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군 세종 눈병 고친 '산초나무 물'
성군 세종 눈병 고친 '산초나무 물'
  • 이정우
  • 승인 2013.07.12 15:10
  • 댓글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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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정우의 Story in 세종]전의초수에 얽힌 세종대왕의 애닯은 사연

역사학자 이정우 선생이 세종시 뿌리를 찾기 위한 역사 인물을 기행한다. 이 선생은 현재 공주대 외래 교수로 재직하면서 세종시에 관한 역사적인 인물과 얽힌 얘기를 연재를 통해 독자들을 만나게 된다. 이번 연재는 세종시민의 뿌리를 다시한번 조망하고 자긍심 고취를 위해 발로써 현장을 답사하고 후기를 실을 예정이다./편집자 씀

   왕의 물 축제로 명명된 전의 초수 관련 행사에서 제사를 지내고 있다.
세종시 전의면에서 691번 지방도로를 따라 북쪽 천안시 성남면 방향으로 5 킬로미터 정도를 가다보면 도로 옆에 ‘전의초수 전의면 관정리 100m’라는 6 미터정도의 안내판이 도로 옆에 높게 서있다. 이 안내판이 안내하는 방향으로 우회전 하면, 바로 넓게 터를 마련하고 가운데 소나무, 은행나무 등이 심어져 있는 가운데, 펜스를 쳐서 보호하는 담과 함께 안내판 및 나무장승이 발견된다. 이곳이 바로 세종대왕의 눈병을 치료했다는 영험의 약수 전의초수(全義椒水)이다. 산의 흐름과 관련해 보자면, 운주산의 주봉에서 흘러내린 산세가 소정면의 고려산으로 이어지는 능선가운데 탑 고개가 있는데 이곳에서 관정리로 내려가는 부분에 위치해 있는 것이다.

현재의 전의초수는 원래의 형상에 주변을 성토하여 둑을 쌓아 만들어 놓은 듯이 생각된다. 잘 놓여 진 징검다리 돌다리를 10여 미터 지나면 초수물이 나오는 곳으로 계단이 놓여져 있다. 계단을 내려가면 바닥은 광천수에서 흘러나오는 물러 흥건히 젖어있고 이곳에 놓여진 징검다리 돌다리를 건너면 초수물이 솟아 나오는 샘물이 있다. 천연의 광천수가 솟아나는 곳이다.

초수가 솟아나는 곳은 샘은 한 곳이 아니다. 여러 곳에서 물이 솟아 오르고 있다. 그만큼 전의초수는 용수가 풍부하다는 뜻이다. 그 용천수 가운데 가장 잘나오는 곳 하나를 샘으로 만들어 물은 채취할 수 있도록 해 놓았다. 우리나라에는 유명하고 약효가 용하다는 탄산 약수터가 여럿 있다. 그 가운데 역사적 전통과 이야기를 간직한 곳으로 대표되는 곳 중의 하나가 바로 이곳 전의초수이다.

초수란 무엇인가. 초수를 한자 언어의 글자 그대로의 뜻을 본다면, 산초나무초에 물수이다. ‘산초나무의 물’은 아니지만, ‘산초나무 같은 물’이다. 그럼 산초나무는 어떤 나무인가 대부분의 산초나무의 줄기에는 아카시아가 줄기의 가시보다는 작지만 그보다 더 강력해 보이는 ‘옴팡진 가시’가 달려 있으며, 잎사귀는 작지만 럭비공 같은 모양의 끝부분에는 아주 작은 잔 톱니가 나 있다. 마치 “건드리면 찔립니다”라는 강한 메세지로 자신을 보호하고 있는 것이다.

   용천수라 불리는 초수 샘 입구

열매는 또 어떠한가. 그 열매 또한 맛이 독특하여 맛의 가시라고 생각되는 ‘톡 쏘는 신맛’을 지니고 있다. 그러니 이제 초수가 무엇인지 알 수 있겠다, 초수란 바로 물로서 마시면 가시처럼 혀 바닥을 찌르며 톡 쏘는 신맛의 물이란 뜻이다. 요즘시대의 말로 초수가 무엇인지를 쉽게 말하자면 탄산수이다. 그렇다고 대중적으로 상품화 되어있는 흔히들 말하는 탄산수에 단맛 그리고 향신료 등을 첨가한 사이다와는 구별이 된다. 순수한 초수의 맛은 탄산수로서의 사이다와는 구별이 된다하겠다.

