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교천, ‘백지 계획’만 실행됐다면 ‘청계천’ 됐다
대교천, ‘백지 계획’만 실행됐다면 ‘청계천’ 됐다
  • 임비호
  • 승인 2021.09.19 06:26
  • 댓글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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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비호칼럼] 김종서 장군에서 유래된 대교천, 전의 금사리-영평사로 흘러
김종서 장군 '큰 다리'가 '대교'로 변해... 하천 주변, 다양한 역사 숨쉬는 곳
세종시 출범 이전 구 송암교에서 바라다 본 대교천

세종시 한솔동 첫마을에서 공주로 가는 강변도로를 가다보면 수질복원센터 옆에 금강 본류와 만나는 하천이 있는데, 바로 대교천이다. 세종시의 예정지역과 주변지역을 나누는 경계선이며, 70년대 박정희 정권의 백지 계획이 실행되었다면 서울의 청계천과 같은 역할을 할 뻔한 하천이다.

대교천은 전의면 금사리와 공주시 의당면 덕학리 경계가 되는 국사봉(349.2m) 뒤쪽에서 발원하여 중흥 저수지에 머물다 평기 앞뜰을 가로질러 구절초로 유명한 영평사 앞으로 흐르다 금강 본류에 도달한다. 유로 길이가 21.64㎞이고 유역 면적이 65.75㎢이다.

대교천 일대는 탁월한 지형뿐만 아니라 지명에도 사연이 있다

백지계획 당시 입지 선정팀이 이 일대를 보면서 서울과 비슷한 지형이라 최종 선정했다고 하는데 천태산(해발 392m)을 주산으로 하여 백호 격인 갈매봉과 청룡 격인 국사봉, 전월산 그리고 남산격인 장군봉이 있으며 그 안에 대교리, 평기리 등의 너른 뜰을 이루는 대교천이 흐르고 있기 때문이었다 한다.

이런 훌륭한 지형적 입지뿐만 아니라 대교천은 지명의 어원에서도 깊은 사연을 가지고 있다. 대교천은 여러 마을을 대표하는 대교리에서 가져왔다. 대교리는 세종대왕의 충신이며 문종으로부터 고명대신을 부탁받은 김종서의 죽음과 연관이 있다.

장군면과 대교천의 지명이 만들어지는 데 역할을 한 김종서장군 묘역
장군면과 대교천의 지명이 만들어지는 데 역할을 한 김종서장군 묘역

계유정란으로 수양대군 일파에게 죽임을 당했을 때 타고 다니던 말이 시신의 다리 하나를 고향인 이곳까지 싣고 왔다고 하는데 다리 ’하나‘라는 의미가 우리말 ’크다‘는 ‘한’으로 변했고, 그것은 다시 한자의 ‘대(大)’로 변한 것이며, 또한 사람의 ‘다리’가 한자 ‘교(橋)’로 음차되어 생긴 지명이다, 결국 대교리는 김종서의 ‘다리 하나’에서 유래한 지명이라 할 수 있다.

김종서는 하천명과 마을 이름뿐 아니라 지역명과 신도심 도로명에도 영향을 미쳤다. ‘장군면’이란 지역명은 문신으로 출사했지만 북방 육진을 개척하여 무신으로 후세에 각인 된 연유로 생긴 것이고, 5단지 앞에서 홈플러스를 지나 햇무리교를 지는 ‘절재로’라는 도로명은 호(號)에서 따서 것이다.

장군면의 대표적인 인물이라 그런지 그의 무덤 뒤의 산림 생태는 아주 훌륭하다. 세종시에서는 보기 드물게 산림 생태 1등급을 자랑한다. 그의 무덤 뒷산인 장군봉에서 수산리로 넘어가는 산마루에는 산림 생태 1등급의 지표종인 서어나무가 자리를 잡고, 수산리 방향의 긴 장골 계곡의 습기는 다양한 산림 식생을 자아내고 있다. 깊은 숲이 자아내는 신비한 장엄함이 산마루를 지나는 사람들에게 온전히 느끼게 하는 곳이다.

대교천은 인근 수촌리 고분군과 함께 볼 때 가치가 더 높아진다

대교천이 중앙으로 흐르는 장군면 일대의 지정학적 가치는 인근의 수촌리 고분군과 연동해서 볼 때 더 깊게 느낄 수 있을 것이다. 장군면에서 고개 너머 있는 수촌리 고분군은 왕들의 무덤에서나 나올 법한 금동 신발의 출토로 유명해진 곳인데, 고분군의 조사 결과 시기가 한 시대에만 국한된 것이 아니라 청동기 이전 것부터 유물이 출토되는 무덤군이다.

