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점심 먹으러 자리 뜬 사이 수류탄 터져 2명 즉사"
"점심 먹으러 자리 뜬 사이 수류탄 터져 2명 즉사"
  • 윤철원
  • 승인 2021.06.16 09:46
  • 댓글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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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철원칼럼, 세종시의 한국전쟁]한국전쟁 터진 직후 대전,조치원
피난민증 발급 관리, 늦장에 불만 터지자 아예 서류 뭉치 던져버려

6월은 호국보훈의 달이다. 그만큼 나라를 위한 희생은 숭고한 것이고 두고두고 그 희생을 후대들이 값지게 만들어야 한다는 얘기다. '한국전쟁' 당시 조치원을 비롯한 연기군 상황은 어떠했을까. 이곳 역시 전쟁의 참혹함에서 벗어날 수는 없었다. 그 실상은 '추운실기'에 잘 묘사돼 있다. 6월 전쟁과 관련한 부분을 발췌하고 번역해서 전쟁의 잔혹함을 전해보고자 한다. 여기에 나오는 1인칭 '나'는 추운실기 저자 맹의섭 선생이다. 참고로 지난 1월부터 연기군의 야사를 기록한 '추운실기'를 번역하고 있음을 밝힌다.

▣ 직무를 수행하다가 7월11일 피난길에 오르다.

7월 8일과 9일, 조치원 시내에서는 주민은 물론이고 그 많던 후퇴군경도 찾아 볼 수 없을 만큼 한산해졌다. 다만 헌병과 경찰관들만이 남아서 지역을 경계하고 있었다. 나는 군수물자를 운반하는 기관차에 수돗물을 공급하기 위해서 전공 2명, 수도계원 2명과 더불어 남아 있게 되었고, 군청에서는 군수와 산업과장 2명만 남아서 긴박한 상황을 유지하며 7월10일을 지냈다.

7월 11일, 북한군이 전동지역까지 침입하였다며 경찰서로 소집한다는 전갈이 왔다. 경찰서에 당도하니 나를 비롯한 공무원 7명과 경찰관들에게 3대의 트럭에 분승토록 했는데, 서로 먼저 출발하는 차에 타려고 실랑이를 벌이며 법석을 떨었다. 나는 경찰에게 “읍 창고에 백미 5가마니 남았으니 아무리 바빠도 가지고 가야 밥을 지어 먹을 것 아니오”라고 했지만 코웃음만 되돌아올 뿐 응하는 사람은 하나도 없었다.

출발하려는 마지막 차에 간신히 오르며 뒤를 돌아다보니 시내엔 개미새끼 한 마리도 보이지 않을 만큼 적막했다. “아! 인심은 참으로 냉정하다.” 하면서 나보다 먼저 서면지역으로 피난 떠난 늙은 아내와 자식들, 그리고 고아들을 생각하니 서글픈 생각에 눈물이 주르륵 흘렀다. 서면지역이라고 적군이 침입하지 않았을 리 없고, 그곳인들 평온할 리가 없다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었다.

그러던 중 차량은 어느 사이에 금남교를 지나 대평리에서 멈추었다. 그리고 인솔자로 보이는 사람이 내리라고 하더니 “지금부터는 각자 알아서 피난하라”며 해산을 선언하였다. 정신을 가다듬고 사방을 살펴보니 선발대로 출발했던 양정석 의용소방대장과 10여 명의 대원들이 보였다. 그들과 함께 걸어서 감성리에 도착한 시간은 오후 3시경이었다. 그곳에서 밥을 지어서 점심 겸 저녁을 먹은 후 하룻밤을 머물렀으나 밤새도록 들리는 폭음소리와 아내생각에 뜬 눈으로 밤을 지샜다.

피난 떠나 첫날밤을 지새며

단신피난도감성(單身避難到柑城, 홀로 피난하여 감성리에 도착하니)

철야암문총포성(徹夜暗聞銃砲聲, 밤새도록 총소리 대포소리만 들리네)

고혈노처무문처(孤孑老妻無問處, 늙은 아내는 잘 있는지 물을 곳 없으니)

유수전아고심정(有誰傳我苦心情, 나의 괴로운 심정을 누구에게 전할꼬)

다음 날 봉천(금남면 축산리)에 이르니 일행 중 몇 사람만 남았고 다른 일행은 보이지 않았다. 우리도 서둘러 탄동면으로 이동하여 면사무소에 들렀더니 면장이 어느 이장 댁에서 하루를 묵을 수 있도록 알선해 주었다.

