처서의 다른 이름 '조서'를 아세요
처서의 다른 이름 '조서'를 아세요
  • 이정우
  • 승인 2013.08.07 11:03
  • 댓글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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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정우의 Story in 세종]전의 출신 직언으로 연산에 맞선 내시 김처선

   내관으로 바른 말을 하다가 연산군에게 무참하게 죽임을 당한 김처선, 드라마 '왕과 나'에서 주인공 김처선 역을 맡은 탤런트 오만석
올해는 8월 23일이 처서(處暑) 날이다. 이 날은 어떤 날인가. 하늘의 태양이 지나는 궤적을 평면이라 간주하여 황도(黃道)라 이름하고, 시간의 흐름에 따라 봄·여름·가을·겨울로 구분하여 그것을 다시 24개의 기운으로 세분하여 만든 절기가운데 입추와 백로 사이에 드는 절기이다. 보통 음력 7월15일 전후에 들며, 절기의 숫자상으로 보자면 14번째에 해당이 된다.

입추라는 절기는 가을이 시작되기는 하나 아직 더운 여름의 기운이 남아 있을 때이다. 이날은 보통 음력 7월 초하루 전후가 된다. 그리고 이날로부터 일주일전후의 시기에 음력 7월 7석이 온다. 칠석날은 하늘에 펼쳐진 양기가 이제 음기로 전환되어 가는 때이다. 곧 양의 시대에서 음의 시대로 전환되는 상징물로서 비(雨, Rain)가 내리는 것이다. 따라서 칠석날은 어김없이 비가오거나 아니면 거의 흐리게 되는 것이 바로 이런 이유 때문이다. 처서라는 절기는 칠석의 일주일정도 뒤에 드는 절기로 음의 계절의 상징물인 서리와 눈이 자라나는 단계에 있으니 이제 양을 멈추게 하는 자리인 셈이다.

또, 처서와 관련해서 “모기도 처서가 지나면 입이 삐뚤어진다”라고 하는 속담이 있듯이 처서가 지나면 더위도 꺽이어 날씨가 선선해지게 되니, 여름에 맹위를 떨치던 모기도 그 기세가 약화됨을 비유하는 것이다. 처서라는 한자를 표면적으로 보자면 처(處)라는 글자는 ‘곳’ 또는 ‘때’의 의미이고, 서(暑)라는 글자는 ‘덥다’의 의 의미이니 ‘더운 곳’, ‘더운 때’ 라고 생각할 수 있다.

보다 더 심층적으로 보자면 ‘처’라는 글자의 의미에는 ‘쉬다’, ‘정착하다’, ‘머무르다’의 뜻이 있고, ‘서’라는 글자에는 ‘여름’이란 뜻도 있다. 그러니 ‘처서’는 ‘더움이 쉰다’. ‘여름이 정착한다’. ‘여름이 머무른다’의 뜻이 있다. 곧 ‘여름이 더 이상 발달하지 못하고 정체되고 이제 꺽이기 시작해 간다’의 뜻인 셈이다. 선인들은 참 지혜로우셨다. 숨기고 숨겨서 그 깊음을 헤아려 보아야 만이 그 뜻과 맛을 알게 하셨으니 말이다.

그런데 이런 처서라는 절기의 또 다른 이름이 있으니 조서(徂暑)이다. 글자그대로 보자면 ‘조’는 ‘가다’, ‘미치다’, ‘비롯하다’와 함께 ‘막다’, ‘저지하다’, ‘죽다’ 등의 뜻이 있다. 곧 처서와 같은 의미로서 사용된 것이다. 곧 ‘여름이 막혀지다’, ‘여름이 저지되다’, ‘여름이 죽다’의 뜻이 있는 것이다. 그럼 어째서 처서를 조서라는 말로 대체되어 사용하게 된 것일까. 거기에는 전의김씨의 인물로 전의에서 살았던 인물이며, 조선왕조 연산군대 직언의 내시 김처선과 관련이 있다.

   전의 향교에서 옛 전의현청으로 향하던 작은 도로

김처선은 본관이 전의이고, 성씨는 김이니 곧 전의 김씨이다. 전의를 본관으로 하고 있는 성씨로 1895(고종32)년 간행된 호서읍지에 이하면, 이씨·유씨·하씨,전씨가 있다고 기록되었는데, 전의김씨는 여기에 빠져있다. 김처선은 언제 태어났는지 분명하지 않다. 그가 내시였기 때문이란 점도 있겠지만, 그보다는 그가 연산군에게 직언을 하다가 죽임을 당했고, 또 그의 일족이 그와 연좌되어 철저히 징벌을 당하는 끔찍한 재앙을 당했기 때문이라고 생각되어진다.

