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호천에서 배도환 군을 만났다 헤어지고…
미호천에서 배도환 군을 만났다 헤어지고…
  • 윤철원
  • 승인 2021.09.03 10:04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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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철원칼럼, 세종시의 한국전쟁] 동면장 재직하면서 독립운동 도운 인물
파리한 모습에 눈물이 앞을 가려… 나와는 의기투합, 서로 도우면서 살아
한국전쟁 당시 피난열차

미호천을 건너려고 제방에서 주위를 살피는데 멀리서 삿갓을 쓰고 강을 건너려는 배도환군이 보였다. 나는 제방에서 서서 배 군이 강 건너 오기를 기다렸다가 그를 불렀더니 나를 발견하고는 급히 다가왔다. 뒤를 돌아보니 우리 가족 일행 4명은 벌써 저만치 가고 있었다. 

나는 배 군과 그동안 지낸 이야기를 하려고 했으나 말보다 눈물이 앞을 가린다. 자세히 살펴보니 배 군의 얼굴이 중환자처럼 파리한데, 평소 같았다면 아무리 그렇다 해도 내 눈에서 눈물이 나오지 않았을 것이다.

배 군은 일찍이 청년시절부터 동면장으로 재직했다. 그러나 지역에서 독립운동과 민족운동을 하는 사람들에게 직·간접적으로 물심양면의 편의를 많이 제공해 주었다. 제1권에서 자세히 적은 바 있지만 장재학, 장재규 두 지사(志士)는 세금내기를 거부하며 항일투쟁을 벌였다. 그로 인해서 재산압류를 당하는 등 많은 어려움을 겪었는데 그때마다 배군이 보살펴 주었다.

그 당시 나와는 비록 행로가 달랐다고 해도 그와 같은 점은 나와 의기가 투합하였던 것이며 무슨 일이 있을 때마다 물심양면으로 도움을 주었는데 그 도움이 나에게만 한정해서 베푼 것이 아니요 항일 투쟁하는 인사들에게 은밀히 베풀었기 때문에 그 고마움을 늘 마음에 간직하고 있었다.

만일 그러한 일들이 상급 관청에 알려지기라도 하면 자기가 위험에 빠질 줄 알면서도 도움을 주었기 때문에 나는 항상 감사하는 마음을 가지고 있었으며, 겉으로는 소원한 것 같았으나 내적으로는 절친한 관계였다. 배 군은 본래 성격이 겸손하고 인자해서 의(義)로써 주민을 대하고 바른길을 걸으며 어려운 사람을 도왔다.

그러한 공적을 면민들이 칭송하고 후대에 기념하려고 “면장 배도환 송덕비”를 세웠다. 그러나 해방이 되니 아무리 면민이 칭송한다고 해도 면장을 오래 지낸 전력이 있어서 불평하는 사람이 없을 리 없었다. 그런 사람들이 배 군의 전력을 흠잡아 문제 삼으려는 것을 장재규 지사의 종손이요 장재학지사의 장손인 낙민(洛敏)군이 앞을 가로 막으며 “배 면장은 왜정 치하에서도 우리 민족을 사랑으로 보살핀 애국애족하던 지사”라고 주장하며, 모(某) 인사와 더불어 여러 사람의 여론을 종합한 결과 그 문제에 전혀 잘못이 없다는 결론을 지어서 무사할 수 있었다.

그러나 뜻밖에 6.25사변이 일어나자 노선이 다른 공산주의자들이 한국 혼을 지키며 애족하여 온 배 군을 공산주의 사상에 비추어 볼 때 중대 범죄자라며 괴롭혔던 것이다. “지금도 불려갔다 오는 길이요.”라며 한숨을 쉬니 과거 일제 강점기 동안 일제의 눈을 피해가며 외소내친(外疎內親, 겉으로는 모른 체해도 내적으로는 아주 친함)했던 유일한 친구의 한숨에 어찌 내 눈에서 눈물이 없을 수 있겠는가?

가난했던 시절, 밥을 나눠먹는 모습

나는 박동찬 군으로부터 유엔군이 얼마 전 인천에 상륙하였다는 말도 들었고 나 자신의 추측도 있고 해서, 배 군에게 지금이 가장 위험한 시기이니 며칠만 잘 피신할 것과, 그 자들과 상대하지 말 것을 부탁하고는 눈물을 닦으며 헤어졌다.

옥산면 신대리까지 가는 길에 배 군의 삿갓 쓴 모습을 본 후 옛날 김삿갓이 생각났다. 김립이 삿갓을 쓰고 다녔던 것은 자기 조부 김익순이 선천부사로 있다가 순조 임신년에 홍경래에게 항복한 죄 때문에 “하늘을 쳐다 볼 수 없다”며 삿갓을 쓰고 다녔다고 하지만, 배 군이 삿갓을 쓴 것은 무슨 잘못 때문인가?

