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제당, 시묘비 등 곳곳에 유적있어
산제당, 시묘비 등 곳곳에 유적있어
  • 임영수
  • 승인 2012.02.17 14: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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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영수의 세종을 만나다]원수산 골짜기에 얽힌 애환들

원수산 산제당. 불치병에 걸린 환자가 100일 기도로 병을 완치하자 산제를 지내며 각지에서 환자들이 몰려들었다.
재영 : 이 산은 모양이 뾰족하게 생겼는데 이름이 뭐예요?

아빠 : 이 산은 원수산이라고 부른단다.
처음에는 산의 모습대로 붓끝같이 생겼다 하여 문필봉이라 불렀지.
원수산은 해발 254m높이의 산으로 양화리와 진의리, 그리고 갈운리, 방축리등 4개 마을 뒷산이지.

재영 : 이 산에도 산제당이 있나요?

아빠 : 물론이지. 옛날부터 이곳 주민들은 원수산에서 산신제를 지내 왔어. 산신제를 지내기 시작한 시기가 언제인지 정확히 알 수 없으나 주민들의 제보에 의하면 300~400년 전부터 행해졌다고 하지. 현재 확인되는 자료는 산제당에 있는 옛 문서가 중요한 단서가 되는데 원수산 산제의 유래는 다음과 같이 전하고 있어.

옛날 이름 모를 질병(돌림병)으로 마을 주민들이 죽어나가고 있을 때, 마을 사람들이 ‘가래기(월령)’느티나무 아래 모여 앉아 있었어. 그때 스님 한 분과 도인 한분이 그 곳을 지나가면서 원수산을 바라보며 명산이니 이곳에 산제당을 짓고 1년에 한 번씩 제사를 올리면 동네가 평안해 질 수 있다고 했어. 이때부터 마을에선 산제당을 짓고 제관을 선출해 산신제를 올리기 시작했지. 그러자 돌림병이 사라지고 마을은 평화롭게 되었어.

세월이 흐른 지금은 원수산 산제를 임장철씨가 제당 앞에 요사체를 지어 놓고 아내와 기도를 하고 있는데 간혹 이곳에 와서 기도하는 이들도 있어. 임장철씨는 아버지 고 임노택(1952년 작고)옹을 따라 이곳 산제당제에 해마다 참석하였다고 했어.

산제 관련 문서

옛날 산제당 제사에 참석했던 마을 범위는 갈운리의 원사골(원곡), 양화 2구(궝말, 상촌, 월룡, 희여믈(백동)로 100여 호가 넘었지. 마을회의에서 제관을 선출하여 제를 올리던 것을 1900년대 초, 중반에 오면서 임장철씨의 아버지가 원사골, 양화 2구, 백동 100여 호에서 쌀 1되씩과 돈을 걷어 대신 산제를 올려주기 시작했지. 그 후 아들인 임장철씨(남,76세 진의리 거주)가 아버지의 대업을 이어 받아 40~50년 동안 산신제를 지내고 있어.

원수산 산제당은 새마을 운동 때도 철거당하지 않았으며, 6.25전쟁 때도 제를 지냈어. 박정희 대통령시절 산에 있는 암자 철거령이 내려졌을 때 이 곳 원수산 산제당도 조치원 경찰서에서 철거를 하려고 왔는데 주민들은 이 곳 산제당은 암자가 아니고 산제를 올리는 제당이기 때문에 헐어서는 안 된다고 말하자 순경이 일련번호만 붙이고 내려갔어. 80년대 초부터 교회가 생기는 것 등으로 산신제에 참여하는 사람이 적어지고 산신제의 규모가 작아지면서 산신제 올리는 것이 소홀해졌지.

산제 주관자 원수산에서 100일 기도하고 지병 나아 전국적으로 유명해져

그러다 21년 전 현재 산제를 주관하는 임장철씨가 한쪽 다리를 못 쓸 정도로 크게 앓아누웠어. 병을 고치기 위해 계룡산, 갑사 등지로 돌아 다녔는데 그 곳에서 만나는 도인마다 원수산에 가서 100일 기도를 드리라고 하였어. 이에 임장철씨는 아픈 몸을 이끌고 새벽마다 목욕재계를 하며 100일 동안 정성스럽게 기도를 드렸는데 신기하게도 기도가 끝나자 병이 완쾌되었지. 임장철씨가 죽을 병에서 나았다는 소문을 듣고 전국에서 부녀자들과 환자들이 모여들기 시작하였고, 그 후 본격적으로 산제당을 정성으로 모시게 되었지.

