완주 갔다가 금산 온 피난길... "모두 고생길이었다"
완주 갔다가 금산 온 피난길... "모두 고생길이었다"
  • 윤철원
  • 승인 2021.06.23 09: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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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철원칼럼, 세종시의 한국전쟁]대전에서 간신히 만난 가족
피난 중에도 변하지 않는 인정, 조치원읍 직원 만나 따스한 대접 받아

6월은 호국보훈의 달이다. 그만큼 나라를 위한 희생은 숭고한 것이고 두고두고 그 희생을 후대들이 값지게 만들어야 한다는 얘기다. '한국전쟁' 당시 조치원을 비롯한 연기군 상황은 어떠했을까. 이곳 역시 전쟁의 참혹함에서 벗어날 수는 없었다. 그 실상은 '추운실기'에 잘 묘사돼 있다. 6월 전쟁과 관련한 부분을 발췌하고 번역해서 전쟁의 잔혹함을 전해보고자 한다. 여기에 나오는 1인칭 '나'는 추운실기 저자 맹의섭 선생이다. 참고로 지난 1월부터 연기군의 야사를 기록한 '추운실기'를 번역하고 있음을 밝힌다.

임시정부청사로 사용됐던 충남도청

▣ 만난 가족을 다시 이별하였다

어암동으로 온 그날, 즉 7월 20일 저녁 때 도림리에서 바라본 동쪽에서 하늘을 찌를 듯한 불빛이 보인다. 드넓은 하늘을 가릴 정도로 치솟는 불빛과 검은 연기로 보아 대전시 전역이 불타는 것 같았다.

도림리에서 하룻밤을 지내는 동안 번쩍이는 섬광과 폭발음 소리에 노숙하는 사람들이 낙담할 정도로 심리적인 타격이 컸다. 한밤중이 되어서 바닥에 깔았던 자리를 머리에 뒤집어쓰고 나무 밑에 앉아 있으니 젖은 옷에 몸이 떨려서 견딜 수가 없었다. 목숨의 소중함과 인간의 나약함을 새삼스럽게 깨달았다.

이튿날 오후가 되어서야 날씨가 완전히 개였는데 산 위에 올라 바람이나 쏘이려고 나가던 길에 처음 보는 사람이 나를 유심히 바라보다가 “당신, 조치원읍장 아니시오. 어떻게 여기까지 오시었소.”하며 말하는 태도와 돌아서서 가는 모습이 왠지 모르게 꺼림칙하였다.

다음날 7월 22일, 아침 일찍 가족을 전부 모아놓고 “어제 저녁때에 만난 사람이 수상해서 이곳에 오래 머무를 수 없으니 나는 떠나야겠다. 원아들은 인민군이 해칠 리 없으니 당신은 친정에 가서 당분간 고생하시오.”라고 한 후 자식에게는 “네 사촌 누이와 함께 생가에 가서 있다가 수복이 되거든 다시 상봉키로 하자. 나는 유명인사로 분류되었으니 붙들리면 용서 없이 죽는다. 살려다가 죽는 것은 할 수 없으나 앉아서 죽음을 받을 수는 없지 않느냐” 하니 가솔이 모두 동의하였다.

떨어지지 않는 발걸음으로 출발하려는데 종손 관호가 “할아버님 혼자서 어찌 정처 없는 길을 가시려 합니까? 저도 함께 가겠습니다.”하고 따라 나섰다. 그렇게 둘이 간 곳이 전북 완주군 운주면 상북동이었다. 때마침 쏟아지는 비를 피하려고 살펴보니 머지않은 산 밑에 외딴집 한 채가 보였다. 불문곡직하고 들어가니 초가삼간에 헛간이 있을 뿐 몸을 들이기조차 어려운 주막이었다.

반석기에 4명의 저녁밥이 나왔다. 그러나 저무는 해에 빗줄기가 사정없이 동서남북으로 흩날리니 헛간이 전부 물바다가 되었다. 어떻게 할 수가 없어서 내가 지니고 있던 담요를 바람막이로 치고 나니 비는 막았으나 달라붙는 모기떼가 사람을 괴롭혔다.

