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도와줬던 사람, 내 집 차지하고 찾아간 딸 문전박대"
"내가 도와줬던 사람, 내 집 차지하고 찾아간 딸 문전박대"
  • 윤철원
  • 승인 2021.09.13 08:27
  • 댓글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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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철원칼럼, 세종시의 한국전쟁] 다시 돌아온 조치원읍, 전쟁 후라 곳곳에 위험
남아있는 인민군 , 자위대원들이 생포하고… 그들도 동족인데 '총살형' 안타까워
한국전쟁이 발발하자 피난민들이 인산인해를 이뤘다. 

▣ 나는 조치원으로 돌아 왔다. 인민군도 생포하고

9월28일 (음8월17일) 밤에 우리 군대가 조치원읍에 진주하였다는 소식이 들렸다. 즉시 출발하려고 하자 주변에서 “오늘은 위험하니 내일 가라”고 권한다. 일각이 여삼추인데 하룻밤도 더 지체할 수 없었다. 동네에서 여러 사람이 만류하는 것을 거절하기도 어려워 참아보려고도 노력했으나 참지 못하고 그날 늦게 짐꾼을 사서 출발하였다. 

피난 다닐 때는 짊어지고 다니는 것이 격에 맞았으나, 수복이 되었던 당시에는 행세하는 방도가 달라서 짐꾼을 샀던 것이다. 짐꾼과 더불어 마라톤 하듯 달려가니 노처가 따라 오지를 못한다. 조천교를 쉬엄쉬엄 건너니 나를 알아보고 환호성이 터지며 여기저기서 “어디를 갔었기에 이처럼 빨리 돌아오시오?”하며 기뻐한다.

읍장사택으로 들어가니 마당에 잡초가 한길이 넘도록 자라서 산짐승이 새끼를 칠 지경이었고, 군데군데 방공호도 파여 있었다. 이 방 저 방에는 전에 없던 화류장이 놓여 있었고 고급스러운 교자상에는 중국요리가 반도 못 먹은 채 남아 있었다. 내가 피난 갈 무렵 약으로 쓰려고 조합해서 감춰뒀던 술 한 병을 80여일 만에 발견한 모양인데 그 술을 따라 마시다가 도망간 흔적만 남아 있다.

내 뒤를 따라 오던 시민과 총을 멘 자위대원들이 “어제 밤까지 인민군이 이 집에 주둔하였는데 혹시 천장이나 저 방공호 속에 숨어 있을지 모르니 수색하자”며 천장을 비롯하여 방공호를 뒤진 후에 풀밭으로 들어섰다. 잠시 후 자위대원이 조치원 양조장 사무실을 수색하다가 총과 실탄을 둘러멘 인민군 2명이 자리를 깔고 앉아 있는 것을 발견하였다.

인민군이 실탄을 장전한 총으로 자위대원을 향해 겨누려고 할 때, 자위대원들도 빈총이지만 어깨에서 총을 벗어서 겨누자 인민군이 주저앉고 말았다. 만일 자위대원에게 실탄이 있었다면 쏘았을 것이다. 자위대원이 급히 군대에 알리자 인민군들은 그 틈에 달아났다. 군인들이 지붕 위로 올라가서 풀밭을 향해 집중사격을 가하였으나 인민군의 흔적을 발견하지 못하였다.

자위대원과 군인들이 합동으로 민가를 수색하였으나 간 곳을 찾지 못하자 시민들도 합세하여 수색을 하다가 양조장 변소에 숨어 있는 것을 발견하였다. 아군이 변소 문을 열자 인민군이 총을 쏘려고 총구를 문 밖으로 내밀었으나 좁은 공간에서 움직임이 자유롭지 못해 대항할 수 없었는지 손을 들고 말았다. 그들은 “이제 패전해서 죽게 되었으니 고깃값이라도 하자”며 그날 밤 자위대원을 해칠 계획으로 기다렸다고 한다.

만일 내가 하루 늦게 조치원으로 돌아 왔다면 그날 밤 많은 사상자가 발생하였을 것을 생각하니 하나님께 감사하기 짝이 없었다. 체포된 인민군은 물론 총살되었다. 그들도 우리 동포인 만큼 불쌍한 생각이 없지 않았으나 사상전쟁에서는 어쩔 수 없는 실정이었다.

인민군이 체포된 후, 그간 조치원지역에서 부역한 사람들의 정보가 들렸다. 맹 읍장을 죽여야 한다고 날뛴 여자가 2명이 있었다고 하였으나 여자의 소견임을 감안하여 용서하였다.

