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덕고개'는 세종 물줄기 가르는 '수분령'
'덕고개'는 세종 물줄기 가르는 '수분령'
  • 임비호
  • 승인 2021.02.15 11:02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임비호칼럼] 조천(鳥川)의 인문학 탐사<상>... 조천에서 바라본 풍경들
'왕의 물', '전의 금불초' 등 조천 따라 흐르는 인간 삶의 흔적들 다양해
다방리 도로에서 본 조천 발원지 덜골계곡 전경, 원 안이 하류샘 추정 사진

얼마 전 삶꽃 공동체라는 모임에서 조천의 인문학이란 주제로 강의를 해달라는 요청을 받았다. 하천을 중심으로 세종시 생태와 역사문화를 함께 알아보면 재미있겟다라는 생각으로 수락하고 이런 저런 정리를 해 보았다. 낮선 주제였지만 산자분수령이라는 한국 전통 지리 사상을 중심으로 강의하고 토론하는 과정 속에서 새로운 모습들을 발견할 수 있는 좋은 시간이었다.

조천의 인문학은 하천을 중심으로 살은 사람들의 흔적이다

조천 인문학은 조천의 유역 면적이 그 대상이다. 유역이란 하천을 중심으로 인근 사람 거주하고, 경제 생활을 하는 논과 밭 그리고 길을 포함하는 것이다. 자연과 관계를 맺으며 거주하고, 이용하고, 활용한 결과의 기록들이 결국 조천의 인문학이 되는 것이다.

세종시 지방 1급 하천인 조천은 세종시 북부에서 발원한 금강수계 미호천 지류하천이다. 전의 다방리에서 갈마봉 샘에서 시작하여 전의 읍내를 지나 전동 개미고개를 빠저나간다. 지프네에 머물다 병마산과 조형아파트를 지나 청주와 조치원을 경계하면서 번암리 쌍용제지 뒤에서 미호천을 만나게 된다. 유로연장(流路延長)이 30㎞, 하천연장이 14.3㎞, 유역면적이 136.21㎢이다. 조천의 인문학을 위해서는 먼저 조천 유역의 자연지리의 특징을 살펴봐야 할 것이다.

연기군 시절 전의면과 소정면 일부는 전화 지역번호가 달랐고, 충남인 조치원과 충북인 오송은 전화 지역번호가 같았다

금강의 발원지는 장수군 뜸봉샘이라하고 미호천의 발원지는 마이산이라 하듯 세종시는 2017년 초천 발원지를 전의면 다방리 갈마봉 덕골의 하류샘으로 선정했다. 발원지는 하천의 하구에서 가장 먼 유로의 샘을 일반적으로 선정하는데, 갈마봉 덕골이 그에 해당한다. 발원지 선정의 의미는 이를 선정함으로 그 하천의 원줄기를 파악할 수 있다는 것이다.

세종과 청주시를 가르는 중봉리 다리, 자연하천이 아니어서 하상이 주변 지역보다 높은 천정천으로 조치원 평리보다 높다.

조천의 원줄기는 주변의 실핏줄 같은 크고 작은 개천들이 합쳐지면서 점점 커지게 된다. 조천의 상류에 해당하는 전의 지역에는 금사리 국사봉, 유천리의 등고개, 고등리의 고려산, 전동면의 동림산 등이 있어 그곳에서도 발원지는 아니지만 나름 발원한 물들이 내를 이루며 조천과 합류를 한다.

특이한 점은 전의면 서부쪽 조천의 발원지가 되는 산줄기들은 동쪽으로 흐르는 물은 금강으로 흐르게 되고, 서쪽으로 흐르는 물줄기는 천안 아산을 거처 삽교천으로 흐르는 모양을 갖게 된다. 옛날 조상들은 강과 강을 가르는 산줄기를 정맥이라 하였는데 이곳이 그에 해당하는 곳이다. 전의 읍내에서 천안으로 빠지는 곳에 있는 덕고개는 우리 세종지역에서 물을 가르는 대표적인 수분령이 되는 것이다.

