅이다. 박정희 전 대통령에 의해 ‘새서울’로 정해졌던 곳이며, 북방의 영토 확장에 공을 세운 김종서 장군의 역사가 서려있는 곳이다. 김종서장군은 세종대왕의 뜻을 받들어 1433년 12월 함길도 도관찰사로 부임하여 7~8년여에 걸쳐 두만강 주변의 영토를 개척하였다. 부령 · 회령 · 종성 · 온성 · 경원 · 경흥으로 이름 되는 육진을 개척하니 삼국통일 이후 초유의 북방영토개척이었다.

세종시에서는 2020년까지 김종서(1383∼1453) 장군 묘역을 종합 정비하여 역사문화 관광지로 탈바꿈하게 한다고 한다. 이럴 즈음 업그레이드된 문화 역량과 새로운 관광의 비전을 만들어 보자. 이 고장의 대표 인물 김종서 장군의 묘역 밤실에 밤나무를 조경수로 적극 활용하는 것은 어떨까? 밤도 따고 역사도 되돌아보면서 장군의 활동과 업적을 생각해 보면 어떨까?

   
   
 
이정우, 대전출생, 대전고, 충남대 사학과 졸업,충남대 석사, 박사 취득, 한밭대 , 청주대 외래 교수 역임, 공주대, 배재대 외래교수(현),저서 : 조선시대 호서사족 연구, 한국 근세 향촌사회사 연구, 이메일 : sjsori2013@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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능도 2013-08-30 22:40:59
김종서 장군에 대해 자세히는 몰랐는데 정확히 알려주서셔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