산제는 매년 동짓달 초이틀 자시에 올려. 산제 올리기 10일 전에 미리 화장실을 깨끗이 푸고, 산제 빨래를 다 해 놓지. 그 후부터는 부정한 것을 보지 말고 각종 금기사항을 지켜야 하며, 제일 3일전에 마을에 들어오는 사람들은 파제날 까지 나갈 수 없다고 했어. 8일 전에는 마을 사람들의 회의를 거쳐 한 해 동안 깨끗했던 사람들 중에 제관을 선출하게 되고 제관으로 선정되면 각종 금기사항을 지켜야 했고, 이런 금기사항은 제에 참석하는 사람뿐만 아니라 마을 사람들도 지켜야 했어. 만약 그렇지 않은 사람(제관)이 산제를 지내면 마을과 개인에게 화가 미쳤다고 하였어. 제관 외에 축관, 유사 등 5명을 선출하였어.

제관은 일주일 동안 찬물로 목욕재계를 게을리 하지 않아야 하지. 그러면서도 이를 잡지 말며, 빨래를 빨지 말고, 비린 것을 먹지 말아야 해. 제관의 대문 앞에는 솔가지를 꽂은 금줄을 치고, 황토를 세 무더기씩 양쪽에 뿌리며 제관은 누구보다 몸과 마음을 청결하게 해야 했어. 60여 년 전까지만 해도 산제를 엄하게 지냈어. 그런데 마을에 교회가 생기고 산제를 주관하던 노인들이 하나 둘, 작고하면서 산제에 참석하는 사람들이 줄어들게 되었어. 그러다 결국 임노택(임장철 부친)옹이 산제를 맡아 지내오다 1952년 작고하시자 아들인 임장철씨가 맡아 지내게 되었지.

양화리 마을 전경
지금은 산신제에 참석하는 사람들이 없을 뿐더러 1년 내내 깨끗한 사람을 찾기 어려워 특별한 경우를 제외하고 거의 임장철씨 부부가 직접 제를 주관하고 있어. 임장철씨는 산제를 지내기 전 산제당에 있는 하탕 샘물에서 초를 켜 놓고 10일 동안 찬물로 목욕재계를 하며 문 앞에는 솔가지를 꽂은 금줄을 치고 황토를 세 무더기씩 양쪽에 뿌리지.

현재 원수산 산신제는 원하는 사람은 누구나 참석할 수 있어. 대신 깨끗해야 하며 제일 7일 전부터는 부정한 것을 보지 말고, 피를 내지 말고, 옷을 깨끗이 입어야 하며, 목욕재계를 7일 동안 해야 하는 등 각종 금기사항과 정성을 다해야만 참석할 수 있지. 만약 그렇지 않고 제에 참석하면 화가 개인에게 미친다고 믿고 있어.

제사에 소용되는 비용을 예전에는 100여 호에서 쌀 1되씩과 돈, 그리고 산제당 터에서 얻어지는 도지를 받아 충당했다고 해. 쌀은 호수가 가장 많았던 가래기(양화 2구)에서 제일 많이 냈지. 하지만 1980년대 초부터는 임장철씨 자비 십만 원 정도와 150평의 산제당의 논에서 얻어지는 도지쌀 12되, 이곳을 찾는 이들의 정성으로 제물을 모아 제를 지내지. 제물은 생소머리, 과실(대추, 감, 배, 사과), 무 1개, 미나리, 배추(양념 없이 익히지 않는다), 소의 간, 소고기 반근, 산적, 명태포 5마리, 술(누룩과 쌀을 빚어 만든다), 백시루 등이며, 국(미역국)과 밥은 한 솥단지 씩 통째로 올려놓아.

특히, 1970년도까지는 황소를 잡아 소머리와 살코기를 산제에 사용하고 나머지는 파젯날 해먹고 계원들에게 한 덩어리씩 나누어 주었다고 해. 그러나 1980년대 초에 오면서 산신제에 참여하는 사람들이 줄어 여건상 소는 잡지 못하고 대신 소머리를 사용하고 있어. 흥미로운 사실은 이 산제에 쓰이는 희생으로 소를 잡을 때 허가를 얻기 위한 문서가 전하고 있는 것이야.