그러나 내게 신세를 진 사람이 내 집을 차지하고 내 딸을 위협하며 구박한 자가 있었다. 일제의 소위 대동아 전쟁 당시에 내가 살던 반의 반장으로 있던 정모(某)였다. 그 때는 모든 것이 배급제였던 까닭에 술 한 병이라고 배급이 아니면 얻을 수 없는 시절이었다. 급료도 없이 반장 노릇하는 것이 딱해 보여서 내게 배당된 물품을 대금까지 지불하고 전표를 발급 받아 그 사람에게 돌려주었다. 그리고 그 아버지가 나와 동갑인 까닭에 명절 때마다 내가 무엇이 되었든지 선물을 보내 주기도 했었다.

그 사람의 집이 폭탄에 맞아 소실된 후 내 집에 들어 와서 살고 있었던 것이었다. 갈 곳이 없어서 임시라도 나의 빈집에서 거처하는 것은 좋은 일이다. 집을 지켜 준다는 의미도 있고 해서 나는 반대하지 않았고 그동안 지내온 정을 생각해서라도 감사를 표할 처지였다.

그런데 내 딸이 피난을 갔다가 돌아와 보니 집이 폭격에 소실되어 할 수 없이 아비의 집을 찾아갔던 모양이었다. 가서 보니 정모(某)가 입주해 있는 것을 보고 “당신 집도 이번에 소실되었다지요. 나도 집이 소실되어 아버님 집을 바라고 왔으니 방 한 칸만 사용합시다.”고 했다는 것이다.

한국전쟁 당시 대전 주변
한국전쟁 당시 대전 주변

그러자 그 사람이 “이 집이 맹읍장의 집인 줄 알고 왔소? 이집은 인민공화국에서 몰수한 집이오.”라며 폭언과 위협을 가하고 구박까지 하였다는 것이다. 게다가 마당가에 있는 감나무에 홍시가 달려 있는 것을 보고 외손자가 외할아버지 감나무라며 따려고 하였던 모양인데, 그 어린아이에게 정씨 가족들이 얼마나 야단을 쳤는지 조치원에 그대로 있다가는 그 자들에게 해코지를 당할 것 같은 공포심에 뒤도 돌아보지 않고 그 문을 나서서 다시 청원군 지방으로 가서 은신하였다고 한다.

이밖에도 여러 문제가 있었으나 모두 귀 밖으로 흘려들었는데 정모(某)에 대한 분노는 참을 수가 없어서 즉시 그에게로 갔다. 그러자 정 아무개의 늙은 아비가 나와서 지난 잘못을 사과한다. 사과하는 사람이 나이가 어렸으면 한 대 쥐어박기라도 했을 텐데 나와 동갑인 고로 늙은 사람의 정상을 생각하여 분을 참았다. 그리고 “오늘 당장 퇴거하기가 곤란할 테니 3일 후까지 집을 비우라”고 하며 돌아오니 주변에서 이를 지켜 본 사람들이 너그럽다는 말로 나를 위로하였다.

그 길로 각 기관을 돌아다녀 보니 읍사무소가 전소되었고 기관마다 성한 건물이 하나도 없었다. 외부에서 듣기에 “학교는 모두 파괴되었다”고 해서 걱정을 많이 하였는데 사실 현장은 그렇지 않았다.

내가 남의 원망까지 들으며 전력을 다해 지어 놓은 명동학교와 농업학교를 방문했더니 파손된 부분이 없지는 않았으나 큰 노력을 들이지 않아도 수리할 수 있다는 판단에 안심이 되었다.

읍사무소가 불탄 것을 슬퍼하다

호선체극도향천(呼船替屐渡鄕川, 배타고 신발갈아 신고 냇물 건너서)

망보정거읍소전(忙步停車邑所前, 걸음 멈추고 읍사무소 앞에 섰노라)

건물여문전소진(建物如聞全燒盡, 건물이 듣던 대로 전부 불탔으니)

무언함루소지변(無言含淚小池邊, 말없이 눈물 머금고 연못가에 섰노라)

공습하는 미군 제트전투기

명동학교와 농업학교를 돌아보고

양교전문소실운(兩校傳聞燒失云, 소문에는 두 학교 불탔다더니)

의존주필우방군(依存駐蹕友邦軍, 유엔군이 주둔하고 있네)

제물불무훼궤처(諸物不無毁壞處, 무너진 곳이 아주 없지는 않으나)

비어타교소상흔(比於他校小傷欣, 타교에 비해 피해가 적으니 기쁘다)

이 글을 쓴 윤철원은 세종시 상하수도과장으로 지난 2017년 정년퇴임을 한 조치원 토박이다. 조치원읍장 재직 당시 세종시로 명칭이 변경되면서 전통과 역사에 대한 시민 의식이 부족한 점을 아쉬워하면서 지역문화 연구에 매진했다. 이후 세종시 향토사 연구위원으로 활동하면서 지역과 관련한 역사를 찾아내 후손들에게 전해주는 역할을 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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애독자 2022-06-21 11:35:20
계속해서 연재되면 좋겠습니다. 흥미롭게 읽고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