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치원 만세운동, 청년들이 분연히 일어섰다
조치원 만세운동, 청년들이 분연히 일어섰다
  • 윤철원
  • 승인 2020.12.15 13:43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세종시 독립운동]<하-2>연기청년회, 지방 최초 청년조직
활발했던 활동, 무능한 회장으로 유야무야, 안타까움 더해

일제에 나라를 빼앗긴 조선에서 부당한 합병에 항의하는 민초들의 시위가 요원의 들불처럼 전국에서 일어났다. 이런 가운데 세종도 예외는 아니었다. 지난 2012년 출범한 세종시 역사는 일천하지만 연기군 시절부터 면면을 이어온 지역의 역사는 유구하다. 그리고 독립운동을 위해 분연히 생을 던진 투사들도 많이 나왔고 그들의 활약이 오늘의 행정수도 세종으로 이어지게 됐다. 우리 지역의 독립운동 역사를 윤철원 연기향토연구원을 통해 3회에 걸쳐 연재한다./편집자 씀

연기청년회가 있었던 곳으로 추정되는 곳, 현 조치원읍 명동초등학교 부지 내에 있다.
연기청년회가 있었던 곳으로 추정되는 곳, 현 조치원읍 명동초등학교 부지 내에 있다.

연기청년회는 1918년 3월1일 조치원 지역에 거주하는 청년들이 중심이 되어 일제의 강압적인 식민지 정책에 항거했던 단체이다. 당초 1917년 결성코자 하였으나 일경의 방해로 뜻을 이루지 못하다가 당시 고희준 연기군수의 도움을 받아 1918년 청년회를 조직하는데 성공하였다.

연기청년회는 그 당시 서울의 조선기독교청년회(1914년 4월)를 제외한다면 지방 단위에서는 전국 최초로 조직된 청년단체인 것이다.

설립 목적은 “회원 간 친목을 돈후히 하고 미풍을 장려하며 품성을 도야하여 인격을 향상”시키는데 두고 많은 활동을 하였다. 특히 1919년 조치원지역의 3.1만세 운동에 적극적으로 참여하여 많은 활약을 하였다.

연기청년회 초대회장이었던 맹의섭은 연기군민 대표 자격으로 1919년 3월3일 고종황제의 인산(장례식)에 참여하기 위하여 김재형, 이은식, 전병수 등과 2월19일 상경하였다. 그리고 3월1일 탑골공원현장에서 독립선언서가 선포되는 전 과정을 목격하고 시가행진에도 참여한 후에 조치원으로 귀향하면서 함께 상경했던 회원3인과 더불어 조치원에서도 독립만세 운동을 전개하자는 데 뜻을 모았다.

이후 시강원 주사로 고종황제를 모시다가 황제께서 부당하게 폐위 당하는 것에 분개하여 낙향·은거하던 서면 신대리의 홍일섭 선생을 모시고 연기청년회원과 더불어 조치원 독립만세 운동을 계획하였다.

3월23일 조치원을 중심으로 인근 지역과 함께 횃불만세 운동을 전개하였는데 이는 전국 최초의 ‘도계 마을간 연합횃불시위’라는 평가를 받고 있다. 특히 3. 30. 조치원 시장에서 전개된 장터시위에서는 연기청년회원들의 사전준비와 당일 만세 유도 등의 활약으로 수천 명(일제추산 1,500명)이 참여하는 대규모시위로 이끌었다.

이와 같은 연기청년회의 활동이 연기군내 각 면의 청년들에게 알려지면서 회원으로 가입하겠다는 입회신청이 넘쳐나기에 이르렀고 전부 수용할 수가 없어 각 면에 지회를 설치하기에 이르렀다.

청년회 규모가 커지자 1921년 제2대회장에 선출된 김원근( 현 청주 청석학원설립자)을 비롯한 간부들이 주축이 되어 1921년 10월에 회관 신축을 추진하였다. 그러한 노력이 결실을 맺어 1922년 1월 중순에 44평 규모의 회관이 준공되었는데 총 6,000여 원의 사업비가 소요되었다.

연기청년회 초대 회장 맹의섭과 2대 김원근(사진 왼쪽부터)
연기청년회 초대 회장 맹의섭과 2대 김원근(사진 왼쪽부터)

이렇게 잘 운영되던 연기청년회는 제3대회장으로 선출된 이중철이 선거공약(회관 건축부채 상환)을 이행하지 않음에 따라 회원들의 신임을 잃고 리더십이 약화되면서 유야무야한 운영을 하게 되었다.

이러한 지경에 놓이자 제2대 회장을 지낸 김원근이 부채를 정리하기로 결단하여 채무문제는 해결을 보았으나 연기청년회는 응집력을 잃고 말았다.

이후 회원들의 이탈로 방치되다시피 한 청년회관을 맹의섭과 뜻있는 청년회원들이 주도하여 무산아동을 위한 배움의 터전으로 활용하였다.

이들은 1924년 4월 『연기청년학원』이라는 명칭으로 1년제 학술 강습소로 허가받아 2년간 운영하였고, 1926년에는 4년제 학원으로, 1934년에는 6년제 학원으로 변경허가를 받아 운영하다가 1945년 3월 일제의 강압으로 폐쇄하였다.

연기청년회가 가장 활발하게 운영된 것은 1918년 3월∼1922년 3월까지 약 4년간이다. 이 기간 동안 조치원에서 전개된 3.1독립만세 운동을 주도함으로써 지역청년에게 항일의식을 고취하는 역할을 하였다.

이후 무책임하고 무능한 회장으로 인하여 그 역할이 중단되었으나, 연기청년회관이 26년간 무산아동을 위한 배움의 터전으로 활용됨으로써 일제 강점기 조치원지역 국민계몽에 기여한바 크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이 글을 쓴 윤철원은 세종시 상하수도과장으로 지난 2017년 정년퇴임을 한 조치원 토박이다. 조치원읍장 재직 당시 세종시로 명칭이 변경되면서 전통과 역사에 대한 시민 의식이 부족한 점을 아쉬워하면서 지역문화 연구에 매진했다. 이후 세종시 향토사 연구위원으로 활동하면서 지역과 관련한 역사를 찾아내 후손들에게 전해주는 역할을 하고 있다.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