2000년 대한민국 인구총조사의 본관별 성씨별 통계조사에 의하면 전국에 전의김씨는 127가구 394명이 생존해 있음이 확인된다. 김처선의 행적을 파악할 수 있는 처음기록은 1453(단종1)년 10월 13일의 기록이다. 이에 의하면 그는 당대의 권력실세였던 김종서(金宗瑞)와 안평대군(安平大君) 등과 같은 무리 사람이었다. 이른바 수양대군(首陽大君)이 김종서와 황보인 등을 제거하고 정치권력을 장악하는 계유정난(癸酉靖難)이 일어났을 때, 김종서의 무리로서 경상도 영해에 귀양을 보내졌다가 이듬해 1454(단종2)년 2월 19일에 귀양이 풀리고 벼슬이 돌려졌다.

그런데 어찌된 일인지 8일 만인 2월 27일에 벼슬이 취소되었고 자신의 본향인 전의로 출입이 한정되는 형을 당하였으며, 3월 19일에는 전의 본향의 관청 노비가 되는 중형을 당하게 되었다. 계유정난의 주동세력은 김처선이 용서할 수 없는 죄를 지었다고 판단하고 그의 앞날을 막아버렸던 것이다. 비참한 세월이었으며, 굴종의 세월이었을 것이다. 이런 시기에 김처선은 어떻게 자신의 인생을 살아가야 할 것인가를 고민하지 않았을까? 분명한 것은 자유의 몸이 되고 다시 정치적으로 복권되는 그날을 꿈꾸며 기다렸을 것이다. 그러던 중 김처선에게도 새로운 희망의 소리가 날라들었다. 1457(세조3)년 8월 18일 전의현의 관청 노비가 되었던 김처선을 석방하라는 소식을 듣게 되었다.

석방이 된 김처선은 전혀 새로운 모습으로 역사에 등장하였다. 석방된 지 3년여의 시간이 지난 1460(세조6)년 5월 25일의 기록에 그는 내시부(內侍府:내시들이 속해있던 관청)의 환관이 되어있다. 그가 언제부터 이곳의 관원이 되었는지는 알 수 없다. 분명한 것은 적어도 신원이 된 후 내시가 되었던 것을 알 수 있다. 이후 세조대 김처선에 대한 문헌기록은 보이지 않다가 성종 대부터 조선왕조실록 기록에 등장하고 있다. 성종 대에 김처선은 성종의 측근으로 왕을 대신하여 공신을 위로하러 다니기도 했고, 성종을 대신하여 형벌과 의금부 감옥을 살피었고, 경연관과 예문관의 관원에게 음식을 제공하는 업무를 주관하였으며, 임금이 몸소 논밭에 나가 농사를 지을 때 모시고 가서 농사를 지어, 이에 대한 공로를 인정받아 어린 말 한 필을 하사 받기도 하였다.

내시가 된 후 30여년 동안 그의 위상은 높아만 갔고 1488(성종19)년에 벼슬이 내시부의 최고 높은 어른으로서 종이품 문무관의 가정대부에 해당되는 내시부의 최고자리에 오르게 되었다. 이런 성종의 성은을 입은 김처선은 성종이 돌아가신 후 3년 동안 왕의 측근 만이 할 수 있는 선릉(宣陵:서울시 강남구 삼성동에 있는 성종의 릉)의 시능살이를 하는 영광을 누렸다. 성종이 승하하고 연산군이 즉위하였다. 연산군 즉위 직후에 김처선과 군주와의 관계가 나빴던 것은 아니었다. 아버지 성종을 위해 3년 동안 시능살이한 김처선에게 연산군은 수고의 상으로 말안장과 그에 딸린 물품을 갖춘 말 한필을 하사 하기도 하였다. 그러나 그와 연산군 사이의 좋은 관계는 오래 가지 못하였다.

