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종대왕, 조치원 만든 얘기 목민심서에 나온다"
"세종대왕, 조치원 만든 얘기 목민심서에 나온다"
  • 임비호
  • 승인 2020.08.24 15: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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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비호칼럼] 책과 기록으로 보는 세종시 역사문화 <상>
세종, "연기현감 허만석은 마음을 다하여 기근 구제하라"
강진군의 의뢰로 제작된 정약용 초상화

목민심서 제6편(공조) 제2조(수리시설)

川流逕縣, 鑿渠引水, 以漑以灌, 與作公田, 以補民役, 政之善也.

(냇물이 고을을 지나가면 수로를 파서 물을 끌어 논에 대고, 아울러 공전(公田)을 개간하여 백성의 요역을 덜어주는 것이야말로 선정이다.)

- 중략 -

許晩石燕岐縣監,爲 縣北十五里, 作大隄, 穿渠灌注千餘頃. 堤在淸州之境, 其始築也, 晩石親督之, 淸人千百爲羣, 發不遜語, 折晩石所據胡床. 晩石彎弓逐之, 淸人不敢近. 堤成, 民賴其利, 至今稱頌

(허만석(許晩石)이 연기현감(燕岐縣監)으로 있을 때의 일이다. 고을의 북쪽 15리 지점에 큰 제방을 만들고 수로를 뚫어 1,000여 경의 논에 물을 대게 하였다. 제방이 청주(淸州)와의 경계에 있었다. 이 제방을 처음 쌓을 때 그가 친히 감독하였는데, 청주 사람들이 1,000명, 100명 떼를 지어 불손한 말을 퍼붓고 허만석이 앉았던 평상을 파손했다. 이에 그가 활을 당겨 쫓으니 청주 사람들이 감히 접근하지 못하였다. 제방이 이루어져 백성들이 그 이득을 입게 되자 도리어 지금까지도 칭송하고 있다.) <출처 : 다산연구회 창비출판사>

들어가는 말

제목이 황당할 수 있겠다. ‘뜬금없이 세종대왕이 조치원을 만들었다고 하느냐?’는 질문을 할 수 있다. ‘세종시 명칭은 국민 공모를 통해 만들어진 상징 지명 아니냐?’고 말할 수도 있다. 결론부터 말을 하자면 이 글은 목민심서라는 책을 통해 조치원에 대한 유래를 알아보자는 것이고 동시에 세종시와 세종대왕의 친연성을 유도하려는 의도된 글이기도 하다.

정약용은 유배시절 많은 책을 집필하였다. 국가 운영에 관한 글로 경세유표를, 지방 운영에 대한 글로 목민심서를 발표하였다. 목민심서는 권수로 보면 48권의 책으로, 내용으로 보면 편당 6조로 이루어진 12편으로 구성되어 있다. 주제는 목민관의 부임, 몸가짐, 공무 처리법, 애민, 인재관리법, 세금제도 운영법, 풍속과 군사, 형벌과 시설물 관리, 가난 구제법 및 퇴임 할 때에 관한 내용들이다.

목민심서 내용 중 세종시와 관련이 있는 부분은 제6편(공조) 제2조(수리시설)이다. 수리시설에 대한 명제를 쓰고 해설하는 부분에서 연기현감 허만석이 나온다. 아주 모범적인 목민관이라 칭찬을 한다. 연기현감 허만석은 세종대왕이 연기현에 파견 한 관리다. 세종 9년 7월 21일자 세종실록에 보면 안변부사 김효성과 연기현감 허만석이 임지로 출발하기 전 작별 문안을 하니 세종대왕은 ‘요사이 한재로 인하여 백성들이 산업을 잃었으니, 각기 마음을 다하여 기근을 구제하라’고 당부’하는 장면이 나온다.

임지 백성의 기근을 해결하라는 당부를 받은 허만석 현감은 현지에 와서 상황을 살핀 후 치소가 있는 연기에서 15리 북쪽 지역이 미호천 조천 범람원 임을 파악하고 이를 안정적인 농토로 바꾸는 사업을 하게 된 것이다. 조치원 평리, 상리, 죽림 일대에 제방을 쌓고, 지금의 조치원고 뒤쪽으로 보를 만들어 새로운 제방과 저수지를 만든 것이다. 이 과정에서 행정구역상 건너편 청주목 주민들의 항의를 감수하면서까지 진행을 한 것이다. 이런 작업의 일환으로 얻은 농지가 1천경(현재 환산 면적 25㎢)이라한다. 목심심서에서 정약용은 이 부분을 높이 사던 것이다. 농경지의 확장과 안정적인 농수 확보는 백성에게 근본적인 삶의 근거이기 때문이다.