전의초수는 세종특별자치시의 이름과 관련이 있는 세종대왕과 깊은 인연이 있다. 역사는 원인과 과정과 결과가 있다고 하는데, 세종시와 세종대왕도 그러한 것일까? 세종시의 세종이나 세종대왕의 세종은 같은 글자이다. 한자나 한글이나 모두. 더욱이 그 뜻 또한 부합한다. 세상의 마루 즉 세상의 최고이다. 세종대왕이 역대 최고의 성군이셨다면 세종시는 현재의 시간공간에 최고의 도시가 되어야 한다는 뜻이리라.

세종대왕은 중년에 질병에 걸리게 되었다. 세종대왕의 질병의 원인은 여러 가지로 생각되어지나 대표적인 것 두 가지만 보자. 우선 하나로 비만이 이야기 되어 진다. 과식과 운동부족 등이 원인이었겠지만 이런 체격조건으로 인해서 당뇨병으로 이야기 되는 소갈증을 앓게 되었고, 시력의 쇠퇴와 눈병도 않게 되었다. 또 다른 하나는 피부병이었다. 심각할 정도의 무거운 의관의 착용과 몸을 잘 씻지 못하는 존엄으로서의 권위는 개인위생에 빨간 불을 켜지게 만들어, 마침내 땀과 인체분비물로 인한 등창을 앓기도 하였다.

그런 질병을 치료하고자 중년의 세종대왕은 좋다는 약을 쓰게 되었으니, 그런 가운데 천연의 치료법으로 물로 질병을 치료하는 물치료법을 쓰게 된 것이었다. 물치료법으로 사용된 것은 온천요법과 초수요법이었다. 세종대왕은 질병치료를 위해 온천과 초수를 찾게 되었다. 세종시 인근의 아산시의 온천에 행궁을 짓고 왕래하였으며, 전의에도 행궁을 짓고자 하였으나 아쉽게도 당시의 기근으로 인해 실행하지 못하였다. 그래서 전의초수에 직접적으로 왕래하였는지는 분명하지 않다. 그러나 전의초수의 물을 드셨던 것은 분명하다.

세종26년(1444년) 세종대왕이 48세 되시던 해 1월 27일에 전의에 사는 어떤 백성이 전의초수의 효험을 알리게 되면서 대왕에게 전의초수가 알려지게 되었다. 이후 대왕은 눈병을 치료하고자 하는 목적에서 과연 전의초수가 약효가 어떠한지를, 같은해 4월 4일에 유면(柳沔)과 정중건(鄭仲虔) 등을 보내서 알아보게 하였다. 이때 유면과 정중건의 병치료에 효험이 있었는지 국가적 관심에 의해서 전의초수의 물 나오는 샘 주변을 대대적으로 정비하였다.

   왕이 물을 한양으로 나르는 파발마
10여일 뒤인 4월 15일에 초수가 나오는 지역의 범위를 정하여 표시를 하고, 초수 안으로 논의 물과 같은 다른 잡다한 물이 숨어 들어가서 썩이지 않게 조치를 하였다. 곧 초수 샘을 정비하고 다른 물과 썩여서 약효가 혼탁해 지지 않도록 방지 하였던 것이다. 그렇게 한 정비를 한 후 초수 물을 진상하기 시작하였다. 정비를 명한 2달 정도 지난 7월 4일에 세종대왕은 충청도관찰사 김조(金銚)와 경기정역찰방(京畿程驛察訪) 이백견(李伯堅), 내섬시윤(內贍寺尹) 김흔지(金俒之)와 함께 초수의 물을 진상하는 것에 대해서 구체적으로 유시 하였다.

한양 궁궐에서 전의초수 까지는 물리적 거리가 있었기 때문에, 초수물의 약효 유지와 안정성을 위해 특별히 말씀을 하신 것으로 생각되어진다. 전의에서 한양궁궐로 초수를 운송하기 위해, 교통로상의 각 역마다 초수 수송을 전담하기 위해 말 두필을 특별히 정하였다. 초수관리를 위해 2명의 감고(監考:재정부서에서 돈과 곡물 출납의 실무를 맡거나 지방의 토지세 · 공물징수를 담당하던 하급관리)를 정하고, 몸이 건장한 3명의 압직(押直:물건이나 장소를 지키는 일을 담당한자)을 정하여서, 매일 감고 1인과 압직 1인이 윤번으로 초수를 지키게 하였다. 지금시대의 말로 하자만 초수 물을 관리하는 담당 직원을 배치해 둔 것이었다.
또. 한양 궁궐에서 전의초수까지 이르는 과정의 각 역에서는 초수를 지키고 운송하는 자 3인을 선정하게 하였다. 초수를 운송할 때에 각역에서는 말 두필과 압직 3인이 서로 번갈아 돌아가면서 근무하고, 휴식하면서 운송하였다가, 다시 차례로 돌려 다시 처음으로 돌아오게 하게 하였다.