봉천동에서 하루를 보내며

소풍탁족봉천변(遡風濯足鳳川邊, 바람 쐬며 발도 담근 봉천동 냇가에)

불각서정일모천(不覺敍情日暮天, 서정 느낄 새 없이 해가 기우네)

동행영락무심처(同行零落無尋處, 일행과 헤어진 뒤 갈 곳마저 없으니)

병란여파본시연(兵亂餘波本是然, 전쟁의 여파는 본래 이러하다네)

7월 13일, 탄동면을 출발하여 대전에 도착하였다. 사람들이 어쩔 줄 모르며 우왕좌왕 하는 분위기 속에서 해가 저물었다. 그날은 양정석 군이 잘 아는 친구 집을 찾아가 하룻밤 폐를 끼쳤다.

다음날, 대전 시내에서도 사람의 모습을 찾아보기 어려웠으나 관공서는 피난민증을 받으려는 사람들로 붐볐다. 시청 직원이 수많은 군중을 상대로 일일이 성명을 기입하고 피난민증을 발급하니 이를 기다리는 시민들의 불만이 고조되기 시작하였다. 시간이 갈수록 발급이 지체되자 “빨리빨리 발부하라”는 고함소리가 여기저기서 터져 나오면서 분위기가 험악해졌다. 시민들의 항의가 거칠어지자 나중에는 시청 직원들도 어쩔 수 없었는지 증명서용지를 선전삐라 뿌리듯 던져 버리고 말았다.

그 때쯤 대전역에서 마지막 열차가 부산 방면으로 출발한다는 소문이 돌았다. 나는 살아보겠다는 단순한 생각에 대전역으로 향하다가 문득 가족 일행의 안부도 모르면서 나만 살자고 부산으로 갈 수는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렇다고 다시 조치원으로 갈 수도 없는 상황이었기 때문에 길 옆에 서서 눈을 감고 잠시 고민하게 되었다. 자식은 젊으니까 어디를 가든지 살아 갈 수 있겠으나 노처가 걱정이었다. 자식의 효성이 지극하다고는 하지만 마음이 놓이지 않았다. 아내는 젊어서부터 항일투쟁하는 남편의 옥바라지로 세월을 보냈기 때문에 해방 후에는 내가 좀 더 진정과 사랑으로 아내를 보살피며 여생을 보내려고 다짐하였으나 뜻하지 않게 난리를 당한 것이었다. 전쟁이 터진 후에 가솔의 안전을 도모하려는 생각에 서면에 사는 친척 완영이의 집으로 가도록 하였지만 그래도 안심이 되지 않았다.

이런저런 생각에 나만 살자고 남행열차를 타려고 했던 생각이 부끄러워 후회를 하고 있는데, 뜻밖에도 안면 있는 조치원 사람이 피난 가던 길에 나를 보고는 “부인 소식은 들었습니까?”하고 묻는다. 내가 “소식을 몰라 궁금하다”고 하였더니 “어제 동면 나루를 건너는 것을 보았는데 그 뒤로는 저도 모릅니다.”하며 급하게 갈 길을 재촉하였다.

어제 동면 나루를 건넜으면 오늘쯤 대전역에 도착하리라는 계산으로 길가에 서서 오가는 사람들을 살펴보았으나 만날 수 없었다. 날이 저물어 주막이나 여관을 찾았으나 모두 영업을 하지 않아서 하룻밤도 지내기가 어려웠다.

때마침 어떤 사람의 소개로 대전시 인동에 있는 장로교회에 들어가 숙직실에서 하룻밤 지냈다. 아침과 저녁 식사는 그 교회 송병선 목사에게 은혜를 받았다. 15일 새벽부터 다시 길가에 나와 기다리니 조치원읍민 10여 명이 길을 가다 나를 보고 반갑게 하는 말이 “부인은 오늘 신탄진에 있는 도살장에서 하루 쉬고 내일 대전에 도착할 예정이라고 합니다.”하며 소식을 전해주고는 바로 떠났다.

▣ 아내와 식솔들을 만났다.

나의 마음은 조급해졌다. 오늘이 지나면 대전 시내에서 민간인은 구경도 못할 판인데 신탄진에서 하루를 머문다는 것은 말도 안 될 일이다. 급한 마음에 앞만 보고 정신없이 달려가다가 여러 사람 중에 낯익은 목소리가 들리기에 정신을 차려 고개를 들어보니 고아원 아이들 30여 명, 딸 가족 8명, 자식과 조카딸 귀례 등 40여 명이 무리를 지어 수레에 양곡과 취사도구를 가득 싣고 오는 것이 보였다.

