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종시에서도 대동단 활동한 인물 많았다
세종시에서도 대동단 활동한 인물 많았다
  • 윤철원
  • 승인 2020.11.22 17: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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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종시 독립운동]<중> 세종시 대동단활동과 대동단원 임헌성의 투쟁
대표적 인물 임헌빈...항일운동 후 만주에서 무장 투쟁, 여순 감옥 옥사

일제에 나라를 빼앗긴 조선에서 부당한 합병에 항의하는 민초들의 시위가 요원의 들불처럼 전국에서 일어났다. 이런 가운데 세종도 예외는 아니었다. 지난 2012년 출범한 세종시 역사는 일천하지만 연기군 시절부터 면면을 이어온 지역의 역사는 유구하다. 그리고 독립운동을 위해 분연히 생을 던진 투사들도 많이 나왔고 그들의 활약이 오늘의 행정수도 세종으로 이어지게 됐다. 우리 지역의 독립운동 역사를 윤철원 연기향토연구원을 통해 3회에 걸쳐 연재한다./편집자 씀

대동단은 1919년 서울에서 조직된 비밀 독립운동 단체다. 3.1운동 이후 설립된 지하단체 중에서도 최대 규모로 항일독립투쟁 역사에서 중요한 위상을 차지한다. 결성은 1919년 3월 말경 서울 봉익동 전협의 집에서 이루어 졌으며 이를 주도한 사람은 김가진, 전협, 최익환, 김찬규 등이었다. 대동단은 관료, 유림, 학생, 의병, 승려, 여성, 보부상 등 각계각층 11개 단체 대표자로 구성되었으며 수만 명의 단원이 참여하였다. 정식 명칭은 『조선민족대동단』이라고 불렀다.

대동단 창립 주역, 출처 : KBS 화면 캡쳐

대동단의 설립 취지는 ‘일제의 통치에서 벗어나 독립된 나라를 형성하고, 세계평화를 확보하며, 사회주의를 철저히 실행한다’는 3대 강령을 내세웠다. 비밀을 유지하기 위하여 점조직 형태로 운용되었으며 경기, 충청, 전라, 평안도 등 국내뿐만 아니라 만주 안동현(단둥) 등 동포들이 살고 있는 국외에도 지부를 설치하고 단원과 자금을 모집했다. 지역의 지부들은 서울본부와 긴밀한 연락을 하면서 항일 운동에 동조하는 지방의 유지들로부터 독립운동 자금을 모금하였다.

총재는 김가진, 군자금 등 재정은 전협, 선전 및 대외 활동은 최익환 등이 맡았으며 김찬규, 박영효, 민영달 등도 참여하였다. 주된 활동은 선언문·진정서·포고문 등을 인쇄·배포하거나 <대동신보>를 비밀리에 제작하여 일반인과 학생들에게 독립운동에 힘쓸 것을 호소하였다. 그러나 1919년 5월 23일 일본경찰에 발각되어 문서책임자 최익환, 인쇄책임자 권태석, 자금조달 책임자 이능우, 노동자 배포책임자 나경섭, 일인배포책임자 김영철 등이 체포되었다.

대동단 사건 중 특히 유명한 사건은 고종의 아들 의친왕 이강(李堈)을 상하이로 탈출시키려 한 사건이다. 이는 의친왕을 상하이 정부에 참여하게 하여 외교적 효과를 얻는 한편 의친왕과 김가진의 이름으로 제2차 독립선언서를 발표하여 내외의 관심을 고조시키기 위한 것이었다. 김가진이 먼저 상하이로 건너갔고 의친왕은 상복을 입고 상주로 가장해 중국 안동(단둥)까지 갔으나 1919. 11. 11 그곳에서 일본경찰에 붙들려 실패하고 말았다. 이 사건으로 수많은 대동단원들이 붙잡혀 옥고를 치렀다.

당시 세종시 지역에서도 대동단원 활동이 있었다. 조치원읍을 중심으로 청주, 공주, 대전 등지를 은밀하게 연락하던 대동단원은 남면 양화리 임헌빈(林憲斌), 제천리 임헌성(林憲成), 길주의 최시린(崔時麟), 유성 권성채(權聖采), 청주 윤집(尹集)과 오지환(吳志恒) 여사 등 6인이었다.

세종시 출신 대동단원으로서 활동한 대표적 인물은 임헌빈이다. 3.1운동 당시 연기군청에 근무하던 그는 고향과 인근 마을에서 비밀리 독립만세운동을 추진하였다. 그 이후 대동단(大同團)에 가입하여 활동하다가 더 적극적인 항일 투쟁을 위하여 만주로 건너갔다. 그곳에서 무장투쟁을 전개하다가 일제의 총탄을 발뒤꿈치에 맞고 함경북도 갑산으로 피신하던 중 체포되었다. 이후 여순(旅順) 형무소에서 2년간 옥고를 치르던 중 고문여독으로 고생하다가 1927년 작고하였다. 고향 친구 임헌빈에게 보낸 옥중서신을 보면 당시 그의 심경이 잘 나타나 있다.

의친왕 이강, 출처 : KBS 화면캡쳐

『....평생에 뜻 두기를 금안준마(金鞍駿馬)에 호로가(葫蘆歌)를 부르고 금의환향하렸더니 세상만사 춘몽 중에 또 다시 꿈만 같도다. 오늘은 출역일이라 안중근 무덤에 풀을 뽑고 나니 전에 없던 눈물이 앞을 가려 그만 끊노라....』

또한 연동면 노송리 출신 배상철도 대동단원으로 활동하였다. 3.1독립 만세 당시 노송리 아미산에서 독립만세를 주도한 배상철은 일제의 지명수배를 피해 서울로 간 후 대동단에 가입하였다. 그리고 대동단 주축인사인 전협, 최익환 등과 교류하면서 의친왕(이강)과도 은밀하게 접촉하는 관계를 맺었다. 이후 의친왕이 배상철 은거하는 장소까지 찾아와 춘강의소(春岡義巢, 성산배씨 족보에는 春岡書所)라는 네 글자를 써주었다고 한다.

이밖에도 세종시 지역과 연관이 있는 대동단원은 박원식(朴源植)이다. 홍성이 고향인 그는 1918년 연기청년회가 발족할 당시 조치원에서 언론에 종사하면서 연기청년회원으로 활동하다가 3.1운동 시에는 홍성에서 만세운동을 주도하였다. 이후 상경하여 대동단에 가입하고 1919년 11월 28일 안국동 광장에서 태극기를 흔들며 독립만세를 부르다가 체포되어 2년간 옥고를 치렀다.

이 글을 쓴 윤철원은 세종시 상하수도과장으로 지난 2017년 정년퇴임을 한 조치원 토박이다. 조치원읍장 재직 당시 세종시로 명칭이 변경되면서 전통과 역사에 대한 시민 의식이 부족한 점을 아쉬워하면서 지역문화 연구에 매진했다. 이후 세종시 향토사 연구위원으로 활동하면서 지역과 관련한 역사를 찾아내 후손들에게 전해주는 역할을 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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