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수산, 으뜸 장수 호령소리 여전
원수산, 으뜸 장수 호령소리 여전
  • 임영수
  • 승인 2012.03.12 18:22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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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영수의 세종을 만나다]연기대첩 중요한 전적지 '진의리'

   열녀소
 양화2구 가학(佳鶴) 도로변에는 커다란 느티나무가 두 그루 서 있다.
수령이 수백 년 되었다 하는데 나무 아래에는 들마루를 설치하여 오고 가는 이들이 쉬었다 가기 좋게 해 놓았다. 그런데 느티나무 아래에서 바라보니 도로변에 열녀소라는 팻말이 눈에 띄었다.

재영 : 아빠, 저기 도로변에 돌에 새겨진 “열녀소”라는 것이 무엇인가요?

아빠 : 응, 열녀란 시집간 여인이 남편을 위하여 절개를 지킨 것을 말하는데 이곳에서 저쪽 마을 입구 도로변에 열녀비가 세워져 있단다.

재영 : 그 열녀비에 대하여 설명해 주세요.

아빠 : 그래, 그 열녀비의 주인공은 한산이씨인데 임상혐에게 시집와서 살다 남편이 일찍 죽고 말자 젊은 나이에 과부가 되었지만 열심히 살고 있는데 병자호란이 일어나 중국의 오랑캐가 쳐들어 왔지. 오랑캐들은 닥치는 대로 약탈하고 집에 불을 지르고 가축을 끌고 갔으며 특히 젊은 여자들을 잡아갔어. 이때 한산이씨는 오랑캐에게 잡혀가서 고생하느니 차라리 스스로 목숨을 끊겠다고 동네 가운데에 있는 연못에 몸을 던져 물에 빠져 죽자 오랑캐들이 단념하고 마을을 벗어나는 순간 집안 어린이가 물에 빠진 한산이씨를 구하여 살리자 돌아가던 오랑캐가 다시 와서 잡아가려하자, 한산이씨는 오랑캐에게 끌려가느니 이곳에서 죽겠노라며 대들며, 뿌리치니 오랑캐가 칼을 휘둘러 죽게 하였어.

재영 : 끔찍한 일이었네요. 그렇게 절개를 지켰기 때문에 열녀비를 세워진 것이네요. 그리고 저 팻말이 세워진 곳이 연못이었나요?

아빠 : 그래, 예전에는 연못이었는데 지금은 메워져 논으로 변하였지.
원래 저 한산이씨 열녀비는 이 느티나무 아래에 세워져 있었는데 마을 아낙들이 아무 이유 없이 1년에 3~4명씩 정신이상자가 발생하여 동네 회의를 한 결과 이 비석 때문일 것이라는 의견이 나와 비를 옮기기로 하고 현재의 위치로 옮기니 마을에 평화가 다시 찾아왔다고 했지.

재영 : 비석은 언제 세워졌나요?

아빠 : 이 배는 1666년(현종 7년) 임금님이 열녀의 정려를 세우도록 허락하여 1749년(영조 25)에 현감 이희기(李羲耆)가 비문을 지었다고 기록이 되어 있어. 정면에는 열녀 임상혐 처 한산이씨 정려비(烈女 林尙馦 妻 韓山李氏 旌閭碑)라 쓰여 있어.

   한산 이씨 열녀비
아빠 : 오늘 양화리를 돌아보고 무엇을 느꼈니?

재영 : 이곳은 우리 조상(林氏)이 연기군에 처음 정착하여 650년 동안 떠나지 않고 살아온 것이 자랑스러워요.
또한 전월산과 원수산에서 지내는 산제는 이곳에서 사는 농민들에게는 중요한 행사라고 느꼈어요.

아빠 : 양화리라는 말은 양화부곡에서 나온 말이란다.
이곳을 세거리라고도 부르는데 이는 삼거리 즉, 세 갈레 길에서 사람들이 왕래하는 곳을 말하지.

재영 : 삼거리 하면 천안삼거리가 유명한데 이곳의 삼거리 하고는 어떤 차이가 있나요?

