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일성 장군 만세, 이승만 정권 타도" 벽보 등장
"김일성 장군 만세, 이승만 정권 타도" 벽보 등장
  • 윤철원
  • 승인 2021.06.29 08: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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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철원칼럼, 세종시의 한국전쟁]처음 본 적군의 벽보
공습에 혼비백산, 금남교 밑에 숨었다가 종촌으로 피난

6월은 호국보훈의 달이다. 그만큼 나라를 위한 희생은 숭고한 것이고 두고두고 그 희생을 후대들이 값지게 만들어야 한다는 얘기다. '한국전쟁' 당시 조치원을 비롯한 연기군 상황은 어떠했을까. 이곳 역시 전쟁의 참혹함에서 벗어날 수는 없었다. 그 실상은 '추운실기'에 잘 묘사돼 있다. 6월 전쟁과 관련한 부분을 발췌하고 번역해서 전쟁의 잔혹함을 전해보고자 한다. 여기에 나오는 1인칭 '나'는 추운실기 저자 맹의섭 선생이다. 참고로 지난 1월부터 연기군의 야사를 기록한 '추운실기'를 번역하고 있음을 밝힌다.

인민군 벽보. 출처 : 다음

▣ 적군의 벽보를 처음 보고 두려웠다

산성동에 가까이 가니 이곳저곳에 ‘김일성 장군 만세’, ‘이승만 정권 타도’라는 벽보가 붙어 있었다. 이와 같은 벽보를 처음 보게 되니 겁이 나서 발걸음이 떨어지지 아니하였다.

아아! 앞으로 어찌될 것인가? 영영 공산군의 점령지가 되고 말 것인가? 그렇다면 우리 같은 인간은 숙청대상이 아닌가? 사람이 한 번 태어나면 수명의 장단은 있을망정 죽는 것은 정한 이치다. 그러나 삶에 대한 미련이라고 하기보다는 개죽음이 싫었던 것이다. 인간은 위정자의 지도 여하에 순종할 수 있다지만 이념과 사상은 서로 다른 것은 어찌한단 말인가? 뇌를 세척할 수 있을까?

붉은 군대의 벽보를 보고서

작전향남퇴후군(昨餞向南退後軍, 어제는 남향하여 후퇴군 뒤를 따랐으나)

금영자북진전군(今迎自北進前軍, 오늘은 북향하니 북한군이 앞에 있네)

언지조차병과세(焉知遭此兵戈世, 어찌 이와 같은 난세를 만날 줄 알았으랴)

난부집권점령군(難負執權占領軍, 집권한 것은 점령군이라네)

동상(同上, 위 제목과 같음)

초견적군벽보서(初見赤軍壁報書, 처음으로 붉은 군대 벽보를 보고서)

심신격분취광여(心身激忿醉狂如, 심신이 울컥하여 미칠 것 같네)

전전일신의수립(戰戰一身依樹立, 전쟁 통에 이 한 몸 세우려 하나)

궁사무로차정서(窮思無路此情舒, 궁하면 길 없음도 이와 같을까)

해가 지는 것도 화살처럼 빠르다. 오늘도 벌써 석양이 되었는데 산성동에 있는 강씨 집이 멀리 보였다. 그곳에 가면 노처를 비롯하여 자식과 조카딸을 만날 것이라는 생각에 가슴이 설렜다. 길가에 누가 서 있는 지도 모르고 앞만 쳐다보며 빠른 걸음으로 걷는데 갑자기 “어찌하여 다시 올라 오시오”하고 달려드는 사람이 있었다. 깜짝 놀라서 고개를 돌려보니 노처가 길옆 논둑길에 서 있다가 나를 발견하고 달려든 것이었다.

“어찌하여 이곳에 있소?”하고 물으니 전일 강씨 집에 구해 두었던 벼 한 섬을 찧으려고 물방아간에 가지고 갔더니 이틀 후에나 찧는다고 해서 맡겨두고 오는 길이라고 하였다. 종손 관호가 옆에서 듣고 있다가 “한시가 급한데 이틀씩이나 어떻게 기다려요.” 한다. 물방앗간으로 가고 나는 노처와 강씨 집으로 가서 강씨에게 감사인사를 하였다. 잠시 후에 관호가 벼 한 섬에 쌀 5말을 받아 가지고 왔다. 강씨에게 과거 은혜를 보답하는 의미로 백미 두 말을 주고 나머지 쌀은 우리 일행 5명이 각각 조금씩 짊어졌다.