 

산제 지내기 위한 소 잡는 허가 문서 전해져, 귀중한 자료로 보관되어 내려 오고 있어

이 문서는 융희 원년(1906년)11월 30일 가학동의 통장 임노원이 군수서리에게 올린 청원서로 수백 년 동안 소를 잡아온 것이니 허락하여 줄 것을 청하여 허락을 얻은 귀중한 자료이지. 제물은 산제당에 직접 올라가서 조리를 하며, 제수 장만은 조치원, 종촌, 공주를 이용하는데 주로 공주 장에서 보았어. 옛날에는 사기로 된 제기를 사용하다가 지금은 놋으로 된 것을 사용하고 있지. 제사를 지내는 곳은 원수산 중턱의 산제당이야. 산제당은 산신을 모시고 있는 위채와 장군, 약사, 관음, 지장부처님을 모시고 있는 아래채의 두 건물로 되어 있어. 위채는 산신제를 올리는 곳이며, 아래채는 법당의 용도로 사용되고 있어. 특히, 아래채에는 태극기를 모시고 있는데 태극기를 모시는 이유는 이곳에서 독립운동을 하다가 죽은 원혼들이 많다는 불도제자들의 권유에 의해 그 원혼들을 달래기 위해 모시기 시작했다고 했어. 산제당은 처음에 건물 없이 돌로 담을 쌓고 그 담 안에서 제를 지냈지. 그러다가 건물을 지어 초가지붕을 얹었는데 그 당시 양쪽에 나무를 세워 대문형태의 문을 달았고 안에는 푸르스름한 사기로 만든 제기(시루, 잔대 등)와 촛대 등이 있었어.

그 후 1962년에 아랫마을 임경철씨의 집을 지을 때 기와를 넉넉히 주문하여 쓰고 남은 것을 갖다가 산제당에 올렸지. 70년도에 들어오면서 교인으로 추측되는 사람들에 의해 산신각이 부서지면서 기와집과 슬레이트 지붕으로 각각 산제당 2채를 다시 증축했지. 산제당 주변은 돌탑과 솟대로 구성되어 있으며, 음식과 목욕재계 할 때 사용하는 샘물이 상, 중, 하탕으로 만들어져 있어. 제관의 제복으로는 과거에는 짚신에 도포를 입었으나, 지금은 털신이나 고무신을 신은 후 도포를 입고 제를 올리게 된다. 제사의 순서는 옛날에는 초헌, 아헌, 종헌, 독축 순서에 따랐으며 소지는  산신소지 → 마을소지(원곡 혹은 원삭골) - 상촌 - 원륭 - 권말 - 아랫말 - 성전 - 흐여물(백동) - 윗골 순(우마(牛馬)소지 포함)- 제관소지 → 가가호호(家家戶戶) 쌀 바치는 사람소지 순서로 올렸지. 우마소지는 일제강점기까지 행해졌어. 산신제를 지내고 다음날 유사집에 각 동네 별로 대표로 쌀을 걷는 사람들 1명씩과 그 외 몇 명이 모여 산제계를 했어. 산제계에선 결산을 보고하고, 다음해 제관을 선출하게 되는데 제관은 깨끗하고 정결한 사람 중에서 선출하게 되지. 제관으로 선출되면 1년 동안 심적으로나 행동에 있어 조심해야 했어.

지금은 두 명이 하는 관계로 초헌, 아헌, 독축만 하지. 독축 후 산신소지→ 마을소지→ 제관소지→ 임장철씨 가족소지 → 불도신자들의 개인소지 총 60장 정도를 올려 동민들과 불도제자들, 그리고 임장철씨 가족의 안녕과 풍년을 기원하고 있어. 소지를 올린 후 제를 마치고 음복을 하지. 제를 마치고 그 다음날 20~30명의 동네(백동) 어른들과 음식을 나누어 먹어. 산제의 축문은 1950년대까지는 한문으로 된 축문을 사용하다 1960년대부터 임장철씨가 제를 지내면서부터 한글로 된 축문을 사용하고 있어.

양화리 마을 유래비. 마을 입구에 세워져 있다.
재영 : 원수산 산제를 지금도 지내오고 있는 것은 임장철씨의 노력이 크게 작용했네요.

