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죽을지언정 어찌 일본 오랑캐에게 세금을 내랴"
"죽을지언정 어찌 일본 오랑캐에게 세금을 내랴"
  • 윤철원
  • 승인 2020.12.05 14: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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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종시 독립운동]<하-1> 항일로 번진 민적 및 납세거부 운동
옥고겪으면서도 오랑캐 일제에는 세금 한푼도 낼 수 없다 저항

일제에 나라를 빼앗긴 조선에서 부당한 합병에 항의하는 민초들의 시위가 요원의 들불처럼 전국에서 일어났다. 이런 가운데 세종도 예외는 아니었다. 지난 2012년 출범한 세종시 역사는 일천하지만 연기군 시절부터 면면을 이어온 지역의 역사는 유구하다. 그리고 독립운동을 위해 분연히 생을 던진 투사들도 많이 나왔고 그들의 활약이 오늘의 행정수도 세종으로 이어지게 됐다. 우리 지역의 독립운동 역사를 윤철원 연기향토연구원을 통해 3회에 걸쳐 연재한다./편집자 씀

일제는 1909년 가옥세법·주세법·연초세법에 이어 국세징수법을 제정하고 민적법을 공포하여 실질적인 식민지 지배체제를 확립하였다. 또한 1911년 조선교육령을 발표하여 교육의 목적을 “교육에 관한 칙령에 입각하여 충량한 국민을 육성하는 것을 본의로 한다”고 제시하며, 보통학교에서 국어교육으로 일본어를 가르치도록 규정하였다.

이러한 일제의 동화정책이 시행되자 유림은 일제가 요구하는 세금을 거부하며, 민적(戶籍)에 등록하기를 완강히 거부하는 양상으로 나타났다. 당시 유림은 일본 정부에 세금을 내거나 그 호적에 등록된다는 것은 곧 그 백성이 되는 것을 의미하는 것으로 인식하였으며, 불사이군(不事二君)의 충절의리에서도 허용되지 않을 뿐더러, 이민족의 지배를 받는 백성이라는 것은 노예를 의미하는 것으로 받아들였다.

더구나 1910년 합방직후부터 토지조사사업을 본격적으로 시작하여 1918년에 마침으로써 기본적 재산권을 약탈당하게 되어서도 유림의 지사들은 일제의 지배를 거부하는 항거를 계속하였다. 또한 교육제도에서 전통의 서당·서원·향교의 교육기관이 폐지되고 총독부에 의해 설립된 신제학교(新制學校)는 유교교육을 배제하고 있을 뿐만 아니라 일제의 식민지 백성으로 길들이는 것으로써 민족전통을 단절케 하려는 것이라는 점을 간파하고 있었다. 이와 같은 분위기 속에서 세종시 지역에서도 일제의 동화정책에 저항한 인사들이 많이 있었을 것이나 그중 대표적인 사례를 소개한다.

▣ 연동면 장재학, 장재규, 장화진 가문의 저항

연기군 동면 예양리에 거주했던 장재학과 장재규는 형제간이고, 장화진은 장재학의 아들이다. 이들은 일제가 추진하는 민적(民籍)신고에 불응하고 세금납부를 거부하여 탄압을 받았다.

장재학, 장재규, 장화진 선생<사진 왼쪽부터> 출처 : 보훈처 공훈전자사료관

유림이었던 장재학은 1910년 나라가 일제에 병탄되자 통탄해 마지않았다. 일제에 의해 제정된 민적법이 시행되자 1915년 3월 12일 조치원 헌병 분견소 소속 헌병 야나기사와 도지로[柳澤藤次郞]가 민적 정리를 위하여 동소에 비치된 민적부(民籍簿)를 가지고 민적 조사를 시행하자 “지금 시행되는 민적은 떳떳한 국민의 본의가 아니다. 내가 책을 읽고 학문을 하는 것은 본래 나라를 돌보고 백성을 사랑하기 위함이거늘, 오히려 일본 오랑캐의 백성이 되고자 할 것 같으냐?”라며 꾸짖으면서 자기 호적을 찢어 불태웠다. 장재학은 이 일로 일본 헌병에 체포되어 조치원 헌병대에서 20여 일간 고문을 당했으나 끝내 굴복하지 않았다. 이후 공주 형무소로 이감되어 한 달여 동안 고문과 회유를 당했으나 뜻을 굽히지 않다가 경성형무소로 이감되어 재판에서 1년 실형을 선고받았다.경암 장재학 선생 의열비(연동면 예양1리)

복역 중에는 접시를 깨 자결을 시도하기도 하였으나 실패하여 더욱 심한 감시를 받았으며 형무소 규칙을 어겼다고 5개월의 형기연장을 통보 받았다. 이에 장재학은 “너희가 우리 국모를 시해하고 황제폐하를 능욕하며 나라를 빼앗았으니 너희는 우리민족과 한 하늘아래에 함께할 수 없는 원수이거늘 어찌 너희 백성이 될 것인가? 이미 너희 백성이 아닐진대 어찌 너희 법의 다스림을 받으리오?”라며 다시 자결을 기도하여 인사불성으로 사경을 헤매었다. 이에 형무소 관계자들이 놀라 미음과 우유를 주었으나 거부하며 일체 먹지 않자 기계로 입을 벌려 억지로 떠먹여 목숨을 보존하다가 1년 후에 석방되었다.

