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들 잡이로 영험한 상봉산
아들 잡이로 영험한 상봉산
  • 임영수
  • 승인 2013.04.23 14:30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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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영수의 세종을 만나다]장기면으로 편입되었던 제천리

   양산제
제천리는 백제시대에 웅천에 속하였다. 통일신라시대에는 웅주에 속했으며 고려시대에는 공주목에 속하였다. 조선시대에도 공주목에 속하였으며 조선말엽에는 공주군 삼기면의 지역으로 앞에 흐르는 긴 내가 있으므로 진내, 진해 또는 제천이라 하였다.

1914년 행정구역 개편 때 월현리(月峴里), 당동(唐洞)의 각 일부와 연기군 남면의 월현리(月峴里), 소지리(所地里), 제천(濟川)의 일부를 병합하여 제천리라고 하여 공주시 장기면에 편입시켰다.

아빠 : 이제 세종시의 마지막 마을인 것 같다.
우리 연기군은 아니지만 제천리가 어떤 곳인가 알려줄 테니 잘 들어 보아라.

재영 : 아빠와 답사 떠나고 많은 이야기를 들었는데 마지막이라고 하니 아쉽네요. 우선 마을 소개 먼저 해 주세요.

아빠 : 제천리에서 평기리로 넘어가는 고개를 ‘가파니 고개’라고 부르지. 이 고개는 이 주변에서 가장 가파르기 때문에 붙여진 이름이야.

음지말 백호쪽 산 위에는 산제당이 있어. 현재에는 음력 11월 1일에 마을 주민이 모인 가운데 제를 올리고 있는데 마을에 큰일이 일어나면 주민들이 정성을 다하여 산제를 올리고 있지.

양지마을 뒤에 있는 산을 ‘상봉산(上峰山)’이라고 부르지. 이곳 산은 영험한 기운을 가지고 있어. 이 산에서 아들을 못 가진 아낙네들이 정성을 다하여 기도를 드리면 아들을 얻는다고 전해오지.

   임목의 묘
제천리 양달쪽에 ‘양지말’이라 불리는 마을이 있어. 어느 마을이든 양지바른 곳에 마을이 있으면 ‘양지마을’이라고 부르는 곳이 많지. 반대로 건너 마을은 ‘음지마을’이 되는 것이고.

상봉산 서쪽을 ‘줄박골’이라 부르고 있어. 옛날에 돌무더기가 일렬로 줄줄이 늘어서 있어서 ‘줄박골’이라 불렀으며 지금도 그 자취를 찾아 볼 수 있지. 그 옆에는 주락골이라 부르는데 이는 돌무더기가 떨어져 나와 그 형상이 마치 사람이 서 있는 모습과 같다하여 ‘주락골’이라 부르지.

양골 동쪽을 ‘진해’라 부르는데 이는 임진왜란 당시 다른 마을을 지나쳐간 왜군이 유독 이 마을은 지나가면서 아무것도 건드리지 않고 지나갔다 하여 ‘진해’라 부르지.

‘다파니 고개’가 있는데 그 뜻은 ‘다판다’라는 소리에서 유래되었어. 현재 이곳의 흙을 파서 다른 곳으로 나르고 있으니 조만간 이 흙이 다 파이게 된다는데 고개 이름이 붙여졌어.

‘양미골’ 이라는 마을은 양양도호부사를 지냈던 임목의 산소가 있는 마을을 가리켜 ‘양미골’이라 부르고 있지.

아카시아나무가 무성한 마을을 ‘각시골’ 혹은 ‘가서골’이라 부르지. 아카시아나무에 달린 가시를 따서 ‘가시골’이라 부르다 변형된 거야. 이 마을 남서쪽의 산을 ‘양양산(襄陽山)’이라 부르는데 양양도호부사를 지냈던 임목(林穆)의 산소가 있다하여 붙여진 이름이지. 이곳에 있는 사당을 ‘양산제’라고 부른 것도 바로 거기에 있어.

재영 : 독락정을 지으신 분이 바로 임목이시지요?

아빠 : 그래. 임목은 전서공 임난수의 둘째아들로 48세에 생원, 진사, 양시에 급제하여 평양서윤, 함주통판, 홍주판관을 지냈으며 양양도호부사로 나가 선정을 베푸니 고을에서 청덕선정비를 세워주었지. 1448년 11월 1일 돌아가시니 이곳에 모신거야.

   임손의 묘
임목의 묘소 아래에는 내시별감(內侍別監)을 지낸 임손(林蓀)의 묘도 있고, 임손의 아들 임중(林重, ? ~1508)의 묘도 있지. 임중은 양녕대군의 딸을 아내로 맞이하신 분으로 벼슬은 장락원정(掌樂院正)을 지내셨어.