그때 갑자기 닭 잡는 소리가 나더니 잠시 후 난데없이 시조창이 울리더니 여러 가지 잡가가 밤새 이어지며 울려 퍼졌다. 이태백이 읊은 별유천지 비인간(別有天地 非人間, 인간세상이 아닌 별천지)라는 시가 문득 떠올랐다.

갑작스런 전쟁으로 인해서 피난민이 길가에서 방황하는데, 한 옆에서는 마치 태평성대와 같은 분위기로 가곡이 울리며 피난민의 가슴을 뒤 흔들고 있으니 말이다.

밤새도록 닭 잡는 소리와 고기 볶는 냄새가 진동을 하며 우리 피난민의 코를 찌르더니 이튿날 아침에 주인이 밥상을 들고 오는데 반석기 밥에 미역국을 들고 왔다. 이 미역국은 어젯밤 손님들이 먹고 남은 닭 내장과 뼈를 고아 끓인 것이었다. 집에서는 가장으로서 눈길도 주지 않았던 닭 뼈다귀를 우려 끓인 살코기 한 점 없는 미역국이었지만 피난 생활 중에 주린 창자에는 더할 나위 없는 진미였기에 그 흥취를 시로 읊어 보았다.

한국전쟁 때 비상식량이었던 주먹밥

특별한 진미의 닭국

만도운주상북루(晩到雲州上北樓, 늦게 운주면 상북동 주막에 도착해서)

허당자초일소류(虛堂籍草一宵留, 헛간에 자리 깔고 하룻밤 머물렀네)

달야기가첨여고(達夜妓歌添旅苦, 밤새 기생노래가 나그네를 괴롭히더니)

익조계탕별진수(翌朝鷄湯別珍羞, 이튿날 아침 닭국은 별미로세)

▣길이 막혀서 남하하지 못하고 돌아 섰다

7월 23일 아침, 보슬비가 옷 젖을 만큼 계속 내린다. 나를 반길 사람도 없는데 어디를 향해 갈까 하고 망설이다가 전주를 거쳐서 부산으로 향할 작정으로 출발하려는 데 전주 방면에서 피난민들이 떼를 지어 온다. 이유를 물으니 북쪽으로 향해 가는 사람들에게는 무어라고 하지 않으나, 남쪽으로 내려가는 사람은 인민공화국에 죄를 지은 자라며 마구잡이로 때리기 때문에 다시 돌아오는 중이라는 것이었다.

그 이야기를 듣고 잠시 생각을 하다가 나도 북행하기로 결심을 하고 돌아서서 가던 중에 해가 저물어 길옆의 오막살이 초가집 뒷방에서 하룻밤 신세를 지었다.

남으로 간다한들 기다리는 사람도 없거니와 적군에게 붙들리면 죽음을 면치 못할 것 같아서 이생각저생각에 잠에 들지 못하는데 궂은비 소리가 나그네의 마음은 더욱 심란하였다.

비몽사몽간에 22년전 1929년 기사년 1월 중순 초에 충청남도청에서 나에게 귀순을 권고할 무렵 변절하여 생계를 구하느냐, 아니면 변치 않고 계속하여 민족운동을 하느냐 하는 생각에 밤마다 잠을 못 이루고 고민하던 중에 한 노인이 옥골선풍(玉骨仙風, 신선과 같은 풍모)으로 나타나셔서 익생불능, 익사불능(溺生不能, 溺死不能, 물에 빠져 살수도 없고, 물에 빠져 죽을 수도 없다) 8자를 가르쳐 주심으로 당시 변절을 거부하고 변함없는 태도를 지키다가 해방을 맞이한 일이 있었다. 그때는 그 노인의 영령이 누구신지 알 수가 없었는데, 또다시 그 노인의 영령이 나타나셨으니 꿈속일망정 반갑고 기뻤다.

그 노인이 나에게 글자를 받아쓰라고 하시므로 아래와 같은 글자를 받아썼으나 ○○ 6자는 다음 날 아침에 잊어버리고 말았다.

○○投石 ○○○○ 雖處亂世 今汝古汝(○○돌을 던지니, ○○○○, 비록난세에 처하였어도, 지금의 너는 옛날의 너로다)

위의 문장에서 투석(投石, 돌을 던짐) 2자를 해석해 보면 좋지 못할 의미일 것이요 수처난세(雖處亂世, 비록난세에 처하였어도)는 글자 그대로 해석하면 되나 금여고여(今汝古汝, 지금의 너는 옛날의 너로다)는 나에게 일러주는 말로서, 금아고아(今我古我, 지금의 나는 옛날의 나)로도 해석할 수 있었다. 옛날이나 지금이나 나는 죽지 않을 것이라는 의미로 해석하였다.

