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호천 습지공원, 동진나루공원으로 개정하자
미호천 습지공원, 동진나루공원으로 개정하자
  • 임비호
  • 승인 2020.04.06 15:12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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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비호칼럼] 연기팔경 중 2경 '당수청람', 6경 '동진어화'에 대한 기억
보람교에서 바라다본 당산과 동진나루, 사진 왼쪽이 당산, 가운데가 미호천, 오른쪽이 동진뜰 제방

연기 팔경에 대한 사진을 찍고 싶었다. 아니 남기고 싶었다. 그러나 당수청람(唐岫晴嵐)(2경)과 동진어화(東津漁火)(6경)의 장소인 연기면 당산과 동진나루터에 가보니 그 흔적을 찾기가 쉽지 않았다. 남기고 싶은 사진인지라 어찌해야 고민하다가 글로라도 남기자 생각하고 기억을 더듬기 시작하였다.

연기팔경 중 2경인 당수청람(唐岫晴嵐)은 화창한 날에 당산 마루에서 보는 드넓은 동진뜰 아지랑이 피는 모습이고, 6경인 동진어화(東津漁火)는 동진나루에서 밤에 횃불로 고기를 잡는 모습을 말하는 것이다. 당산과 동진은 지금의 연기면 연기리에 있는 산과 나루터로 당산은 동진나루의 뒷산, 동진나루는 당산의 앞 나루터가 되는 곳으로 같은 장소의 다른 풍경인 것이다

이곳이 연기팔경의 2경과 6경이 될 수 있었던 것을 알려면 철도와 자동차가 있기 전 시대로 거슬러 올라가야 한다. 물류의 중심이 바닷길과 물길이던 당시, 이곳은 바다와 내륙을 잇는 중간 정착지로 50석 크기의 바다배가 정착한 커다란 나루터였다.

강경에서 100석의 배가 정착하여 50석 배로 소금과 젓갈을 소분하여 동진나루까지 오면 다시 이곳에서 소분하여 작은 배로 청원, 병천, 진천 등으로 더 올라가는 물류 기지이었던 것이다. 하여 이곳을 금강의 다섯개 이름 중 하나인 오강(吳江)이라 불렀고, 연기현의 치소와 향교가 있던 곳이다. 신채호 선생이 말한 백제 부흥운동의 중심지이면서 서거정을 비롯한 많은 문인들이 머물며 풍광을 시로 노래 한 곳이기도 하다.

또 이곳은 다리가 일반화 되지 않은 시절에 미호천의 너른 습지 지형 덕분에 공주 남부, 내포 지역에서 청주, 상주로 가는 가장 최단거리의 적절한 나루였다. 연기면 쪽으로는 당산이 있고, 건너편 동진뜰(용호리) 쪽으로 산지가 바로 있어 때문이다. 연기 지명을 풀이해 보면 연(燕)은 백제의 8대 성(性)중 하나인 연씨 마을이란 뜻이고, 기(岐)는 갈래를 나타내는데 전라도, 충청도, 경상도를 갈 수 있는 교차로란 의미인 것이다.

조치원역 바닥에 설치된 당수청람과 동진어화

결국 당산 아래 동진나루는 바다와 내륙을 잇는 물류기지로 많은 사람이 머무는 경제의 중심지이면서 이동을 위한 중간 정착지 기능을 했던 것이다. 경제적 풍요와 많은 사람의 교류로 풍성한 문화를 만들어내었고, 덕분에 세종시에서 가장 많은 예술 창작물 소재로 활용된 곳이기도 하다.

그런데 왜 현재는 기록에만 있고 그 자취를 쉽게 찾을 수 없는 것일까?

아마도 첫 번째 이유는 물류 이동 방법이 철도로 변화했기 때문이다. 물길을 이용할 때는 아주 적소였지만 기차길이 생기면서 그 용도가 축소되니 자연스레 사람들도, 행정도 주목하지 않았기 때문이리라.