아빠 : 이 마을에서는 산제를 잘 못 지내어 화를 입은 사례가 있어.
성전에 사는 노인 한 분(임지순, 남,1995년 작고)이 제관을 하려고 산신제 당일 산제당을 둘러보는데 다치지도 않았는데 머리에서 피가 나왔다고 해. 결국 그 날 제관을 하지 못한 채 집으로 돌아가게 되었고, 그 후 이주일 동안 크게 앓아누웠다고 했어. 후에 알고 보니 아들부부가 부정한 것을 보지 말아야 하는데 산신제 전에 묘 이장하는 것을 보고 왔기에 벌을 받았다는 것이야.

산신제를 지내려고 준비하는 날 흐여물의 임헌석씨가 개를 잡아 그의 아들이 얼굴에 화상을 입는 화를 당했다고 하고, 일제강점기에 일본사람들이 산제당에 참나무를 심어 키워 그 밑에서 숯을 구웠어. 그 중 한 그루가 오래 되어 죽었는데 1950년대 임노군씨가 그 것을 베어다 불을 때다가 2달 동안 크게 앓아누웠어.

재영이와 원수산을 내려오다 큰 바위 뒤편으로 서 있는 비석을 발견하였다.

아빠 : 저기 보이는 저 비석이 무엇인지 아니?

재영 : 글쎄요, 비석 뒤에 묘가 없는 것으로 보아 묘 비석은 아닌 것 같은데,
왜, 비석이 혼자 서 있나요?

아빠 : 저것을 시묘비라 부르는데 시묘에 대하여 잘 모르지?

재영 : 예, 설명해 주세요.

아빠 : 옛날에는 부모님이 돌아가시면 묘 옆에 움막을 짓고 3년간 기거 하면서 아침 저녁으로 절을 하며 곡을 하였는데 그것을 시묘살이라 했단다.

재영 : 3년 동안 묘 옆에서 떠나지 않나요?

아빠 : 그래, 3년이라는 세월은 부모님이 나를 낳으셔서 내가 스스로 일어서 걸을 수 있는 기간인데 3년간 보살핌을 받았으니 그 은혜를 갚는다는 뜻으로 3년간 시묘살이를 하는 것이지.

그런데 저 비의 주인공은 아버지, 어머니 각각 3년씩 6년 동안 시묘살이를 하여 그것을 기념하기 위하여 후손들이 비를 세워 준 것이야.

재영 : 저 비의 주인공에 대하여 알고 싶어요.

아빠 : 저 비의 주인공은 조선 중기의 문신으로 이름은 임정(林頲 1554~1636)이지. 자는 직경(直卿)호는 용곡(龍谷)으로 1554년(명종 9년) 용곡리에서 태어났는데 어려서부터 글재주가 있어 장성하여서는 경적(經籍)을 깊이 탐구하는 한편, 고청(孤靑) 서기(徐起 1523~1619)의 문하에서 학문을 배웠어, 처음에는 과거 공부를 대수롭지 않게 생각하고 마음에 두지 않았는데 어버이의 명으로 과업(科業)에 힘써 1582년(선조 15)에 진사시에 합격하고 1591년(선조 24) 문과에 급제하여 시정(侍正)에 올랐어, 1594년 의정부 사록(議政府 司錄)으로 있다가 성환찰방에 제수 되었고 1596년 병조 좌랑을 거쳐 이듬해 강원도 도사가 되었어.

임정의 시묘비

1598년 해주판관이 되었는데 임기를 마치고 돌아올 때 백성들이 길을 막고 교자(轎子)를 타고 갈 것을 청 하였으나 “공물(公物)을 어찌 사사로이 쓰겠는가.” 하고 즉시 사람을 시켜 돌려보냈어.

3년간 돌아가신 부모를 정성껏 모신 시묘비, 조선 중기 문신 임정의 효정신 담아

이후로 수십 년간에 지낸 관직은 내직으로는 성균관 전적, 호조좌랑, 형조, 호조, 공조정랑과 춘추관 기주관, 한성부 서윤, 내섬시정, 봉사시정, 사복시정 등을 엮임 하였고, 외직으로는 강령, 부안, 웅진, 서흥, 기장현감과 장흥판관, 전라도 도사, 경상도 도사, 진산군수, 문천군수 등을 지냈지.