집에 돌아와서는 “나는 한국인이고 내 땅도 한국 땅인데 차라리 죽을지언정 어찌 일본 오랑캐에게 세금을 내랴!”하며 일체 납세를 거부하였다. 이에 일제는 재산압류 등으로 세금을 거두어 갔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려 2005년에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하였다.

1916년 겨울에는 일본헌병 무리가 들이닥쳐 보안법을 위반하였다며 장재학과 동생 장재규를 체포하여 형 장재학은 전라남도 고흥군 거금도로, 동생 장재학은 완도군 소완도로 유배시켰다. 장재학은 거금도에서 유배당하는 동안 일체의 우편물을 수취거절하였다. 일제는 우편법 위반이라며 순천형무소에 이감하고 태형에 처한 후 벌금 19원을 부과함과 동시에 유배를 1년 더 연장하였다.

장재규는 형 장재학 보다 20세 연하였다. 그는 형과 더불어 일제에 납세거부는 물론이고 민적에 등재되는 것도 거부하였다. 또한 일본제품은 일체 사용하지 않았으며 심지어 기차나 자동차도 이용하지 않을 정도로 일제에 저항하였다. 장재규는 형 장재학이 경성형무소에 수감되었을 때 걸어서 서울까지 10여 차례나 면회를 갔으나 번번히 거절당하자 옥중의 형에게 다음과 같은 한시를 보내 일제로부터 더욱 심한 탄압을 당하였다.

산하이역계무전(山河移易計無田, 빼앗긴 나라에 경영할 농토도 없으니)

불사유민매포차(不死遺民每抱羞, 나라 잃은 백성 죽지 못함이 늘 부끄러워라)

두상증림한일월(頭上曾臨韓日月, 머리 위 뜬 해와 달은 이 나라를 비추나)

피중상유노춘추(彼中尙有魯春秋, 그 중에 공자의 윤리는 남아 있는가)

단심래변진정곡(丹心來辨秦庭哭, 감옥 벽에 기대어 내 진정 울부짖으며)

백발향사초택수(白髮向辭楚澤囚, 백발 형 갇히신 감옥 향해 인사하노라)

형제종연한난이(兄弟從然寒暖異, 형제가 함께함이 당연하나 형은 춥고 나는 따뜻하니)

매지남북치상유(梅枝南北耻相猶, 남북으로 뻗은 매화가지만도 못하구나)

형이 별세한 후에도 납세를 계속 거부하던 장재규는 청주교도소에서 여러 차례 자결을 시도하였으나 실패하였으며, 나중에 대전교도소에 수감되어서는 단식으로 저항하다가 광복을 맞이하였다. 장재규는 옥중에서 그릇을 깬 사금파리조각으로 자살을 시도하였으나 실패하였다. 자신의 배를 여러 번 그은 흉터가 얼마나 깊었던지 해방이 된 후에 그 흉터를 본 사람들은 차마 눈을 뜨고 보지 못할 정도였다고 한다. 정부는 고인의 공훈을 기려 2009년에 대통령표창을 추서하였다.

세종시 연동면 예양1리에 있는 경암 장재학 선생 의열비

장화진은 1917년 아버지 장재학과 숙부 장재규가 납세거부 등으로 유배되자, 호적과 납세를 거부하며 저항하였다. 그리고 우편물 수취도 거부하여 우편법 위반으로 두 차례 벌금처분을 받았다. 이후에도 호적입적과 납세를 거부하며 일제 통치에 항거하다가 그해 4월 공주지방법원으로부터 유배 1년을 받아 제주도에 유배되었으니 한 집안에서 3명씩이나 고초를 겪으면서도 기개를 굽히지 않았다. 정부는 고인의 공훈을 기려 2006년에 건국포장을 추서하였다.

▣ 김순경의 납세거부와 저항

연동면 예양리에 거주하던 김순경(金舜經)은 일제에 납세를 거부하며 저항한 인물이다.

당시 29세였던 그는 1919년 일제가 발부한 제2기 호세(戶稅) 고지서의 수령을 거부하였다. 이에 동면장과 연기군수가 2∼3차례 간곡히 설득하였으나 완강히 거부하였으며 관공서에서 보낸 공문서도 일체 수령하지 않았다. 그리고 “나는 한국 국민이다. 우리 황제(고종)께서 돌아가신 이후로 군주가 없으니 세금납부는 물론 관청지시도 받을 이유가 없다.”라며 저항하였다.

그해 10월16일 체납세금 강제집행을 위해 군서기와 경찰관이 입회한 가운데 연기군수가 발행한 배달증명 우편물을 전달하려했으나 김순경은 우편물 인수를 거절하였다. 그러자 일경은 그를 경찰서로 연행하고 우편물을 수령을 강요하였지만 역시 태연자약한 모습으로 응하지 않았다.

이처럼 납세를 거부하자 일경은 우편법 제23조 위반이라며 과료 10원에 처하고 즉시 납부를 명령하였으나 이것마저 거절하므로 10월26일 구속하였다. 이러한 핍박에도 김순경은 “내가 차라리 굶어 죽을지언정 너희가 주는 음식은 먹지 않을 것”이라고 호통을 치며 저항하였다.

이 글을 쓴 윤철원은 세종시 상하수도과장으로 지난 2017년 정년퇴임을 한 조치원 토박이다. 조치원읍장 재직 당시 세종시로 명칭이 변경되면서 전통과 역사에 대한 시민 의식이 부족한 점을 아쉬워하면서 지역문화 연구에 매진했다. 이후 세종시 향토사 연구위원으로 활동하면서 지역과 관련한 역사를 찾아내 후손들에게 전해주는 역할을 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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