아빠 : 천안삼거리는 조선후기 한양으로 올라가기 위한 삼거리지만 이곳 삼거리는 조선시대 이전부터 형성된 삼거리이지. 더군다나 이곳의 삼거리는 육지가 아닌 강물을 따라 난 길이므로 더욱 의미가 있는데 옛날에는 모든 교역이 강을 따라 뱃길로 물건이 오고가며 사람들도 뱃길이 왕래하기 가장 좋은 수단이었는데 양화리 앞으로 흐르는 금강은 전라도 장수에서 발원하여 이곳을 거쳐 공주, 부여, 서천으로 흘러 서해안으로 들어가지. 그러니 전라도와 경상도, 충청도의 뱃길이 이곳에서 만나니 이곳을 삼거리 즉, 사투리로 세거리라 부르지.

재영 : 그러면 천안삼거리보다 이곳 삼거리가 훨씬 오래 되고 금강의 뱃길이라는데 의미가 있네요.

아빠 : 그래, 금강변에는 많은 나루터가 있었는데 서해에서 고기를 가득 실은 배가 이곳을 지나갈 때에는 나루에 관원이 나와 나룻세를 받아갔는데 이곳 앞에서도 나룻세를 받았다고 했어.

오늘은 이쪽에서 답사를 마치고 내일은 진의리를 돌아보자.

   진의리 옛 모습
둘째날 - 진의리(眞儀里)

둘째날에는 진의리를 답사하였다.
진의리는 백제때 두잉지현(豆仍只縣)에 속했으며, 백제가 멸망 후에는 웅진(熊津)에 속하였고, 조선 태종 때에는 공주(公州)에 속했으며 조선 말엽 공주군 삼기면(公州郡 三岐面)으로 불리었다. 마을 앞으로 흐르는 금강의 여울이 길다 하여 “ 진여울”, 진탄(眞灘), 진의(眞儀)라 불려왔다. 1914년 행정구역 개편 때 “창동(倉洞)” “덕성동” “가정리” “성전리” “송현리” “복룡리”를 병합하여 연기군 남면에 편입하여 진의리(眞儀里)가 되었다.

재영이와 마을회관에 도착하니 임만수 이장님이 반갑게 맞이하여 주셨다.
회관에는 사람들이 많이 모여 있었고, 회관에 써 있는 플래카드는 행정중심복합도시건설은 무효라는 글귀이다. 분위기가 심상치 않았다.

재영 : 행정중심복합도시가 건설되면 좋을 것이라 하던데 이곳 주민들은 반대를 하내요?

아빠 : 그래, 나라 전체로 보면 이러한 사업이 국가의 균형발전이라는 취지로 추진되고 있지만 반면 이곳 주민들은 커다란 고통이 뒤따른단다. 그 첫 번째가 고향을 떠나야 한다는 것이지. 아무리 좋은 조건으로 간다하지만 조상대대로 살아온 터전을 떠난다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란다. 특히 연세가 높으신 분들일 수록 고향을 떠난다는 것은 그 어떤 것으로 위로가 되지 않는단다.

두 번째는 조상의 유적을 어떻게 지키냐는 문제이지. 양화리, 진의리에는 부안임씨들이 많이 살고 있지. 이곳에 정착한 임난수 장군으로부터 오늘날까지 650년이란 세월 속에서 후손들이 많이 살다보니 문화유적 또한 적지 않게 생겨났어.

사당인 임씨가묘(林氏家廟)와 독락정, 제산정의 정자, 효자, 열녀문 등 지정문화재와 산속에 있는 선조의 수많은 묘들을 다른 곳으로 옮긴다는 것은 한

   진의리 마을 유래비
문중이 평화롭게 살아오다 모두 흩어지게 되니 그의 후손들이 이를 지키려고 외치는 것은 당연한 행동이란다.

재영 : 우리는 왜 반대하는지 잘 몰랐어요.
행복도시를 유치해야 한다는 말을 듣고 이를 반대하는 이들은 보상을 많이 타려고 하는 행동인줄 알았는데 그렇지 않다는 것을 알게 되었어요.

아빠 : 그래, 진의리 이장님과 이곳 주민들 대다수가 고향과 조상을 지키겠다는 진실된 마음을 알아주어야 한단다.

재영 : 이장님께 감사드립니다.

아빠 : 재영아! 이곳 마을은 예로부터 국난을 극복한 중요한 곳이란다. 서면 고복저수지에 세워져 있는 연기대첩비를 알지?

재영 : 예, 고려시대 몽고족을 물리쳐서 이를 기념하기 위하여 세운 것으로 알고 있어요.