재영 : 예전에 월양동에 정자가 있었다는데 그 내용에 대하여 알고 계신가요?

아빠 : 만송정(晩松亭)이라는 정자가 있었지. 만송정은 1900년대 간송 임호철(澗松 林浩喆)이 건립한 정자야. 간송 임호철은 1873년 10월 1일 태어났으며 어려서부터 독서를 좋아하여 글을 읽다 글의 뜻을 이해하지 못하는 곳이 있으면 그 뜻이 풀릴 때까지 집요하게 연구하여 학문을 익히는 분으로 전간제(田艮齊) 문하생이었어. 부모 섬김에 지극히 성의와 공경을 다하였으며 부모님이 돌아가시자 제사에 임하여 목욕재계하고 새벽에 가묘(家廟)에 배알하고 삭망(朔望)으로 묘소를 배알하되 종신토록 폐하지 않았어. 금강가에 있는 독락정을 바라보며 깊은 관심을 보이더니 집 앞 느티나무 아래에 만송정이란 정자를 지어 밤낮으로 글을 읽으니 주변 마을에는 도둑이 들었으나 이곳은 간송 선생의 글 읽는 소리에 도둑이 멀리했다 했어. 또한 이곳 정자에서 주변의 학동을 모아 놓고 글을 가르치니 많은 이들에게 칭송을 들었지.

1910년 일본의 침략으로 나라를 빼앗기자 선생은 좋은 옷을 입지 않고 베옷과 짚신으로 생활하였으며 1918년 국상을 당하자 북쪽으로 무릎을 꿇고 통곡하며 3년 동안 상중 생활을 하였지. 일본이 단발령을 내리자 머리를 깎지 않고 일제에 저항하였으며 붙잡혀 옥에 갇혀 곤욕을 치렀으나 두려운 기색 없이 곧은 말씨로 대항하니 일본인들도 의롭게 여기고 즉시 석방하였어. 1949년 12월 17일 77세의 일기로 생을 마감하였는데 돌아가신 다음해 6․25 전쟁이 일어나고 북괴군의 폭격으로 만송정이 불타버리고 말았어.

재영 : 전쟁은 많은 것을 파괴 한 것 같아요.

   제천리
이렇게 훌륭한 정자를 불태우고 안타까워요.

아빠 : 그러니 전쟁이 다시는 일어나지 않도록 해야겠지.

자, 이렇게 해서 행정중심 복합도시가 들어서는 마을을 모두 돌아보았는데 재영이는 무엇을 느꼈지?

재영 : 이곳이 대한민국의 중심지로서 주목을 받는 것은 좋은데 왠지 조상 대대로 지켜오던 문화유산이 사라진다는 것이 안타까워요.

아빠 : 물론 새로운 도시를 건립할 때는 많은 것이 파괴되겠지만 반면 건설자가 관심을 가지고 노력하면 많은 문화유산을 잘 살려 조화롭게 건설하는 것이 중요한 과제였는데 아빠와 같이 답사하면서 기억에 남는 곳이 무엇이지?

재영 : 우리 시조 할아버지인 임난수 장군이 살으셨던 곳에 600년 된 은행나무 그리고 매일 전월산에 올라 고려를 생각했던 용천, 상려암, 부왕봉이 생각이 나요. 그리고 금강변의 독락정 그리고 괴화산의 산신제 등 마을 제당이 생각이 나고요. 또 고정리에 있는 어서각과 종촌리의 초려 선생 묘소, 갈운리의 할아버지 장승 등이 눈에 선해요.

   만송정 관련 문서

아빠 : 재영이가 그림을 잘 그리니 답사 한 곳의 모습을 그림으로 그려 보렴. 그러면 더욱 오랫동안 기억에 남을 것이야.

행정중심 복합도시가 우리 연기군 남면, 금남면, 동면 일대에 건설되고 있으며 이를 세종시라 이름을 지었는데 이는 공교롭게도 건설되는 지역이 세종대왕과 연관된 유적이 많아서 마치 이곳이 세종대왕의 이름을 넣어 지은 것이 당연하다는 느낌이 들 정도이지.

이는 연기군 안에 세종시가 들어있다는 뜻으로 군민들이 열망하는 통합시가 되는 여건이 마련된 것이겠지.세종시 답사는 세종시가 건립되더라도 이곳에 존재하였던 문화유적지를 최대한 보존하도록 하는 바람과 연기군과 세종시가 하나라는 의미를 나타내기 위해서이지.

시간이 많이 흐른 뒤 재영이가 커서 이곳에 다시 왔을 때 변한 모습을 보고 과연 무엇을 느낄까.

     
임영수, 연기 출생, 연기 향토박물관장,국립민속박물관 전통놀이 지도강사, 국사편찬위원회 조사위원, 이메일: ghmuseum@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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