겨울의 끝, 봄기운을 품은 비가 내리던 오늘, 우리 학교 3학년 82명 아이들이 졸업을 했다. 그 모습이 얼마나 의젓하고 대견스러운지 선생님들마다 3학년의 놀라운 변화를 칭찬했다. 특히, 1년 내내 속을 썩이고 애를 태우던 녀석들이 교무실 문을 열고 들어와 담임선생님께 넙죽넙죽 엎드려 큰 절을 하는 모습이라니! 어찌 이 감동적인 장면을 일찍이 짐작이나 했으랴.
교직 생애 28년 만에 너희들 같은 놈들은 처음 본다는 말로 충격적인 대면을 했던 지난 3월, 새 학교에 대한 낯가림 대신 ‘나는 대한민국의 교사다’라는 큰마음으로 5년을 그리던 ‘대전보다 가까운 학교’로 부임해 오던 날부터 마주친 녀석들은 뜻밖에도 길들지 않은 야생동물들처럼 가히 위협적이었다. 물론 대부분의 아이들은 지극히 정상적이었지만, 줄잡아 십여 명이 넘는 녀석들이 무리를 지어 종이 울려도 복도를 어슬렁거리며 불길한 기운을 뿜어냈다.
한 마디로 책과는 담을 쌓은 ‘공부의 적(敵)’들! 아이들은 국어수업을 통해 삶의 꿈과 에너지를 주고 싶다는 나의 첫인사에 호기심을 보였지만, 반마다 한두 명의 짱들이 본능적인 기(氣)싸움을 걸어왔다. 교실 안의 술렁임을 잠재우기 위해 나는 “너희들 중 일본 놈 있어?”라고 일갈(一喝)했다. 순식간에 잠잠해진 아이들을 향해 나는 “어떻게 우리 대한민국에 너희 같은 놈들이 있어? 이러고도 너희가 독도가 우리 땅이라고 외칠 자격이 있어? 중국에게 고구려 역사를 안 뺏길 자신 있어?
지금 미국에선 최초의 흑인대통령 오바마가, 태어나서 아버지 얼굴을 단 한번밖에 본 적이 없는 누구보다 불행한 환경 속에서도 전 세계가 열광하는 인물이 되었고, 반기문 유엔사무총장은 바로 중학교 1학년 때 영어 공부에 빠진 덕분에 전 세계를 사로잡았는데, 고작 수업 시작 하나도 제대로 못하는 너희는 도대체 누구야? 나라를 또 빼앗기고 싶어? 요즘은 땅을 빼앗는 전쟁이 아니라 무역전쟁, 정보전쟁, 그리고 문화전쟁이야! 여차하면 경제식민지, 문화식민지가 된다고!”라고 기염을 토했다.
마침 내 손엔 첫수업 오리엔테이션 자료와 ‘오바마이야기’란 책이 들려 있었다. 아이들은 이 세상에서 가장 멋진 그 남자의 미소에 반해버린 눈치였다. 왜냐하면, 나의 수업비법 중의 하나인 수업퀴즈 누적점별 상품인 노란연필, 컴퓨터싸인펜, 샤프펜, 연습장, 필통, 클리어파일, 그리고 반짝이는 선명한 컬러표지가 일품인 ‘21세기를 움직인 사람들’ 문고판책에 이어 최강상품이 바로 그 책이었는데, 급식실에서 한 남학생이 나에게 “저 꼭 그 책 타고 말 거에요.”라며 흥분된 목소리로 외쳤기 때문이다. 그렇게 국어수업 사이사이 이런저런 방법으로 아이들의 숨겨진 독서본능을 자극하는 일은 즐거웠고, 점차 아이들은 나의 편이 되어 주었다.
아이들과 친숙해진 5월, 학력증진부장으로서 3학년 담임들과 합작하여 매주 금요일 방과후학교 수업 대신 EBS ‘공부의 달인’이라는 마법 프로그램을 가동했다. 전국의 공부비법 고수들만을 찾아내어 만든 30분짜리 이 다큐멘터리 드라마는 ‘마음만 먹으면 나도 공부를 잘 할 수 있다.’라는 평소 나의 신념을 그들에게 확인시켜주기 위해 제작된 것 같았다.
매일 되풀이되는 방과후 7,8교시에 지친 아이들에게 금요일 방과후는 오아시스로 자리잡아갔고, 아이들은 ‘절대 자습능력 불가’라는 편견을 깨뜨려주었고, 왜 공부를 하는지, 어떻게 공부를 하는지, 꼴찌가 전교 1등을 해내는 기적 같은 실화의 주인공들에게 열광하며 몰입을 배웠다. 한편, 매월 금요일 방과후는 탁구, 배드민턴, 축구 등 미니체육대회를 열어 스포츠를 통해 온갖 스트레스를 다 날려버릴 수 있게 했다.
강당에서 삼겹살 파티도 했다. 계룡산 등반도 했다. 서울대 탐방도 했다. 여기에 학부모교육도우미제 선도학교로 야간자율학습도 더해졌다. 또 ‘나의 꿈 발표대회’라는 멋진 UCC경연대회를 통해 전교생이 서로의 창의성과 상상력에 매혹되는 경이로운 경험을 했다. 결과는 인근 고교에 3년 장학생 등 탁월한 입학성적으로도 나타났지만, 무엇보다 아이들이 차분해지고, 큰 꿈을 품게 되었고, 인간적인 심성을 회복했다는 것이다.