   전의 초수 주변을 둘러싼 나무와 안내판

초수의 채취와 보관 및 운송은 정확하게 명시하여 철저하게 관리하였다. 채취는 감고가 매일 해질녘에 초수를 사기그릇에 넣고 기운이 새지 않도록 하여 봉함하여 서명하고, 그때의 시각을 적었다. 이후 초수가 담긴 사기그릇을 실은 역마의 이름을 적어서 압직인에게 주고, 압직인은 다음 역의 압직인에게 전달하였다. 이렇게 급히 운송하여 하룻밤 사이에 서울에 도착하여 세종대왕에게 바치게 하였다.

그러는 한편 초수의 운송과정에서 발생할지 모를 실수나 문제가 발생할 경우에도 초수를 운송하는 담당자인 찰방·역승 등을 검거하지 말라고 하여 그 관계자들을 특별히 배려하였다. 이처럼 특별한 관리와 조치를 취하며 전의초수는 세종대왕에게로 진상되어 져서 대왕의 안질을 지속적으로 치료하였다. 전의초수를 이용한 치료는 효험을 보게 되었다.

세종 31년(1449년) 12월 3일 세종은 자신의 안질이 다 나았다고 신하들에게 말하였다. 세종대왕은 안질이외에 여러 질병이 있었는데 이후 안질은 재발하지 않은 채 눈의 건강을 유지하시다가 이듬해 2월 17일 돌아가시게 되었다. 세종대왕이 더 생존해 계셨다면, 혹시나 전의에 행궁을 지의시고 행차하지 않으셨을까?또 세종특별자치시의 지명이 세종이 될 것이란 것을 알고 계시고 전의초수로 눈병을 치료하셨던 것일까?

이런 상상을 해보며 전의초수 주변을 거닐며 초수물 한모금을 마셔보았다. 쓰지도 않고, 달지도 않고. 짠맛도 없고, 매운맛도 없다. 그러나 신맛은 있다. 다섯가지 맛으로 보면 신맛에 가장 가깝다. 그런데 전의초수는 신맛, 한 가지만 있는 것이 아니다. 거기에다 쇠맛도 나고, 돌맛도 나고, 맑은 물맛도 아니고, 탁한 물맛도 아니고, 쏘기는 하나 그렇다고 강하게 쏘지도 않고...정말 특이한 맛의 물이다. 말로 표현대로 한다면 알쏭달쏭 아리까리 물맛인 것이다.

현재 전의초수와 관련하여 세종시에서는 중요하고 의미 있는 행사가 이뤄지고 있다. 매년 3월 22일 ‘왕의

 
이정우, 대전출생, 대전고, 충남대 사학과 졸업,충남대 석사, 박사 취득, 한밭대 , 청주대 외래 교수 역임, 공주대, 배재대 외래교수(현),저서 : 조선시대 호서사족 연구, 한국 근세 향촌사회사 연구, 이메일 : sjsori2013@hanmail.net 물’이라는 의식과 축제를 봉행하고 있는 것이다. 유네스코가 정한 '물의 해'를 정한 2003년부터 진행해 오고 있는데 매년 이날 진행되고 있다. 세종대왕의 전의초수 사랑이 560여년이 흐른 지금, 현대적으로 재현이 되어 세종시의 대표적인 문화축제로 자리메김한 것이다. 이럴 즈음 초수관리와 관련한 건물 및 시설물 등의 설치와 재구성도 의미 있는 일이 아닐지 생각되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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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종시문화해설사 윤은실 2013-07-12 19:50:58
교수님 좋은 자료 잘 보았습니다.
왕의물축제는 작년까지 도원문화제와 더블어 매년 4월 15일에 진행하였습니다. 첫해엔 3월 22일 한것이 맞습니다.

세종시 향토연구소간사 임재한 2013-07-12 22:56:42
세종특별자치시 역사에 관심을 가져주셔서 감사합니다
세종실록 권 108편에는 1445년(세종 27년) 4월13일에 안질이 다 낳았다고 선포를 했습니다
교수님은 투병생활을 5년정도 한것으로 발표를 하셨는데 일년에 만에 완치된것으로 알고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