7월 26일, 이른 아침에 출발하여 대전비행장 부근에서 쉬고 있는데 조치원에서 엿장사를 하는 사람을 만났다. 나는 알아보지 못했으나 그 사람은 나를 알아보더니 관호와 다정하게 인사를 나눈다. 고향사람이었기 때문에 함께 앉아서 이런저런 이야기를 주고받는데 엿장수가 하는 말이 인민군이 온 후로 숙청대상에 장자(長字) 붙은 사람은 동장, 반장까지도 용서하지 않고 하나하나 빠짐없이 조사하고 있다며 떠든다.

나도 물론 듣기 싫었는데 노처는 안색이 변할 정도로 창백해졌다. 급히 그 사람과 떨어져서 가려고 출발했으나 그자는 뒤를 따라오며 숙청대상자의 이야기만 할 뿐이었다. 정말 듣기 싫었다.

그럭저럭 금남면 무넘이고개(水越嶺) 위에 올라섰으나 뒤에서 바짝 따르며 떠드는 엿장수의 말에 노처는 겁도 나고 노독이 생겼는지 고개를 오르다가 기진맥진하여 쓰러지고 말았다.

아무리 저녁 해라고 하여도 7월 무더위에 내리쬐는 태양의 열기는 뜨거웠다. 기진하여 쓰러진 노처의 얼굴에는 진땀이 흘렀다. 보다 못하여 지팡이를 땅에 꽂아 놓고 활엽수의 가지를 꺾어다가 그늘을 만들어 내리쬐는 태양을 가려주었다. 그리고 계곡에서 흘러내리는 석간수를 발견하고 물이라도 한 그릇 떠 먹일 요량으로 산비탈로 내려갔다.

수월령에서

노처기진와산령(老妻氣盡臥山嶺, 늙은 아내 지쳐 산마루에 쓰러지고)

사고무인이석천(四顧無人已夕天, 사방을 돌아보아도 사람 없는데 저녁일세)

절목작음차일영(折木作陰遮日影, 나뭇가지 꺾어 해가려 그늘 만들고)

갈구청수하계변(渴求淸水下溪邊, 맑은 물 얻으려고 계곡으로 내려간다.)

물을 떠다 먹이고 난 후에 엿장수가 또 올라 왔다. 노처는 생기가 났는지 벌떡 일어나며 산 아래로 내려가다가 산 중턱에 이르더니 이곳저곳 산골짜기에서 흘러내리는 물줄기를 따라 산골짝으로 들어가다가 뒤를 돌아보더니 엿장수를 먼저 가게하자고 했다.

그리하여 산골짝으로 들어가서 5인 가족이 석간수에 발을 담그고 나니 정신이 맑아졌다. 숨어서 엿장수의 거취를 살펴보니 사면을 휘돌아다보며 내려가고 있었다. 나는 “저 사람은 반드시 나를 해칠 사람이지 나를 구해줄 사람은 아니다”라고 판단하고 말았다. 해칠 의도가 없다면 산을 내려가면서 사방을 살필 까닭이 없다는 생각을 하니 더욱 의심이 솟았다. 우리 일행은 엿장수의 거동을 살피며 어둠을 틈타 면사무소 소재지인 용포리 방면으로 내려갔다. 용포리를 통과하려면 대낮보다 어두운 밤에 지나가는 것이 안심이 될 것 같아서 일부러 산골짜기에서 해 기울기를 기다렸던 것이다.

▣ 진퇴유곡이 된 금남면사무소 앞길이었다

용포리 뒷골목으로 접어드니 총을 멘 세 사람이 행인의 보따리를 뒤지며 하는 말이 “우리를 위하여 멀리 오신 인민군의 식량이 부족하니 짐 속에 있는 양곡을 내어 놓고 가라”는 것이었다. 우리 일행 5명은 “경성까지 가는 길인데 전부 내어 놓으면 먼 길을 갈수 없다.”며 애걸하면서 절반 만 내어주고 금남면 사무소 앞에 이르니 수십 명의 부역자들이 오고가는 가람들의 신원을 조사하고 있었다. 나는 “걸렸구나”하고 뒤로 빠져 뺑소니를 치려고 일행을 앞세워 먼저 보내고 한 사람 두 사람 앞세우면서 뒤를 돌아다보니 엿장수가 주막 툇마루에 앉아서 오고가는 사람을 유심히 바라보고 있었다.