덕천군의 뜻을 기리는 덕천사우 입구 모습

이는 정안천 일대가 오래전부터 나름대로 사회 체제를 성립했으며, 시간의 흐름에 따라 중앙 정치와는 상호 연대를 하면서 독자성을 유지했음을 말해 주는 것이라 할 수 있다. 이런 전제 속에 장군면까지 포함시키면 그 세력권은 더욱 확대됨을 알 수 있다. 비록 장군면 대교천 일대에는 이런 유물유적이 아직 발견되지 않았지만 자연지리적인 입장에서 볼 때는 같은 문화권으로 추론해볼 수 있다는 것이다. 상호 연대를 하기는 하지만 그 나름대로 독자적인 사회 운영 시스템을 가진 곳이라 할 수 있는 것이다.

수촌리 고분군과는 시기가 좀 다르지만 대교천 상류 지역인 장군면 태산리에는 조선시대 지방 호족(?)의 흔적이 잘 남아 있는 곳이 있다. 전주이씨 집성촌과 덕천대군 사우이다. 농경사회의 기본은 토지로, 소유지를 중심으로 마을 공동체가 형성되는데 방축리(지금의 도담동)와 장군면 일대는 조선 2대 왕인 정종의 아들인 덕천대군에게 부여 된 토지였던 것 같다.

임진왜란 이후 그의 후손들이 이곳에 내려와 집성촌을 이루며 살고 있다고 전해지는데 창업주라고 할 수 있는 덕천대군 사우와 무덤이 잘 보전되어 있다. 조선시대의 전통적인 양반 가옥과 사당, 우물과 무덤 양식을 잘 보여주어 지역으로서는 큰 문화 유산을 얻은 셈이다.

사람이 만든 자연이라는 영평사의 구절초 축제

대교천이 흘러 금강과 만나는 장군봉 자락에는 구절초 축제로 유명한 영평사가 있어 가을날을 풍성하게 해주고, 세종 시민들에게는 편안한 휴식을 제공해 준다. 구절초 축제는 자연을 사랑하고 사람을 배려하는 맘으로 실천해 만들어진 자연이라 많은 애착을 가게 한다.

대교천 하류에서 보이는 이제는 추억의 다리가 된 송암교

일반적으로 주변에서 자연을 파괴하고 서식처를 훼손하는 것만 많이 보다가 이곳에 오면 자연을 만드는 것 같아 고마움과 존경이 우러나온다. 경내의 고적한 경관과 어울리는 주변의 구절초 화단은 절로 마음을 정화시킨다. 영평사의 구절초 축제가 가지는 자연에 대한 애정이 세종시를 넘어 이 한반도에도 널리 퍼지길 바랄 뿐이다.

옛 추억이 고스란히 남아 있는 다리에 서 보다

대교천의 끝자락인 금강과 만나는 바로 직전에는 세종시 개발 이전의 작은 다리가 하나 남아 있다. 이 다리에 서면 대교천이 오랜 세월 지켜온 소담스런 풍광들이 고스란히 남아 있어 좋고, 4대강 사업으로 역행 침심되어 아팠던 기억도 고스란히 남아 있는 곳이다.

가을철 높은 억새들이 흔들거리는 오솔길을 따라 들어서면 엉킨 찔레나무들이 세월도 무심하게 반기어주고, 무너져 그대로 있는 교량 잔해가 쓸쓸함을 더해 주는 곳이다. 조금 어울리지 않는 포플러 나무가 제방에 서 있고, 새 발자국 남아 있는 모래톱 옆으로 물길이 그저 조용히 흐르고만 있는 곳이다. 세상이 어찌 변하여도 아무 상관없는 듯 달관의 모습으로 묵묵히 금강을 향해 가고 있다.

임비호, 조치원 출생, 국제뇌교육과학대학원 지구경영학 박사과정, 세종 YMCA시민환경분과위원장(현), (전)세종생태도시시민협의회 집행위원장, (전)세종시 환경정책위원, (전)금강청 금강수계자문위원, 푸른세종21실천협의회 사무처장(전), 연기사랑청년회장(전)
이메일 : bibo10@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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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정 2021-09-26 01:56:04
공주면 덕학리가 아니라 공주시 의당면 덕학리. 태산리,송학리는 공주시 의당면에서, 대교리,평기리는 공주시 장기면에서 세종시에 편입되면서 장군면으로 개칭.