1872년도 연기현 지도

조치원 지명의 변천 과정

세종대왕이 애민정신으로 허만석 현감을 파견해 만든 이곳을 두고 연기현에서 만든 고지도와 청주목에서 만든 고지도에 각각 다른 이름으로 표기되는 기이한 현상이 일어난다. 1872년 연기현 지도에서는 이 곳을 저치제(苧峙堤)와 조천으로 표기하고, 동국여지승람(1481년) 청주목 역원 편에서는 장원으로, 동국문헌비고(1770년 영조46년)30권 향시 편에서는 조치원으로 표기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 곳이 한 때는 청주목으로, 한 때는 공주부로 편입되는 과정의 결과이겠지만 조치원에 대한 유래를 헛깔리게 했던 큰 요인이었다.

하지만 이를 시간적으로 차분히 풀어보면 조치원 변천 과정을 쉽게 파악 할 수 있다. 처음의 조치원 모습은 띠풀 뗏장으로 된 자연제방의 모습으로 추정 할 수 있다. 이런 물길을 막은 제방이 시간이 흐를수록 부강에서 삼남대로로 가는 징검다리 같은 길의 역할도 겸하게 된다. 김정호의 대동여지도를 보면 강외면 쪽과 조치원 쪽으로 길이 표시된 것을 볼 수 있다. 사람들 발길이 잦아들면서 아직 소유관계가 확실치 않은 이곳이 삶터가 필요한 사람에게는 임시 집터가 되기도 하였다.

상리에 가면 뗏집거리라는 지명이 아직도 남아 있는 것을 보면 이해가 가는 부분이다. 점차로 제방이 길이 되고, 사람들이 하나 둘 씩 점점 정착하면서 행정에게도 이 곳에 관영 숙소인 원(院)을 설치하게 된다. 동국여지승람(1481년,성종12년)에 청주목 역원 편에 청주에서 서쪽으로 39리에 장원(場院)이 있었다는 기록으로 보아 길손의 쉼터나 시장의 기능을 한 것 같다.

동국문헌비고(1770년 영조 46년) 30권 향시 편에 보면 청주군 내 조치원장이 4,9일로 소개되고 있는 것을 보아 이 당시에 조치원이란 지명과 시장이 형성 되었음을 짐작할 수 있다. 이 때의 조치원은 지금과 같은 행정구역은 아니고 평리 상리, 명리, 남리, 서창리 일부라고 할 수 있다. 행정명으로는 강외면 장대리였다.

세종실록에 실린 허만석 관련 내용

이런 조치원이 지금과 같은 지형을 갖추게 되는 것은 경부선 철도 부설 이후다. 1905년 충청북도 청주 장대리와 충청남도 연기군의 중간 지점으로 경부선 철도가 놓이게 된 것이다. 조치원 역을 중심으로 1914년에 드디어 연기현 북일면 일부와 청주군 강외면 장대리와 평리가 합쳐져 조치원리라는 행정명을 얻게 된다. 속명으로 존재했던 ‘장원’ ‘저치제’ ‘조치원’이 이제 실질적인 행정명이 된 것이다. 이후 1917년 10월에 조치원면이 되고, 1931년에 조치원읍으로 승격되었다. 그리고 조치원 일본의 침략 행위가 드러난 토지조사 사업의 일환으로 1926년 일본인들이 조천개수공사를 함으로써 현재의 조치원 모습을 갖추게 된 것이다.

   
 

임비호, 조치원 출생, 국제뇌교육과학대학원 지구경영학 박사과정, 세종 YMCA시민환경분과위원장(현), (전)세종생태도시시민협의회 집행위원장, (전)세종시 환경정책위원, (전)금강청 금강수계자문위원, 푸른세종21실천협의회 사무처장(전), 연기사랑청년회장(전),이메일 : bibo10@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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