또 두 번째는 미호천 주변의 지형 변화에 있을 것이다. 지금 세종시 강변 지형은 대부분 일제 강점기 때 이루어졌다. 당시 일제는 경공업 경제 체제에서 중공업 경제 체제로 변화하는 시기였고, 값싼 노동력을 얻기 위하여 낮은 가격의 농산물이 필요했다.

이를 위하여 동양척식회사를 세워 세종시 인근 강가에 제방을 쌓고 이곳에 농지를 만들어 이를 자신들의 경제적 터전으로 삼으면서 생산물은 본국에 송출하는 역할을 했다. 조치원 인근의 제방, 동진뜰 제방, 행정 중앙 부처 앞 장남평야 제방 등은 대부분 이때 만들어진 것이다.

지금의 중앙 호수공원 앞쪽은 옛 지명이 진의리로, 이곳에 진의 나루가 있었다. 아마도 일제 강점기에 제방을 쌓기 전의 모습은 현재와 많이 달랐을 것이다. 농사를 안정되게 지을 수 있는 논이라기보다 농지로 쓰기에는 부족한 습지 모습이었을 것이다.

동진나루터에서 본 미호천

이런 이유 때문인지 지금 동진나루터에 가보면 연기팔경에 나오는 모습은 없고 쌓여가는 모래톱 위에 마른 갈대 덤불과 4대강 사업의 일환인 조성습지공원만이 바람을 맞이하고 있다. 토목공사로 변절 된 졸속 4대강 사업의 씁쓸한 결과를 온 몸으로 느끼게 한 현장이 되어 있다. 어찌 보면 이곳은 세종시 역사에서 종가(宗家)마을의 의미, 번창했던 나루터 유적, 유구한 민속 문화를 가지는 곳인데 이런 문화 유적은 기억되고 있지 않았다.

세종시가 품격 있는 도시가 되기 위해서는 이전 문화와 뿌리를 잘 보전하고 계승할 때 이루어질 수 있다고 본다. 조선을 개국한 이성계가 선조들 역사를 잘 기록하고 섬겼듯이 말이다.

필자는 이곳을 세종시 종가마을, 미호천 나루터 유적으로 살렸으면 좋겠다. 미호천 조성습지공원을 “동진나루 공원”으로 개칭하고 이곳에 당수청람, 동진어화의 유래와 옛 문인들이 남긴 시들을 형상화 하면 어떨까 한다. 그러기 위해서 먼저 당산과 동진나루에 대한 전면적인 고고학적 발굴을 했으면 한다.

또한 백제 팔대성 중의 하나인 연씨 활동과 신채호 선생이 백제부흥운동의 근거지인 주류성이라고 한 것에 대한 학술적 연구도 동반되어야 할 것이다. 대동여지도에서는 “성산”이라고 했는데 당산이라고 불리는 것을 보면 이곳에 나루터와 관련된 많은 민속 문화들이 있었다고 추론을 할 수 있다. 이에 대한 다각적 조사도 필요하다. 가능하면 일제에 의해 국민 학교로 사용 된 연기 관아의 복원도 희망하고, 동진어화의 재현과 나루터 체험을 위한 프로그램도 계획 해 볼만하다.

양적 성장을 거듭하는 세종시가 품격 있는 명품도시로 거듭나기 위해서는 이전 역사와 문화에 대한 기억과 배려도 함께 이루어져야 할 것이다. 이에 생뚱맞은 조성습지공원이 아닌 역사적 의미가 있는 동진나루공원으로 거듭나길 기대해 본다.

2009년 동진 뜰에서 바라다본 동진나루 모래톱
 미호천 조성 습지공원 조성 전경
월산교에서 바라다본 미호천
   
 

임비호, 조치원 출생, 공주대 환경과학과 졸업, 세종 YMCA시민환경분과위원장(현), (전)세종생태도시시민협의회 집행위원장, (전)세종시 환경정책위원, (전)금강청 금강수계자문위원, 푸른세종21실천협의회 사무처장(전), 연기사랑청년회장(전),이메일 : bibo10@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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