수분령는 단지 물만 가르는 기능만 한 것이 아니라 사람들의 생활 조건과 문화도 다르게 하는 기능을 가지고 있다. 그 예로 들 수 있는 것이 연기군 시절 같은 행정구역이었던 전의와 소정면이 전화번호 앞자리가 달랐다는 것이다. 전의는 865-, 964, 62-로 시작하는 번호를 사용했고, 소정면은 천안아산과 같은 5**으로 시작하는 전화를 사용했다. 즉 소정면 일부는 천안 영향권 전화국 회선을 사용하고 전의는 연기군 영향권 전화 회선을 사용했다는 것이다. 반면 행정구역이 다른 조치원과 오송은 같은 전화번호를 사용했다.

전의지역 금불초가 지표식물이었다면 여기에 걸맞게 묘목산업이 번창하고 있다.

왕의 초수 주변에는 왜 생수 공장이 많을까?

왕의 초수가 있는 전의면 고등리 일대에는 유난히 생수 공장이 많다. 소정면이란 지명의 유래도 작은 우물이란 뜻이다. 고려산성이 있을 정도의 고지대이면서 물이 많다는 것은 지하 암반 지각에 틈이 있다는 것이고, 지반 밑에 물이 모이는 장소라는 말이다.

강의 상류이면서 물이 많다는 것은 선사시대부터 사람이 모여 살 수 있는 조건이 된다. 물이 생명이기에 강에 내려가지 않아도 물을 얻을 수 있다면 사람이 살기에 최적의 조건이 될 수 있는 것이다. 전의 일대는 산이 방어선을 하고, 가운데 조천이 흐르는 분지 형태의 모습을 하고 있다. 하여 삼국시대 이전부터 사람이 살았고, 구지현이라 불리다가 금지현으로 바뀌고 고려시대 이후 전의현의로 바뀌게 된다. 이는 선사시대부터 부족 단위의 공동체를 이루고 살았음을 알 수 있다.

전의 금불초를 보셨나요?

전의 금불초는 전의 지역에서 발견하여 그 이름을 전의 금불초라 하였다 한다. 이는 전의 지역이 다른 지역과는 차별되는 톡득한 기후, 지형이 있다는 말과도 같다. 생물의 분류 단위에서 그 생물의 고유한 정체성을 나타내는 기준이 종(種, species)이다.

전의 금불초가 전의 지역의 생태환경을 나타내는 지표가 된다면 이와 연동해서 생각할 수 있는 것이 전의 묘목 농업이 아닐까 한다. 전의의 나무 묘목이 다른 지역보다 우월한 경쟁력을 가질 수 있는 것은 씨앗에서 싹을 틔우는 기술과 다른 지역에 옮겨 심어도 잘 자라는 것이라 한다. 전의 지역은 험한 산지는 아니지만 비교적 산지 지역으로 다른 지역보다 온도가 낮고, 분지 지형이라 외부의 찬 바람을 막아준다. 조경수는 주로 평지에 심기에 전의 묘목은 기후에 경쟁력이 있는 것이고, 이런 묘목을 키울 수 있는 조건으로 바람을 막아주는 분지 형태이기에 가능한 것이다.

조천과 미호천의 합수지역

조천은 개미고개 협곡을 흐른다

조천은 전의 지역 산줄기에서 발원한 물들이 모여 개미고개 협곡을 빠져나간다. 이곳은 금이산성, 이성이 있는 산줄기의 끝자락과 운주산의 산줄기 끝자락이 만나 협곡 같은 지형을 이룬다. 이곳에 철도 경부선과 1번 국도가 놓여 있다.

