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큰 들'에서 유래된 '대평리', 이제는 '해들마을'로 거듭나
'큰 들'에서 유래된 '대평리', 이제는 '해들마을'로 거듭나
  • 윤철원
  • 승인 2020.03.12 14: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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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철원칼럼] 대평동 유래...백제시대부터 내려와 행복청, LH 등 신도시 중추역할
이제는 해들마을 들어서면서 대평동 탄생, 공주, 조치원, 유성 장과 함께 큰 장 열려
대평동은 백제시대부터 전해 내려오는 유서 깊은 지명으로 공주, 조치원, 유성장과 함께 상거래의 중심 역할을 했다. 사진은 학나래교에서 바라다본 대평동 일대

대평동은 백제시대 소비포현, 통일신라 적오현(적조), 고려초기에는 덕진현, 조선시대에는 공주목 양야리면에 속해 있었다.

1914년 행정구역이 개편됨에 따라 연기군에 편입된 이래 금남면 대평리로 불려오다가, 2012년 7월 세종특별자치시 출범과 더불어 대평동으로 탄생한 마을이다.

큰 들이라는 의미를 지닌 대평(大坪)이라는 지명은 1547년(명종2년) 6월 24일자 명종실록에 실린 충청감사 김익수의 장계에 등장한다.

'청주는 남문 밖 시내가 넘쳐 읍내 인가가 거의 다 물에 잠기고 돌다리 30여 칸이 무너졌으며 민가 16가구가 휩쓸려 떠내려갔습니다. 연기(燕岐)는 동진과 대평(大坪)에 물이 넘쳐 관사가 거의 다 떠내려갔습니다. ...공주는 금강 물이 불어나고 인근 시냇물이 합쳐지면서 사방이 강처럼 변하여 관사가 내려앉으므로 목사와 판관이 겨우 빠져 나와 피신하였습니다...'라고 기록되어 있다.

당시 충청권의 장마피해가 극심했음을 짐작케 하는데 이 기록에서 보듯이 대평(大坪)이라는 지명은 적어도 440여 년 전부터 존재하였음을 알 수 있다.

또, 1874년의 각사등록(임진왜란 이후 조정과 지방간에 오간 공문 기록철)에도 '양야리면 대평ㆍ가동ㆍ신흥 3동은 모두 금강 상류 가에 있습니다'라는 기록에서도 대평이라는 지명이 확인된다.

조선시대에 양야리면(현재 금남면) 5일장은 감성리에서 4일, 9일마다 열렸었다. 그러다가 1908년 감성장이 폐지되고 대평장이 신설되면서 2일, 7일마다 장이 열렸는데 그 전통이 지금까지 이어지고 있는 것이다.

대평장은 인근의 공주, 조치원, 유성, 부강장 등과 함께 5일장으로서 유명세를 떨쳤다. 인근지역보다 시장개설이 늦었음에도 불구하고 상거래가 활발하여 큰 시장이라는 평을 들었다.

대한제국 시기의 대평리, 출처 : 국가기록원

대평리가 법정리가 된 것은 1914년 양야리면과 명탄면이 금남면으로 통폐합되면서 부터이다. 당시 대평장터, 상거리, 하거리, 고사동을 합쳐 ‘대평리’라 칭하고 금남면 소재지가 되었는데 1932년 금강제방이 완공된 후에는 더욱 번창하였다.

그러나 1946년 6월 26일 장맛비에 금강 둑이 무너지는 이른바 ‘병술년 물난리’를 겪으면서 돌이킬 수 없는 수해를 당하였다. 어쩔 수 없는 상황에서 면사무소를 비롯한 각급 기관과 이재민이 옆 마을 용포리로 긴급히 대피하였는데 이후 대평리는 폐허상태의 피해를 복구하지 못하고 대부분이 농경지로 바뀌고 말았다.

이처럼 대평리가 유실되면서 대평장은 75년 전에 그 기능을 완전히 상실하였음에도 주민들은 과거 번창하며 명성을 날렸던 대평장에 대한 향수가 남아 있어서인지 아직도 용포시장을 ‘대평장’(大平場)이라고 부르기를 꺼려하지 않고 있다.

한편, 세종특별자치 근대사의 조각들도 대평동에서 찾아 볼 수 있다.

1919년 기록된 조선총독부 ‘조선소요사건 경과 개람표’에 그해 4월 2일 대평장 독립만세 시위에 2,300명이 참석했다는 기록이 있다. 우리민족을 핍박한 일제기록이라는 것에 주목해 볼 때 대평장에서 대규모 3.1독립만세 운동이 있었음을 확인할 수 있는 대목이다.

또 한국전쟁 초기였던 1950년 7월 12일부터 4일간 미 제24사단 장병들이 북한군의 남진을 막기 위해 치열하게 금강방어전투를 전개한 격전지였다는 것은 ‘한국전쟁사’가 생생하게 증언하고 있다.

대평리는 대평동으로 명칭이 바뀌어 행정수도를 지향하는 세종시에 명맥을 이어오고 있다.
대평리는 대평동으로 명칭이 바뀌어 행정수도를 지향하는 세종시에 명맥을 이어오고 있다.

그리고 2006년부터는 세종시 건설의 콘트롤 타워인 행복도시건설청, 세종시 출범준비단, LH세종특별본부 등이 한동안 대평동 위치하여 도시건설을 진두지휘하기도 했었는데 세종시 건설 초반부 역사가 이곳에서 이루어 졌다고 해도 과언은 아닐 것이다.

살펴본바와 같이 대평이라는 지명은 당초 ‘큰 들’(大坪)에서 유래하였다. 그러나 이제는 ‘크게 평안하다’(大平)는 뜻을 내포한 지명으로 바뀌었고, 또 따스함과 평화로움이 연상되는 ‘해들 마을’이란 우리말 지명도 갖게 되었는데, 앞으로 평안과 풍요와 희망이 넘치기는 대평동이 되기를 진심으로 기원한다.

이 글을 쓴 윤철원은 세종시 상하수도과장으로 지난 2017년 정년퇴임을 한 조치원 토박이다. 조치원읍장 재직 당시 세종시로 명칭이 변경되면서 전통과 역사에 대한 시민 의식이 부족한 점을 아쉬워하면서 지역문화 연구에 매진했다. 이후 세종시 향토사 연구위원으로 활동하면서 지역과 관련한 역사를 찾아내 후손들에게 전해주는 역할을 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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