6월 어느 날의 공개수업은 잊을 수가 없다. 그 무렵 개인적으로 심신이 지쳐 있었는데, 아이들은 청어처럼 싱싱하게 펄떡였다. 교원능력개발평가 선도시범학교 주무부장으로 첫 녹화수업을 시작한 그 날. 특별히 누군가에게 보여주기 위한 좋은 수업을 하겠다는 욕심보다는 평소 아이들과의 의미 있는 활동을 남기는 데 목표를 두고 전개한 모둠수업이었기에 그들은 구김살이 없었고, 오히려 수업은 활기가 넘쳤다.
아이들은 더 이상 공부의 적이 아니었다. 어슬렁거리지도, 함부로 대들지도...
나도 아이들도 카메라를 전혀 의식하지 않은 것은 아니었지만, 또 각색한 것이 아니었기에 군더더기가 꽤 있었지만, 모두가 행복한 수업이었다. ‘지사의 길, 시인의 길’ 이육사의 생애는 그렇게 우리들 뇌리에 각인되었다. 특히, 개그맨이 꿈이라는 양태영 군의 폭발적인 끼와 카리스마 넘치는 익살과 무대 장악력은 단번에 교실을 쓰나미 상태로 몰고 갔다.
신종플루가 극성이던 여름과 가을, 비로소 찬바람 속에서 고등학교라는 진로선택을 앞에 두고 생애 최초의 중대한 고민을 하기 시작했고, 10월 중순의 국가수준평가를 위해 특별집중대비 힘겨운 노력을 했다. 3월 진단평가에서 82명 중 22명이라는 어마어마한 숫자의 학력미도달자를 어찌 구제한단 말인가. 교사로서의 고민이 깊었고, 방과후 특별수업은 과자보따리로도 다 감당이 안 되는 괴로움이었다. 하지만 결과는 멋있었다. 비록 전원 구제는 아니었지만, 단 5명을 제외하고는 모두 구제되었다. 그것도 장기결석자에 난독증 학생, 특기생을 뺀다면 거의 구제된 셈. 오, ‘한 아이도 뒤처지지 않게 (No Child Left Behind!)’의 커다란 느낌표가 솟구쳤다.
“애들아, 너희들 정말 하면 되는구나, 가능성이 있구나!”
‘10월의 어느 멋진 날’은 또 얼마나 아름다웠나? ‘느티나무 어울마당 축제’로 추계체육대회, 경로당 노인초청 위안잔치, 나의 창작시쓰기 대회 손바닥 시화전, 그리고 도서교환전(Book-Crossing)을 겸하여 짧지만 풍성한 축제를 펼쳤다. 학교운영위원회와 내 아이 함께 키우기 느티나무 어머니봉사단의 뜨거운 사랑을 담은 도서구입비 200만 원 기증과 먹거리장터 협찬은 전교생 모두에게 전설적인 추억을 선사했다. 평소 독서를 좋아하지 않던 녀석들이 더 먼저 좋은 책을 고르려고 안달했고, 헌 책 두 권에 새 책 한 권 교환은 전교생을 들뜨게 했다.
가장 아름다운 날은 바로 3학년 교과서에서 처음 만난 ‘내가 사랑하는 사람’의 정호승 시인 초청 특강이었다. 세상에는 그렇게 온화하고 깊고 정결하고 강인한 사람이 있었다. 아이들이 숨죽여 그 분의 ‘시를 발견하는 마음’ 특강에 빠질 때, 시인의 친필사인회에 긴 줄을 섰을 때, ‘고래를 위하여’란 안치환의 노래가 가슴을 후벼 팔 때, 얼마나 기쁨에 취했던가!그리고 12월 어느 쉴토를 반납하고 혼불문학관, 토지문학관을 다녀온 ‘선생님과 함께 떠나는 문학기행’은 산 공부로 아이들 가슴속에 새겨졌으리라. 17년 간 10권의 대하소설 혼불을 남긴 최명희 님과 26년 간 21권의 토지를 쓰신 박경리님의 문학혼(魂) 앞에서 삶의 비의(秘意)를 엿보았으리라.
아이들은 더 이상 복도를 어슬렁거리지도, 방과후에 엎어져 흐물거리지도, 선생님께 함부로 대들지도 않았다. 대신 쉬는 시간과 점심시간 억척스럽게 운동장을 누비며 축구를 하고, 고함을 지르고, 소년기의 자칫 방향을 잃을 뜨거운 피를 식히며 그렇게 영글어갔다. 그리고 만남의 한바퀴, 오늘 아이들은 모두 새로운 둥지를 틀기 위해 겨울 하늘을 날아갔다. 그 중 한 마리의 새가 이런 노래를 남기고 갔다.
“교단에서 선생님은 꼭 타오르는 불꽃 같으셨어요. 그 불꽃이 저희를 항상 일깨웠어요.”
니일은 말했다.
“가장 좋은 교사란 아이들과 함께 웃는 교사이다. 가장 좋지 못한 교사란 아이들을 우습게 보는 교사이다.”
나는 내일도 지식보다 소중한 상상력의 불꽃을 일으키며 아이들과 웃고 싶다. 행복하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