아빠 : 그래, 그 전투에서 중요한 역할을 했던 곳이 바로 이곳이란다.

재영 : 자세히 좀 들려주세요.

아빠 : 고려시대 원나라의 명령으로 고려는 백성들에게 많은 세금을 걷어 배를 만들어 일본을 정벌하러갔어. 그런데 공교롭게도 높은 파도를 만나 싸워보지도 못하고 많은 군사를 잃게 되었지. 여러 번 전투를 시도 하였지만 번번이 태풍이 불어 결국 일본 정벌을 포기하고 있을 때 원나라에서는 왕위를 놓고 싸움이 벌어졌는데 그중 몽고족인 합단이 많은 군사들을 끌고 전투를 벌이다 실패하자 고려로 쳐들어왔어.

   진의리 성전정미소
고려는 원나라 때문에 많은 군사를 잃었고, 배를 만드느라 백성들이 힘들어 할 때 합단의 많은 군사들이 국경을 넘어 쳐들어오니 어찌 할 방도가 없었지. 우선 왕은 강화도로 피신하고 방책을 모색 했지만 도대체 물리칠 방법이 없었어. 합단적은 남으로 남으로 내려오고 우리 연기군에 까지 내려왔어. 합단적이 지나간 마을은 모두 폐허가 되었다고 하는데 집은 모두 불태우고 노인과 아이들은 죽이고, 남자들은 노예처럼 끌고 갔으며 가축은 먹이로 사용하고, 특히 여자들에게는 표현하기 힘든 만큼 잔인성을 보였는데 고려사에 보면 ‘여자들은 강간하고 포를 떴다.’라고 씌어 있으니 얼마나 잔인하니. 그러한 합단적이 나타나면 도망가는 것은 당연한 일이었지.

재영 : 우리 연기군까지 쳐들어 왔나요?

아빠 : 그래, 우리 연기군을 지나 공주, 전라도 쪽으로 내려가면 고려가 멸망할수밖에 없었지.
1292년 5월 합단적의 무리는 연기군 서면 쌍전리에 다다랐어. 이곳에서 군율을 정비하고 남쪽으로 내려가기 위해서 이지. 이때 우리나라 삼장군이 목천에서 군사들을 거느리고 합단적이 있는 연기군 서면에 까지 왔어.

재영 : 삼장군이 누구신데요?

아빠 : 삼장군은 한희유, 김흔, 인후 인데, 한희유는 청주한씨이고, 김흔은 안동김씨인데, 김방경의 아들이지. 그리고 인후는 원나라에서 공주가 고려의 왕자에게 시집올 때 따라온 장수였어. 삼장군은 한밤중에 몰래 합단적이 거처 하고 있는 맞은 편 산에서 기습 공격을 하려고 준비를 하였어.

재영 : 왜, 기습 공격으로 싸우나요?

아빠 : 합단적은 10만이 넘었고, 고려군사는 3만밖에 되지 않으니, 1:1 전투를 하면 고려 군사가 불리하기 때문에 생각한 것이 합단적이 곤히 잠들었을 때 기습공격을 하는 수밖에 없었어. 고려 군사들이 주둔한 곳을 함박산(大朴山)이라 하는데 이곳에서 큰 가마솥을 걸고 밥을 해 먹었다 하여 가마골이라 부르는데 밥을 해 먹은 자리에는 지금도 눈이 오면 쌓이지 않고 일찍 녹는다는 전설이 있어.합단적은 대박산 맞은편(지금의 쌍전리)에서 곤히 잠들었고, 새벽 3시경에 김흔 장군의 공격 명령에 의하여 고려 군사들이 총 공격을 가하였지. 그런데 합단무리들이 워낙 숫자가 많으니까, 처음에는 밀리는 듯 하더니 치열한 전투가 벌어지자 고려 군사들이 후퇴하기 시작하였어.

   용암사 돌부처
그때 김흔 장군이 큰 칼을 빼들고 만약 후퇴하는 자가 있으면 내가 가만두지 않겠노라며 소리치자 군사들은 ‘후퇴해도 죽을 바에는 열심히 싸우자’며 합단적을 무찌르기 시작하여 전투를 승리로 이끌었어.
당시 죽은 시체가 공주 금강까지 30여리 널려 있다고 적혀 있으니 굉장한 전투였지.