진퇴유곡이었다. 어쩔 수 없는 상황에 “모든 것을 하늘에 맡기자”고 결심하고 앞으로 나서는 순간 하나님이 나를 살리셨다. 때마침 비행기 두 대가 공중을 휘젓는 소리를 내며 나타났는데 “항공” 소리를 외치며 모였던 사람들이 전부 뿔뿔이 흩어졌다.

피난 행렬, 출처 : 다음

그 틈을 타서 뒤에 있던 내가 재빠르게 다른 사람들을 앞지르며 뛰었다. 어느덧 대평리 금남교 부근에 당도하니 인민군 10여명이 금남교로 가던 우리 일행을 보고는 “빨리 다리를 건너가라”고 하며 “만약에 비행기가 와서 다리를 끊으면 여러 날 건너지 못한다.”는 것이었다.

그렇지 않아도 다리만 건너고 보자는 심산으로 달리던 판인데 뒤에서 독촉하니 두 눈썹이 휘날리도록 다리를 건너고 보니 비로소 살 것 같았다. 종촌리를 못 미처 4∼5채의 집이 있는 부근인 송담리 2구(표석동)에 이르니 하늘에 5대의 비행기가 나타났는데 지상에서는 10여 대의 자동차가 서치라이트를 대낮처럼 밝히며 달렸다. 아마도 자동차들이 비행기 소리를 듣지 못한 모양이었다. 우리 일행이 급하게 도로를 벗어난 순간 비행기에서 투하한 폭탄이 터졌다. 내 앞으로 오는 자동차부터 세 번째 자동차가 불길에 휩싸이는 동시에 내 몸은 3㎝ 이상 떠오른 것 같은 느낌이었다.

인민군들이 “공습이 심하니 멀리가지 말고 마을로 들어가 숨으라”고 하기에 더는 갈 수가 없어서 표석동으로 들어갔으나 마을 사람들이 받아 주지 않는다. 그 이유는 달이 한창 밝은데(음력 6월 11일) 사람이 많이 모여 있으면 비행기가 폭격할 우려가 있다는 것이었다.

동네에서 쫓겨 나와서 길 옆에 있는 외딴 집(주인 임무경)에 들어가니 폭격으로 대들보가 부러져서 방으로는 들어갈 형편이 아니었다. 부엌으로 들어가 보니 보리 짚이 쌓여 있었다. 보리 짚을 깔고 5명 가족이 저녁도 먹지 못하고 누워서 자려고 하나 모두 피곤하고 아프다는 소리뿐이었다.

그날 밤을 뜬 눈으로 새우다시피하고 7월 27일 새벽이 되었다.

날이 밝은 후에 종촌리를 지나가면 아는 사람을 만날 것 같아서 먼동이 트기 전에 공주 가는 길 쪽으로 돌아가려고 논둑길로 접어들다가 뜻밖에 친구 황우영 군을 만났다. 그 친구가 하는 말이 “폭격으로 집이 불타고 창고에 두었던 양곡도 역시 전소되어서 당장 먹을 것도 없다”며 하소연 하였다.

인사를 나눈 후에 내가 “우리 일행이 저녁도 못 먹고 있으니 어찌하오. 가지고 온 쌀이 있으니 아침을 부탁하오.” 하자 그 친구가 탄식하기를 “내가 맹형에게 쌀을 받아서 식사를 제공한다는 것은 예의가 아닌 줄 아오. 그러나 우리도 꽁보리밥으로 겨우 연명하는 형편이라 이 쌀을 받으니 용서하시오.”하며 부엌으로 들어가서 부인에게 보리쌀이 섞이지 않도록 주의를 시킨다. 노처가 그 말을 듣고는 가만히 부엌으로 들어가더니 솥뚜껑을 열고 보리와 쌀을 뒤섞어 놓았다. 황씨 부인이 놀라며 급히 들어와서 말리려고 하였으나 이미 쌀과 보리가 골고루 섞인 뒤였다.

 글을 쓴 윤철원은 세종시 상하수도과장으로 지난 2017년 정년퇴임을 한 조치원 토박이다. 조치원읍장 재직 당시 세종시로 명칭이 변경되면서 전통과 역사에 대한 시민 의식이 부족한 점을 아쉬워하면서 지역문화 연구에 매진했다. 이후 세종시 향토사 연구위원으로 활동하면서 지역과 관련한 역사를 찾아내 후손들에게 전해주는 역할을 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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