앞으로 화를 당할 우려는 없을 것이나 그렇다고 주의를 게을리 해서도 안 되겠기에 지리를 잘 알지도 못하는 곳에서 방황하는 것보다는 차라리 지리에 익숙한 곳으로 가서 은둔생활을 하는 것이 좋겠다는 생각으로 북쪽을 향해 갈 때는 무사하리라는 믿음에 자신감마저 넘쳤다.

어제 아침부터 내리던 보슬비가 오다 말다를 반복하면서 부지런한 사람은 일을 많이 할 만하였으나 게으른 사람은 비 온다는 핑계로 놀기 좋을 정도였다. 따라서 행인들은 발바닥에서 불이 붙을 정도로 빨리 걸었고 나도 발목이 시큰거릴 정도로 걸었다. 남은 여정을 알 수 없어서 힘도 들었으나 충남 땅을 밟고 보니 생기가 도는 듯하였다.

그러다가 보슬비가 폭우로 변하여 부득이 산골짜기에서 내려오는 시냇물을 가로지른 다리 밑으로 내려가 일단 비를 피하였다. 산골짜기에서 쏟아져 내려오던 물줄기는 이 바위 저 바위를 부딪치며 삽시간에 폭포를 이루었다. 은구슬처럼 부서진 하얀 물방울에 옷이 젖는 줄도 모르고 있다가 비가 개여서 길 위로 올라온 후에야 비로소 옷이 젖은 것을 느꼈다. 그러나 계곡의 물방울에 옷이 젖는 줄 알았다고 하더라도 폭우를 맞는 것보다는 나았기 때문에 아마도 다리 밑에서 비를 피하였을 것이다.

다리 아래에서 비를 피하다

촉석수여주쇄산(觸石水如珠碎散, 바위에 부딪쳐 구슬처럼 부서진 물방울)

망기완상습여의(忘機翫賞濕余衣, 넋 놓고 바라보다 내 옷만 젖었네)

▣ 피난중에도 인정은 변함이 없다

한국전쟁 당시 피난민의 짐보따리

7월 24일, 그럭저럭 금산군 복수면 학평리 복수교 다리 부근에 다다랐다. 그곳에서 홍성렬 군을 만나서 최영준 군의 소식을 물으니 처음에 서면 방면으로 간 것은 들어서 알고 있으나 그 후로는 모른다고 한다. 친구를 만나서 반가웠지만 무엇인가 잃어버린 것 같은 감상과 번뇌가 생겼다.

그렇게 얼마가지 않아서 오후가 되면서 배가 고팠지만 무엇이라도 사서 먹을 수도 없는 길을 걷다가 어느 곳에 이르니 주막이었다. 토방에 들어서서 막걸리 한잔에 야채 한 접시를 시켜서 먹고 나니 배가 불러 왔다.

당시에 술을 잘 먹지도 못했던 내가 주막에 들어서면서 막걸리 한잔을 청했던 그 상황을 지금 돌이켜 생각해보니 저절로 웃음이 난다. 어쨌거나 주렸던 창자에 맛 좋은 술이 들어가니 시장기를 면했기 때문이었는지 만사가 태평한 느낌이었다.

술기운에 불그레

면기욕입토방중(免飢慾入土房中, 배고픔 면하려고 들어간 토방에서)

산채야포주불공(山菜野匏酒不空, 산나물에 바가지 술잔 비웠네)

일이삼배요차취(一二三盃饒且醉, 석잔 술에 배부르고 또 취하니)

여수망각학평풍(旅愁忘却鶴坪風, 나그네 시름 잊으라고 학평에 바람이 분다)

우(又, 또)

치도복교통(馳到福橋通, 치달려 복수마을 다리에 도착하니)

염천일이중(炎天日已中, 뜨거운 날씨에 해는 벌써 중천일세)

난승기면백(難勝飢面白, 배고픔을 못 이겨 희던 얼굴이)

차주력이홍(借酒力而紅, 술기운 빌려 불그레하네)

이와 같이 시를 읊고 보니 거짓말을 하였다. 막걸리 한 잔도 다른 사람에비하면 반잔도 못되게 마시는 사람이 시에서는 1, 2, 3잔에 배부르고 취하였다고 하였으니 제법 술이나 잘 마시는 사람 같지 않은가?