그 중에 노처가 섞여 있음을 발견하고 먼저 노처 앞으로 가서 “여독은 없소?”하고 위로한 후 여러 일행에게 수고하였다고 하며 대전의 사정과 내가 신탄진으로 급히 가던 이유를 말해 주었다. 그러자 아내가 하는 말이 “당신에게 우리 사정을 말해준 일행 10여명과 신탄진에서 하루를 함께 지냈는데 그 사람들은 양식 걱정을 하지도 않더군요. 만일 그 사람들과 동행하다가는 그나마 가지고 있는 식량사정도 여의치 않을 것 같은 생각이 들어서 본의 아니게 하루를 더 묵고 떠난다고 한 것입니다. 그들이 급하다고 출발한 뒤에 시간차를 두고 우리 일행이 출발한 까닭에 지금 도착한 것”이라고 하였다.

그날이 7월 15일이었다. 마지막 남행열차가 서대전에서 출발한다는 소문에 서둘러 서대전역으로 갔으나 군용열차만 있을 뿐으로 민간인은 태워주지 않았다.

점심때가 되어서 동네 사위의 동생 집에 점심식사 준비를 부탁하였다. 우리 일행은 역 휴게실에서 기다리고 있다가 점심이 다되었다는 전갈을 듣고 집안으로 들어서는 순간 요란한 폭발음이 들렸다. 놀라서 돌아다보니 헌병이 허리에 차고 있던 수류탄이 오발하여 그 헌병과 옆에 있던 두 사람이 즉사하고 3명이 중경상을 입었다.

가만히 살펴보니 내가 앉았던 자리에 와서 앉았던 사람이 죽은 것이었다. 점심 먹으라는 말에 아슬아슬하게 그 자리를 떠나게 된 바람에 내가 비명횡사를 면했음을 알고 나서야 하나님의 보우하심에 감사기도를 올렸다.

금강 주변

서대전역에서 참변을 목격하다.

헌병요대수류탄(憲兵腰帶手榴彈, 헌병이 허리에 찬 수류탄이)

오발살인불인관(誤發殺人不忍觀, 오발하여 사람이 죽은 것 차마 못 보겠다)

모생피난난가사(謀生避亂難家事, 살자고 떠난 피난 가정사가 어려우니)

불피난난피난난(不避亂難避亂難, 피난을 안 하기도 피난하기도 어렵구나)

점심 식사를 마치고 가던 길을 재촉하니 대전시 산성동에 이르게 되었다. 40여 명의 식구가 지내려면 헛간이라도 얻어야 할 것 같아서 사방으로 알아보다가 고아원 원아들과 우리 가족은 강인주 군의 집을 얻어서 들어가게 되었다. 그러나 딸의 가족이 함께 할 수 있을 만한 공간이 부족해서 그 애들은 따로 방을 얻었다.

5일을 머무는 동안 강씨의 은덕이 컸다. 적군이 보문산을 포위하고 대전을 공격할 때는 대전 비행장에서도 집중적으로 응사하여 우리가 머물던 지붕 위로 총탄이 날아가는 것이 보였으며 포탄 터지는 소리에 잠시도 앉아 있지 못할 만큼 두려움에 떨었다.

다음날 아침 7월 20일, 교전을 피해 대덕군 어암동(도림리)에 도착하였다. 인가는 불과 5∼6채밖에 안 되는 산간벽지인데도 피난 온 사람으로 인산인해를 이루었다. 먼저 온 사람들이 노숙을 하는 판이니 우리 일행도 노숙할 수밖에 없어서 감나무 밑에 자리를 잡고 누웠다. 하늘에 뜬 반달이 온 세상을 밝게 비춰 주었으나 감나무 잎사귀에 맺힌 이슬이 얼굴에 떨어져 좀처럼 잠을 이루지 못하였다.

도림리에서 노숙하다

월백시원우차신(月白柿園寓此身, 달 밝은 밤에 감나무 아래 누우니)

락풍노적입오부(落風露滴入吾膚, 바람결에 젖은 이슬 살갗에 떨어지네)

오호이혐리가고(嗚呼已嫌離家苦, 아! 집 떠난 괴로움 벌써 싫은데)

하작막천석지인(何作幕天席地人, 어찌 천지를 이부자리 삼으려 하는가?)

이 글을 쓴 윤철원은 세종시 상하수도과장으로 지난 2017년 정년퇴임을 한 조치원 토박이다. 조치원읍장 재직 당시 세종시로 명칭이 변경되면서 전통과 역사에 대한 시민 의식이 부족한 점을 아쉬워하면서 지역문화 연구에 매진했다. 이후 세종시 향토사 연구위원으로 활동하면서 지역과 관련한 역사를 찾아내 후손들에게 전해주는 역할을 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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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종시민 2021-06-16 19:10:12
잘 보고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