   옛 전의현청이 자리하던 곳, 지금은 전의초등학교가 들어서 있다.
연산군을 낳아준 폐비 윤씨와 관련한 1504(연산군10)년 윤4월에 갑자사화가 발생하면서 서로의 관계는 틀어졌다. 연산군은 나라일도 제대로 돌보지 않았고, 관청을 철거하고 민가를 이전하게 하여 궁궐을 확장했으며, 자신의 놀이터를 만드는데 주력했다. 또 젊고 예쁜 기녀를 바치게 하였다. 역대 왕들을 섬겨온, 특히 연산군의 아버지 성종의 총애를 받았던 환관으로서 김처선은, 아버지와 같은 성군의 길을 가지 못한 연산군이 못마땅했던 모양이었다. 연산군 입장에선 자신을 낳아준 어머니 윤씨가 폐비될 당시, 김처선이 아버지 성종의 측근으로 있었던 사람으로, 어머니가 폐비되고 죽임을 당하게 하는데 일조하였을 것이라 생각하고 미워했을 것이다. 이런 김처선의 연산군에 대한 생각과 연산군의 김처선에 대한 생각은 서로를 못마땅함과 미워함을 넘어, 마치 서로를 마주보고 달리는 충돌직전의 열차와 같은 상태로 치달았다. 임금과 내시가 충돌하면 누가 이기겠는가? 그것은 뻔 한 것이었다.

그들의 관계는 결국 갑자사화가 발생한 3개월 뒤인 1504년(연산군10)년 7월 16일에 일어나고 말았다. 김처선은 연산군에게 무례의 행위를 저질렀고, 연산군이 이에 화가 나서 김처선을 죽이고 말았다. 일종의 존엄에 대한 불경죄에 대한 응징이었던 것이었다. 그럼 그가 행한 무례한 행위란 무엇인가. 이긍익의 연려실기술(燃藜室記述) 에 보면, 그 정황을 파악할 수 있는 실마리가 있다. 김처선은 비록 연산군이 어둡고 음란하였지만, 매양 정성을 다하여 밝은 성군이 되고 정사에 전념하기를 직언하였다. 이런 그의 충언은 효과 없이 연산군에게 짜증과 노여움을 쌓게 하였다. 그러던 중 1504년 연산군 10년 7월 16일에 궁중에서 일종의 연희놀이를 하게 되었는데, 이때 연산군이 김처선에게 술을 권하였다. 그러자 술에 몹시 취해 있던, 김처선은 화가 나서 연산군에게 “늙은 놈이 네 분 임금(성종·예종·세조·문종)을 섬겼고, 경서와 사서를 대강 통하지만, 고금에 전하처럼 행동하는 이는 없었습니다.”라며 연산군을 향해서 맹렬한 비판의 돌직구를 날렸던 모양이었다. 그러자 이전에 김처선에 대해서 미움이 쌓여있었던 연산군은 화를 참지 못하고 폭발하고 말았다.

연려실기술에 보면, 연산군은 성을 참지 못하여 활을 당겨 김처선을 향해 쏘아서 그의 갈빗대를 맞혔다. 그러자 김처선은 “조정의 대신들도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는데 늙은 내시가 어찌 감히 죽음을 아끼겠습니까. 다만 전하께서 오래도록 보위에 계시지 못할 것이 한스러울 뿐입니다.” 라고 통탄 하였다. 그러자 분이 풀리지 않았던지 연산군은 다시 화살 하나를 더 쏘아 김처선을 맞혀서 땅에 넘어 꼬꾸라트리고는 무사들에게 “김처선의 다리를 끊으라”고 하였다. 그러고는 다시 김처선에게 “일어나 다니라”고 명령하였다. 이에 김처선이 임금을 쳐다보면서, “전하께서는 다리가 부러져도 다닐 수 있습니까.”라며 대들었다. 그러자 연산군은 더욱 화가 났던지, “김처선의 혀를 자르라”라고 하였다. 이때 김처선은 죽을 때까지 말을 그치지 아니하였다. 그가 죽으면서 한 말이 무엇이었을까? 연산군을 향한 비수(匕首:날이 예리하고 짧은칼)의 말이었으리라. 불경·불손·무례를 넘어서 비수. 김처선은 세치(약9㎝)의 혀로 비수를 날린 셈이다.