주막에서 나와 얼마 걷지 않아서 길가에 서있던 읍직원 홍재명과 유도호 군 등 두 사람을 만났다. 직장동료이기도 하였지만 그 만남자체에서 표현할 수 없는 기쁨과 슬픔이 한꺼번에 가슴을 흔들며 솟아오르니 눈시울이 뜨거워졌다.

증기기관차

내 눈이 흐려지는 것을 알아챈 그들 역시 고개를 숙이고 있다가 ”저희가 이곳에 있는 것은 남하하는 길이 막혔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읍장님께서도 남하하는 길이 막히면 이 길로 오실 것 같아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이 동네에 조치원 사람들이 많이 있으니 같이 가시지요. 날이 저물었는데 마땅히 가실 곳도 없지 않습니까?”라고 한다. 그들의 뒤를 따라 가보니 수십여 명의 일행이 함께 있었다. 그들이 각자 가지고 있던 식품과 피난 중에 장만한 맛난 반찬으로 나를 대접해 주니 고마울 뿐만 아니라 미안하기 짝이 없었다.

洪·柳 兩 君을 만나서

희봉홍류석양명(喜逢洪柳夕陽明, 기쁨으로 홍,류 군을 만나니 석양빛이라)

일야공담사세성(一夜共談斯世聲, 하룻밤 함께 나누는 세상이야기)

표박순여무별사(漂泊旬餘無別事, 집 떠난 지 10여 일 간 무사했기에)

학평물색최다정(鶴坪物色最多情, 학평마을 분위기 정말 정겨워)

이튿날 7월 25일, 일행이 조치원으로 가자고 권하였으나 내 형편으로는 갈 수 없는 이유가 두 가지 있었다. 첫째, 조치원으로 간다고 해도 생명을 보장받을 수 없다는 것이요, 둘째는 노처 일행이 아직 도림리에 있는지 알고 싶었기 때문이었다. 앞으로 지리를 아는 곳에서 숨어서 생활하려면 노처와 같이 동행하는 것이 오히려 남의 눈에 거슬리지 않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든 까닭이었다.

여러 읍민에게 석별인사를 하고 걷다가 해가 저물 무렵에 삼거리를 만났다. 한 방향은 도림리로 가는 길이요, 다른 하나는 대전시 산성동으로 가는 길이요, 한 갈래는 내가 방금 온 길이었다. 길가 풀섶에 앉아서 잠깐 쉬고 있는데 지나가던 행인들이 나를 자세히 살펴보더니 되돌아 와서 하는 말이 “혹시 며칠 전에 도림리에 계셨던 고아원 원장 아니신가요?” 하고 묻는다.

갑자기 묻는 말에 의심이 일었으나 알고 묻는데 답하기를 망설여도 구차할 것 같아서 “그렇소.”하고 대답했다. 그러자 “원장께서 떠나던 날 어떤 괴한이 당신을 찾으러 왔다가 그냥 돌아갔습니다. 그리고 부인께서는 어제 산성동 강씨 댁으로 간다고 떠났고 고아들은 당신께서 전라도로 가셨다고 금명간 떠난다고 하였습니다. 좌우간 도림리로 지금 가시면 위험하니 산성동으로 가시지요.”라고 상세히 일러 준다. 그때는 어찌된 일인지 그 사람의 주소 성명을 물어 볼 용기도 없었다. 그날 통성명이라도 하고 수복 후에 감사의 편지라도 보내주었으면 얼마나 좋았을까?

이 글을 쓴 윤철원은 세종시 상하수도과장으로 지난 2017년 정년퇴임을 한 조치원 토박이다. 조치원읍장 재직 당시 세종시로 명칭이 변경되면서 전통과 역사에 대한 시민 의식이 부족한 점을 아쉬워하면서 지역문화 연구에 매진했다. 이후 세종시 향토사 연구위원으로 활동하면서 지역과 관련한 역사를 찾아내 후손들에게 전해주는 역할을 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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