재영 : 그래서 연기대첩이라고 하였군요.

아빠 : 그래, 그런데 공주 쪽으로 도망가던 합단적이 얼떨결에 강을 건너 도망 온 군사를 정비하여 많은 군사들이 죽고 남은 군사로는 고려군과 전쟁을 할 수 없는 상황이 되었어. 그래서 합단적은 금강을 건너 다시 북쪽 원나라로 후퇴 하였지만 금강물이 불어나 건널 수가 없었지.

합단적은 금강의 물이 얕은 곳을 찾아 건너려고 위로 올라오는데 여울진 곳이 있었어. 물이 여울진 곳이라면 깊지 않다는 뜻이다. 이곳이 오늘날 강 건너 호탄리와 진의리야. 호탄리는 당시 호여울이라 부른데서 호탄리가 되었고, 진의리는 긴여울 즉, 진여울에서 진의로 된 것이지.

재영 : 아하 그렇군요.

아빠 : 합단적은 호탄리 앞의 여울로 건너 진의리 쪽으로 건너왔는데 우리 고려 군사들은 아미 합단적이 이곳으로 올 것을 예견하고 지키고 있었어. 한희유 장군이 합단적이 도망가는 모습을 지켜보고 있었는데 이는 진의리 뒤에 있는 높은 산에 올라가서 바라다보았기 때문이지. 진의리 뒷산을 성재산이라 불렀어. 그것은 이곳에 어느 시대인지 모르지만 아주 먼 옛날 돌과 흙으로 섞어 쌓은 산성이 있어서 성재산이라 불렀으며, 성재산 뒤로 높고 뾰족한 산이 있는데 이것을 문필봉이라 불렀지. 이유는 멀리서 이산을 보면 마치 붓끝처럼 뾰족하게 생겼기 때문에 붙여진 이름 이었어.

   원수산
그런데 합단적이 쳐들어와 한희유 장군이 이곳에서 지휘하였다하여 이산을 원수산(元帥山)이라 불렀고, 세종실록지리지에 이러한 내용이 적혀 있지. 한희유 장군이 올라 지휘한 바위를 장군바위라 부르고 있으며, 합단적이 항복했다하여 항서바위라는 곳이 있어. 아무튼 합단적은 금강을 건너 이곳으로 오고 있고 지키던 고려군과 전투가 벌어졌는데 갑자기 고려 군사들이 후퇴하는 것이었어. 그것은 적진에 한명이 화살을 쏘면 백발백중이어서 고려 군사들이 두려워 싸우지 못하는 것을 보고 한희유 장군이 긴 창을 들고 가서 그의 목을 잘라 높이 쳐들어 보이자 그때부터 고려 군사들이 사기가 높아 소리를 치며 전진하여 합단적을 무찔렀어.

그것을 연기대첩(燕岐大捷)이라 부르지. 다시 정리하면 성을 쌓기 위하여 등에 돌을 짊어 날랐던 곳을 질마산이라 부르던 산이 성재산이 되었고, 붓끝처럼 뾰족한 산이 문필봉인데 전투가 끝나자 이것을 원수산이라 불렀으며, 이는 세종실록에 자세히 기록이 되어 있고 이 전투를 연기대첩이라 부르고 있지.

재영 : 이곳이 연기군뿐만 아니라 고려를 구한 곳이네요. 또 원수산은 으뜸 장수가 지휘를 한 곳이니, 신행정수도의 중심지로 삼으려는 것이 이해가 되네요.

아빠 : 그래, 국가에서 하는 국책사업 대상지를 가만히 보면, 그곳의 지명이 평범하지 않는다는 것을 볼 수 있지. 가까운 청주의 국제공항을 예로 들면, 이곳 마을이 비상리와 비하리가 있는데 공교롭게도 비행장을 만들어 비행기가 비상리에서 뜨고, 비하리에서 내려오는 것으로 만들어지자 모두들 지명의 신기함에 감탄을 하였지.

재영 : 이곳을 삼거리 즉, 세거리가 부른 것도 그거와 연관이 되나요?

아빠 : 그래, 삼거리는 세 갈레에서 사람이 왕래하니 중심지이라는 뜻도 가지고 있지.

     
임영수, 연기 출생, 연기 향토박물관장,국립민속박물관 전통놀이 지도강사, 국사편찬위원회 조사위원, 이메일: ghmuseum@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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