   전의초등학교에는 이제 개교 100년 기념비가 들어서 있다.
직언이란 이렇게 혹독한 것일까? 김처선이 직언하지 않았더라면 어찌 되었을까? 사실 이미 김처선은 이미 죽음을 결심하고 직언을 했던 모양이었다. 연려기술에 보면 김처선은 이날 집안사람에게, “오늘 나는 반드시 죽을 것이다.” 라고 말하였다. 곧 죽음을 작정하고 연희놀이가 펼쳐지고 있던 궁정에 들어가 거리낌 없이 연산군을 훈계하는 말을 했던 것이다. 김처선이 죽은 다음해인 1505년 봄, 갑자사화가 일어 난지 1년이 지날 즈음에 김처선은 연산군으로부터 더욱더 철저한 응징을 당해야 했다. 김처선을 죽였던 것으로도 마음이 안 풀렸던지 연산군은 1505(연산군11)년 4월 1일에 김처선의 집안의 재산을 모두 몰수하고, 김처선의 집을 헐어 연못으로 만들게 하였다. 또 역적이 배출 되었을 때 행하는 제도로서, 김처선의 본향으로 본관지인 전의를 없애게 하였다. 4월 2일에는 김처선의 부모의 무덤을 뭉게고 무덤주위의 석물을 치우게 하였다. 4월 3일에는 김처선의 양자까지 연좌 죄에 걸게 하였다. 4월 23일에는 김처선의 아내를 ‘내사복시(內司僕寺:임금의 말과 수레를 관리하던 관아)에 보내서 말 먹이 물을 긷게 하는 일을 시켰다. 곧 김처선의 아내를 내사복시의 종으로 만들었던 것이다.

연산군은 자신에게 직언을 한 김처선이 너무 미웠던 모양이었다. 연산군은 김처선의 이름에 사용된 글자를 말살하였다. 같은 해 6월 16일에 조정의 모든 관리와 군사 중에 김처선과 이름이 같은 자가 있거든 모두 이름을 고치게 하였다. 한 달 뒤인 7월 14일에는 절기상 처서를 맞이하여, 얼마나 김처선이 미웠던지 처서의 처 자(字)가 김처선의 이름 처 글자와 같다고 하여, 처서의 이름을 조서로 고치도록 명하였다. 그래서 이때부터 24절기 중의 하나인 처서의 또 다른 이름인 조서라는 신조어가 생기게 되었다.

7월 19일에는 모든 문서에 김처선의 ‘처’ 자를 쓰지 말게 하였다. 이처럼 김처선의 이름에 들어간 처자를 사용하지못 하도록 한 사례는 여러 곳에서 발견된다. 연려실기술에서도, 경북 봉화사람 충재(沖齋) 권발(權撥)이 책문시험(策問試驗:정치에 관한 계책을 물어서 답하게 하던 과거과목)에 합격되었는데, 시험관이 시험지를 적은 글 안에 ‘처’자가 있는 것을 발견하고 연산군에게 낙방시키기를 청하여, 권발이 불합격 처리되었다. 권발은 몇 년 뒤인 1507(중종2)년에 과거에 합격하였다. 또 연산군은 연희놀이를 좋아하였는데, 그 연희놀이의 하나인 처용무(處容舞)의 명칭에 사용된 처자가 김처선의 처자와 같다하여 처용무의 명칭을 풍두무(豊豆舞)로 변경하기도 하였다.

이처럼 연산군은 김처선이 미웠던 모양이다. 도저히 용납할 수 없었던 것이다. 세상에서 김처선을 연상할 수 있는 글자를 없애고, 김처선을 사람들의 기억에서 영원히 묻어버리고 싶었던 것이 아니었을까? 새로 만들어 보자면 멸처갱선(滅處坑善)이라고나 할까? 연산군의 김처선에 대한 응징의 조치들은 1506(연산12년, 중종1) 9월 반정(反正)이 일어나면서, 연산군이 폐위되고 중종이 즉위하면서 정지되었다. 연산군의 정치권력 상실이 그것을 종식시킨 것이었다.

직언을 했다하여 철저하게 연산군에게 죽임당하고 응징당하며 역사 속에서 잊혀졌던 김처선은 250여년이 지난 뒤에 역사 속에 다시 살아나게 되었다. 1751(영조27년) 2월 3일 영조는 김처선의 충성스런 간언(諫言:웃어른이나 임금에게 옳지 못하거나 잘못된 일을 고치도록 하는 말)을 칭송하고 후사(後嗣:대를 잇는 자식)를 정하고, 정문(旌門: 충신, 효자, 열녀 들을 표창하기 위하여 그 집 앞에 세우던 붉은 문)을 세울 것을 명하였다. 255여년 만에 직언으로 인한 죄가 풀리고 명예가 회복된 것이었다. 실학자인 성호 이익도 성호사설 제21권 경사문(經史門) 항백오악(巷伯惡惡)편에서 김처선을 ‘악을 지극히 미워한 사람이었다’고 기술하고, ‘환관이었지만 양심에 가책되는 짓은 하지 않았다’고 평하였다.