영화나 소설의 주요 전투 장면이 주로 협곡에서 이루어지는데 방어하는 사람에게는 유리하고 공격하는 사람에게는 꼭 지나가야 하는 필연적인 장소이다. 6.25 전쟁 때 개미 고개에서 왜 결렬한 전투가 있었는지 이런 조천이 만든 협곡 지형이란 전제를 두면 실감나게 이해 될 수 있다. 협곡이면서, 철도와 국도가 지나가는 지형이 바로 개미 고개 인 것이다. 옛날에는 이곳을 귀신 고개라고 불렀다고 하던데 이를 군사적 요충지라는 관점에서 보면 긍정이 된다.

중봉리 다리 강 바닥이 조치원 시내보다 높다구요?

중봉리 다리는 조천을 사이에 두고 조치원과 오송을 잇는 이름이다. 이 다리는 일제 강점기 조천의 물줄기를 바뀌는 과정에서 놓여졌다. 원래의 조천 물줄기가 아니라 인공적으로 제방을 쌓아 된 하천이다. 조치원역이 생기고 도시 정비를 하는 과정에서 그 필요성에 의해서 만들어진 것이다. 하여 조치원 지역을 흐르는 조천은 청전천(天井川: 하천바닥이 부근의 평야 면보다 높아져 있는 하천)을 이룬다. 이런 하천의 특징은 심한 폭우가 쏱아지면 쉽게 물이 불어 인근 평지 마을에 물난리를 나게 할 수 있다. 필자의 기억에도 80년, 87년, 90년 초반에 조천 제방이 넘칠려고 하여 보강 작업을 하였던 것으로 안다.

조천 제방을 쌓으면서 생겨난 마을이 있다. 일명 뗏집거리이다. 이 마을은 제방을 쌓으면서 소유권이 불분명한 제방 아래 새로운 삶터를 찾는 사람들이나 거주지를 잃은 사람들이 떼(흙을 잡고 있는 띠풀)로 움막같은 집을 짓고 살은 마을이다. 지금은 그 자취가 사라졌지만 이름은 거다란 표지석으로 남아있다.

벚꽃 핀 조천 끝자락에서 소로리 볍씨를 상상한다

농경문화를 알려주는 청주 소로리 볍씨 조형물, 행정구역이 청주시와 세종시로 나눠지기 전에는 조천 생활권이었다.

조천은 번암리 쌍용제지 뒤에서 미호천과 합친다. 봄에는 벚꽃이 흐드러지게 피어 있어 훈훈하고, 여름에는 연꽃 공원이 자태를 한껏 자랑하고 겨울에는 많은 철새들이 모여 있는 곳이다.

필자는 이곳에서 세계 최초의 농경문화라고 하는 소로리 볍씨를 생각한다. 조치원에서 오송을 지나 10여 리 가면 세계 최초 농경문화의 흔적이 있는 소로리 탄화볍씨 유적이 있고, 그 옆에는 마한 시대 토성이라는 정북 토성이 있다.

청주시와 세종시가 행정적으로 구별되기 이전의 선사시대에는 이곳과 조천은 거의 같은 생활권이라 할 수 있다. 이곳의 의미는 인간이 정착 생활을 했다는 최초의 유적이기 때문이다.

세계적인 자부심을 가질 수 있는 문화유산이다. 인간 정착 문명의 첫 시작이 이곳 임을 알리는 지표인 셈이다. 우리가 살고 있는 이 땅이 바로 그런 곳이란 것이다.

옛날부터 사람이 살았다는 의미는 사람이 살기에 아주 좋다는 말과 통한다. 외부의 사람들로부터 침입을 막아주고 물산이 풍부하여 사람의 인심이 좋은 곳이란 의미도 내포하고 있다. 우리가 사는 동네가 말이다.

   
 

임비호, 조치원 출생, 국제뇌교육과학대학원 지구경영학 박사과정, 세종 YMCA시민환경분과위원장(현), (전)세종생태도시시민협의회 집행위원장, (전)세종시 환경정책위원, (전)금강청 금강수계자문위원, 푸른세종21실천협의회 사무처장(전), 연기사랑청년회장(전),이메일 : bibo10@hanmail.net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