강가에서 우연히 배도환군을 만나다.

원견임천도환형(遠見臨川道煥兄) 멀리서 보아도 강변에 서있는 사람 도환(道煥)형이라

정거고의월래정(停車故俟越來程) 수레 멈추고 강 건너 오기를 일부러 기다렸다네.

악수무언양구립(握手無言良久立) 말없이 손잡고 한 동안 서 있다가

욕서정화누선행(欲敍情話淚先行) 지난 이야기 나누고 싶으나 눈물이 앞을 가리네.

삿갓 쓴 배도환군을 바라보며 짓다.

노견배군대립행(路見裵君戴立行) 길을 가다 삿갓 쓴 배군 모습을 보니

억회김립가광행(憶懷金笠假狂行) 생각나는 것은 김삿갓의 미친 척한 행적이로다.

김립가광인조죄(金笠假狂因祖罪) 김삿갓의 미친 척은 그의 할아버지 죄 때문이라지만

배군대립범하행(裵君戴笠犯何行) 배 군은 무엇을 잘못했기에 삿갓을 썼단 말인가?

신대리에 도착하니 사돈 내외분이 반가이 맞아 주는 반면에 다섯 살 먹은 외손녀 혜연이는 나를 잡고 울음보를 터뜨렸다. 혜연이는 제 동생을 본 이후로 내게 잘 오지 않았다. 그러다가 대전 산성동으로 피난 갈 때는 등에 업고 수레에 태우고 하며 다녔는데 나중에는 20여리의 길도 저 혼자 걸었다고 한다.

어린 것이 외가에 있을 때는 귀여움을 독차지하고 있다가 그동안 고생을 많이 한 것 같았다. 내 딸의 자식이었지만 어린 아이가 말없이 하소연 하는 것 같아서 나의 눈에서도 눈물이 솟아 나왔다.

내가 “너 무슨 밥 먹었니?”하고 물으니 “빨간 밥 먹었어.”한다. “빨간 밥이라니. 그런 게 어디 있어?” 하니 “아냐. 빨간 밥이 있어.” 한다. 나중에 알고 보니 수수밥을 먹었던 것이었다.

하루 밤을 자고 나니 9월 24일(음 8월 13일)이다. 아무리 난리 중이라고 해도 제 집에 있는 사람들은 추석준비에 바빴다. 나는 셋방을 구하려고 동네를 돌아다니다가 그 마을에 사는 사부인의 동생인 오기남씨를 만났다. 그가 자기 집에 빈방이 있으니 오라고 해서 즉시 짐을 옮겼다.

하루를 지나고 나니 8월 14일인 까닭에 사방에서 기름질 냄새가 진동을 하고 이곳저곳에서 맛있는 음식을 가져다준다. 그 동네 인심이 후해서 인지, 피난민이라고 가져다주는 것인지, 아니면 주인집의 음덕인지는 모르나 우리 두 늙은이가 며칠을 먹어도 남을 만큼 맛있는 음식물을 받았다.

저녁 무렵에 인민군 10여 명이 교대한다며 북쪽을 향해 가는데, 한 옆에서는 인민군이 야습할지도 모른다고 수군거린다. 밤이 되었다. 음력 8월 14일이라 달이 휘황하게 밝아야 할 터인데 어찌된 일인지 옆에 서 있는 사람조차 알아보지 못할 정도로 캄캄했다.

전쟁 고아들

달도 없는 밤에 신호불이 하늘로 올라가니 동네 사람들은 동네가 포격을 당할지 모른다고 하며 동구 밖으로 피신하기에 급급했다. 잠도 자지 못하고 밤을 새우며 날이 밝아 추석날 아침이 되었다.

가정마다 차례도 제대로 지내지 못하는 분위기 속에서 인민군들은 여전히 삼삼오오로 맨몸 또는 총을 메고 북쪽으로 행군하였다. 우리 군대와 유엔군은 청주시에는 음력 8월 15일, 조치원읍에는 16일(양력 9월 27일) 입주하였다.

신대리 부근에는 도망하는 인민군으로 뒤덮히다시피 하였다. 마을 청년들이 도망하는 인민군을 붙잡으려고 하였으나 연로한 어른들의 만류로 그만두었다. 자연히 우리 군대에게 잡힐 것인데 섣부르게 건드렸다가 최후의 발악으로 해를 입을까 염려하였던 것이다.

이 글을 쓴 윤철원은 세종시 상하수도과장으로 지난 2017년 정년퇴임을 한 조치원 토박이다. 조치원읍장 재직 당시 세종시로 명칭이 변경되면서 전통과 역사에 대한 시민 의식이 부족한 점을 아쉬워하면서 지역문화 연구에 매진했다. 이후 세종시 향토사 연구위원으로 활동하면서 지역과 관련한 역사를 찾아내 후손들에게 전해주는 역할을 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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