호서 기자동맹, 일제 강점기에도 언론자유 외쳤다
호서 기자동맹, 일제 강점기에도 언론자유 외쳤다
  • 윤철원
  • 승인 2020.09.10 08:4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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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철원칼럼] 조치원 사무실두고 민족차별적 보도에 준열한 비판
일제 경찰권 제동, 언론의 권위신장, 불법인권유린에 강력히 저항
영동겅찰서장의 횡포를 보돟한 중외일보 기사

『언론 압박을 상투로 하는 대전 경찰의 횡포』, 『폭언지 조선시보 철저 응징키로』, 『직권 남용의 영동경찰의 횡포』 이 기사제목을 보면 언론의 자유가 보장된 최근의 신문기사 같다는 착각을 하게 한다. 그러나 이 기사들은 일제의 탄압이 극심했던 1930년 전후의 신문기사들이다.

억울한 일을 당해도 하소연할 곳도 없었던 그 시절 충청권을 대표하는 언론단체였던 “호서기자동맹”은 일제의 부당한 언론탄압이나 불법적인 인권 유린사례에 대하여 조금도 망설이지 않고 준열한 일침을 가하는 역할을 하였다. 일제의 탄압에 억눌려 지내던 당시의 민초들은 이와 같은 신문 기사를 접하고 아마도 속으로 쾌재를 불렀을 것이다.

호서기자동맹은 일제강점기 충청권 한글신문 및 잡지기자들이 결성한 언론인 단체였다. 조치원에 주 사무소를 두고 지역 언론의 권위신장 증진은 물론이고, 일제의 부당한 처사를 지적하고 경고하는 기사를 보도함으로써 일제의 경찰권 행사에 제동을 걸기도 하고, 민족 차별적인 보도를 하는 일본 언론에 거침없는 비판을 가하기도 하였다.

이 단체의 태동은 1925년 4. 15 서울 천도교회 강당에서 개최된 ‘전국기자대회’에서 시작되었다. 이 대회는 조선일보, 동아일보, 시대일보사 등 한글신문 전국기자들이 모여 개최한 행사로 언론의 권위신장과 언론의 자유에 대한 구속철폐 및 기타 사회문제에 대한 엄정한 보도 등을 결의하기 위한 회합이었다. 주최 측은 이날 대회에서는 ‘강령’을 채택하고 민중행사를 개최할 계획이었다. 그러나 일제는 ‘강령’을 압수하였을 뿐만 아니라 민중대회의 개최도 불허하였다.

강 령

호상 협조하여 언론의 권위를 신장발휘하기로 기함.

자유에 대한 구속의 철폐를 기함.

기타 출판물에 관한 현행법규의 근본적 개량을 기함.

대하여 엄정한 태도로 일치한 보조를 기함.

이와 같은 일제의 탄압을 목격하고 귀향하던 맹의섭(조치원), 이재훈(아산), 이상하(영동) 등은 충청권 한글신문 및 잡지사에 종사하는 기자들의 권익과 언론권위증진을 위한 모임체를 구성하기로 뜻을 모았다.

이들은 1925년 8월 하순 온양에서 모임을 갖고 9월 충남북의 중간인 조치원에서 창립대회를 개최하기로 하였으며, 조치원에 거주하는 맹의섭, 오병렬, 홍범규 등 3인에게 창립대회 준비를 일임하였다.

1925년 9월 20일 일제경찰의 삼엄한 감시 속에서 조치원에 있었던 연기청년회관에서 창립대회가 열렸다. 성황리에 시작된 회의에서 모임명칭을 ‘호서기자단’으로 정하였다. 그리고 사무소의 위치는 조치원과 대전이 경합을 벌인 결과 대전으로 결정하였으며 상무 집행위원 5명, 보통집행위원 10명을 선출하고 마무리 하였다.

이날 회의에서 특별히 주목할 만한 것은 ‘강령’의 채택이다. 동 강령은 4월 15일 서울에서 일경에 의해 압수된 ‘전국기자대회 강령’과 동일한 내용인데 서울에서는 내용이 불온하다하여 일제에게 압수당한 강령임에도 호서기자단이 이를 채택한 것인데, 채택한 자체가 일제에 저항의사를 표시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1926년 11월 공주에서 열린 제2회 대회에서는 ‘호서기자단’의 명칭을 ‘호서기자동맹’으로 바꾸었으며 대전에 두었던 사무소도 충남북의 중심인 조치원으로 이전하기로 하였다. 그리고 충청권 4개 지역에 지부를 설치하였는데 동부는 청주, 서부는 부여, 남부는 대전, 북부는 예산에 설치하였다.

이후 1936년까지 일제의 부당한 권력행사를 보도하고 언론탄압사례에 항의함으로써 일제의 일방적 횡포에 경종을 울렸는가 하면, 조선시보 등 일본어 신문의 한국인 비하보도에도 대응하여 정정 보도케 하는 등 항일단체로서 상당히 큰 역할을 하였다.

예컨대, 1925. 11. 30.자 중외일보 ‘언론압박을 상투로 하는 대전경찰의 횡포’, 1925. 11. 19자 시대일보 ‘지상에 게재 전 서장의 승낙 필요’, 1927. 4. 22자 중외일보 ‘직권남용의 영동경찰의 횡포’, 1927. 5. 13자 중외일보 ‘호서기자단 경고문을 발송’, 1927. 7. 19자 ‘호서기자단 각처 사형(私刑)사건에 경고문발송’, 1930. 7. 8자 중외일보 ‘폭언지 조선시보 철저 응징키로’ 등을 보도하였는데 이는 일제의 압제에 호서기자동맹이 저항한 사례이다.

호서기자동맹에서 폭언을 일삼는 신문사에 대해 강력하게 대처하기로 결의한 기사

이처럼 1925년 창립된 호서기자단은 ‘강령’에 적시된 대로 지역 언론으로서의 권위를 지키려는 노력을 기울이면서 일경과 충돌이 누적되었다. 일제로부터 눈엣가시와 같은 존재로 미움을 받던 호서기자동맹은 결국 1936년 9월 9일 강제해산 당하고 말았다.

이 글을 쓴 윤철원은 세종시 상하수도과장으로 지난 2017년 정년퇴임을 한 조치원 토박이다. 조치원읍장 재직 당시 세종시로 명칭이 변경되면서 전통과 역사에 대한 시민 의식이 부족한 점을 아쉬워하면서 지역문화 연구에 매진했다. 이후 세종시 향토사 연구위원으로 활동하면서 지역과 관련한 역사를 찾아내 후손들에게 전해주는 역할을 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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