   전의현 옛 지도

김처선이 죽음을 무릅쓰고 직언할 수 있었던 힘은 어디서 오는 것이었을까? 술을 좋아했던 호방한 성격에서 온 것이었을까? 계유정란 때에는 김종서 사람으로서 그와 연좌되어 유배되었던, 의리에서 온 것이었을까? 아니면 성종의 총애를 받은 데에 대한 충성에서 오는 것이었을까? 그렇지 않다면, 뭔가 잘못 인생을 살고 있던 연산군을 일깨우고자 하는 인성에서 온 것이었을까? 아니면 무엇이었을까? 김처선이 세상을 뜬지 510년이 지난 지금, 처서를 앞두고 김처선을 생각해 보았다. 김처선은 현대에 들어 영화와 드라마 그리고 책으로 직간접으로 살아났다. ‘사모곡’, ‘왕의남자’, ‘죽음을 각오하고 바른말을 한 김처선’, ‘왕과 나 김처선’, ‘내시’ 등의 작품이 그것이다. 그런데 아이러니 한 것은 모두 연산군과 관련 되어서 작품이 구성되고 있다는 점이다.

김처선은 세종시 전의면 어디에서 살았을까?. 1454년 그전에도 살았는지 모르겠지만, 분명한 것은 1454년 계유정난과 관련하여 전의현으로 귀양보내졌고 관청의 노비로 살다가 1457년 석방 될 때까지 전의에서 살았다. 또 영조 대에 정려도 하사되었다. 그런데 지금은 그 어느 것 하나도 남아 있는 것이 없다. 자취없이 사라져 버렸다. 김처선이 관청 노비로 살았던 전의현청 관아 터로 추정되는 곳을, 그가 살았던 560여년 뒤인 지금 주변을 거닐어 보았다. 김처선이 살았던 전의현청은 지금은 전의초등학교가 들어서 있다. 일제가 식민강점을 하고 전의현청를 훼철하여 일본식 공립학교를 건립하였기 때문이다. 560여 년 전 그때에 김처선도 내가 밟은 이 발자욱을 밟았을까? 아니 나는 김처선이 있었던 그 자리에 제대로 있는 것일까?

이럴 즈음 작은 문화활동을 펼쳐봄이 어떨까? 서울시에서 전개되는 역사적 현장이나, 인물의 생가 터나 살

   
   
 
이정우, 대전출생, 대전고, 충남대 사학과 졸업,충남대 석사, 박사 취득, 한밭대 , 청주대 외래 교수 역임, 공주대, 배재대 외래교수(현),저서 : 조선시대 호서사족 연구, 한국 근세 향촌사회사 연구, 이메일 : sjsori2013@hanmail.net
았던 집자리 등에 표석세우기를 하는 것처럼 말이다. 전의초등학교 교문안쪽 개교기념탑 옆에 이곳이 전의현청 자리였다는 작은 표석과, 충성스런 직언의 내시 김처선이 이곳출신의 사람으로 이곳에서 관청노비로 한 때 살았다는 작은 표석이라도 세움이 어떨까? 직언을 하다 죽임을 당한 김처선을 위해, 세종시 문화콘텐츠의 업그레이드를 위해, 그리고 이 시대를 살고 있는 우리들을 위해서 말이다. 생각해 보자. ‘직언하면 죽는다’와 ‘직언하면 역사에 이름을 남긴다’의 둘 사이에 우리는 어떤 선택을 할 것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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규인이 2013-08-07 23:20:33
드라마에서만 봤던 부분인데 이렇게 세종시와 관련된 얘기었다니 신기하네요 ^^ 재미있게 보고 있습니다 !

전의면민 이동복 2013-08-08 06:55:55
전의면 김처선을 잘 알게해주어 감사합니다. 잘 읽었고요. 세종시에 흩어져있는 인물 많이 발굴해서 써주세요. 기다리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