기장현감으로 있을 때 남은 봉록으로 군기(軍器)를 다 보수 하였는데 관료들이 감영에 보고 할 것을 청하자 “관직에 있으면서 국가를 위하여 몸과 마음을 다하는 것은 바로 신하의 직분인데 어찌 공을 바라겠는가.”라고 거절 하였어. 젊은 나이에 관리가 되어 높은 지위에 뜻을 두지 않았으며 여려 군현의 관장을 지냈으면서도 시종 맑고 굳은 지조를 지킴으로써 관직을 그만 둔 후에는 창고에 밥 지을 곡식조차 없을 때가 많았었지. 그리하여 여러 차례 청백리에 천거되기도 하였어.

1610년(광해군 2)고청 서기의 제자인 박희성(朴希聖), 박희철(朴希哲), 민재문(閔在汶)등과 함께 임진왜란으로 폐허가 된 공암서원(孔巖書院-충현서원)을 중건하고 1624년(인조 2)에 충현서원(忠賢書院)으로 사액 받는 일에 앞장섰어. 그 후 사림들에 의해서 충현서원과 연기 봉암서원(鳳巖書院)의 원장으로 추대 되었어.
천성이 효행스러워 부모의 병환에 변을 맛보아 병세를 확인하였으며, 아버지가 돌아가시자 묘 옆에 묘막을 짓고 3년간 시묘살이를 하더니 어머니가 돌아가시자 또, 묘 옆에 묘막을 지어 3년간 시묘살이를 하여 주위 사람들에게 만고의 효자라는 소리를 들었어.

6년 동안 죽만 먹고 시묘살이를 하면서 슬퍼함이 예제(禮制)에 넘었으며 상복(喪服)을 벗지 않았어. 시묘살이의 끝에도 항상 제삿날에는 애곡(哀哭)함이 초상 때와 같았고, 조상을 받드는 예절에 성의와 공경을 다하였고 제사의 절차에도 정성을 다 하였어. 그래서 후손들이 원수산 중턱에 시묘비(侍墓婢)를 세워 놓은 것이야. 부모에게도 효를 다 하였지만 형제간의 우애가 돈독하고 일가친척들 간에 화목함에 힘써서 주위에서 크게 칭송하였지.

1635년 통정대부 첨지중추부사가 되었으며 이듬해 83세의 나이로 세상을 뜨니 전월산 북쪽 기슭에 장례를 치렀지.

월하(月河) 민후건(閔候騫)이 부조(賻助)의 일로 통문을 적어 돌리면서 “선생은 유도를 진흥시킨 뛰어난 선비요, 학덕이 뛰어나신 분인데 하늘이 남겨두지 않으시고 문득 의지 할 바를 빼앗아 가니 배움 없는 후생으로서 이제 장차 어느 곳을 의지 할 것인가.”라고 하였으며 송환기(宋煥箕)는 임정의 행장(行狀)을 지으면서 “송죽 같은 지조로 학문을 즐기어 단연코 속세를 떠난 취미를 가진 인물”이라 칭송하였지.

임정의 묘
또한 이장재는 병암사에 봉안 하는 글에 “유학을 깨달은 큰 선비로 몸소 실천하니 서고청 같은 큰 선비를 선배로 모셨다네, 부모상을 당함에 자식 된 도리를 다하였고 율곡과 우암선생의 학문을 깊이 연구 했더라 ” 하였어. 1654년(효종 5) 효로써 가선대부 한성부 우윤 겸 동지의금부사에 중직 되었으며, 정문을 받았지, 후에 이조판서에 중직 되었고 1805년(순조 5) 병암서사(屛巖書社)에 제향 되었어.

재영 : 아빠 말씀을 듣고 보니 옛날의 효자는 대단했다고 느껴져요.
혼자 6년 동안 묘 옆에서 어떻게 지냈을까요.
지금은 상상도 못할 것 같아요.

아빠 : 그래, 옛 조상들의 효는 모든 것이 마음에서 우러나온 것 이상으로 행동이 뒤 따랐지.

     
 
임영수, 연기 출생, 연기 향토박물관장,국립민속박물관 전통놀이 지도강사, 국사편찬위원회 조사위원, 이메일: ghmuseum@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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