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제 지낸 후 후손 번창해진 마을
산제 지낸 후 후손 번창해진 마을
  • 임영수
  • 승인 2013.03.08 14: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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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영수 칼럼]용의 형상을 닮은 마을 '용호리'..."손 귀해 산제 지내야"

열여섯번째날 - 용호리(龍湖里)

용호리는 백제시대 두잉지현(豆仍只縣)의 지역이었다. 통일신라 시대에는 연산군에 속한 연기현 이었으며, 고려 때에는 청주에 속하기도 하였다. 조선시대에는 연기현(燕岐縣) 이었고, 조선말엽에는 연기군 동일면에 속하였다. 1914년 행정구역 개편 때 연기군 동면에 편입되어 오늘에 이르고 있다. 마을을 끼고 있는 산을 용산(龍山)이라 부르는데 마치 커다란 호수에 용이 노니는 형상을 하고 있다하여 용호(龍湖)라 이름 지었다.

재영 : 용호리에는 아빠께서 산제를 지낸다고 많이 왔던 곳이지요.

아빠 : 그래. 산제 지내는 것을 보기 위해 자주 왔었지.
우선 용호리의 행정구역부터 알아볼까. 용호리는 1, 2, 3구로 구분되어 있는데 자연부락으로는 상룡, 중룡, 하룡, 낡은터(구대), 소정이, 부암(부래미) 등 6개 마을로 구성되어 있어. 용호1구는 하룡, 낡은터, 소정이 3개 마을이고, 용호2구는 상룡과 중룡, 용호3구는 부암(부래미)로 되어 있는데, 3구인 부래미는 마을 앞 출동산에서 산제를 지냈고, 2구인 상룡과 중룡은 용산 동쪽에서 지냈으며, 하룡은 용산의 서쪽 정상에서 산제를 지내다가 부래미와 상룡은 산제를 지내지 않고 있고, 하룡만 계속 산제를 지내고 있어.

   제관 선출하기
재영 : 하룡에서 지내는 산제에 대하여 알려주세요.

아빠 : 산제를 올리는 용호리 하룡마을 뒷산을 용산(龍山)이라 하는데, 이는 마을을 둘러싼 산의 모양이 마치 용이 꿈틀거리는 것처럼 생겼다 하여 붙여진 이름이야. 상룡 뒷산인 노적봉이 용의 머리가 되는데 중룡을 감싸고 하룡으로 내려와 꼬리를 이루지. 하룡에서 산제를 지내는 물봉재는 해발 108m의 나지막한 봉우리지만 산 바로 뒤쪽으로 동진강이 흘러 합강리에서 금강과 합류하고 정상에 올라가면 동쪽으로는 출동산이 북쪽으로는 미호천과 동진뜰이 내려다보이지. 북서쪽으로는 서면 일대가 보이는데, 맑은 날에는 조치원까지 훤히 바라다 보여. 남서쪽으로는 남면 월산리와 양화리, 전월산까지 관망되는 전망이 탁 트이는 좋은 위치에 자리 잡고 있어.

하룡마을 산제는 수백 년 전부터 지내왔다고 하지. 아주 먼 옛날 한 스님이 연기(燕岐)에서 배를 타고 동진나루를 건너오다가 동면 용호리에 있는 산을 바라보니 그 형세가 마치 용이 꿈틀거리는 듯한 것이 결코 평범하지 않았어. 강을 다 건너 하룡마을에 들어오니 모정(茅亭)에서 글 읽는 소리가 들려 스님은 그곳으로 가서 훈장님을 만나 “이 마을은 자손이 적어 다른 마을에 비해 어린아이의 울음소리가 적습니다. 내 이 마을의 형세를 보니 용산의 물봉재에 산제당을 설치하고 제를 올리면 후손들이 번창하고 마을이 편안할 것입니다.”라고 하면서 산제를 지내라고 하였어.

당시 모정에서 글을 가르치던 훈장은 장래헌씨의 5대조인 장태정 선생으로 마을사람들과 상의하여 물봉재에 산제당을 설치하고 매년 음력 9월 그믐날을 정하여 정성껏 제를 올렸어. 그 후 처음으로 7형제를 둔 집안(장승진씨)이 생겼고, 6형제를 둔 곳도 4집(장인진, 임태동, 장필순, 김영길)이나 될 정도로 자손이 번성하게 되었어.

   산제 지내기

그 후 주민들은 현재까지 마을과 가정의 번성과 안녕을 기원하면서 조상 대대로 지내오고 있지. 6․25 때 이 마을사람들은 아무도 피난을 가지 않았는데도 전쟁으로 죽은 사람이 하나도 없었던 일이 모두 산제를 잘 지냈기 때문이라고 믿고 있지.

하룡마을 산제가 존속되는데 가장 크게 기여하신 분이 바로 만송(晩松) 장정순(張正淳, 1905~1983)선생이셔. 그는 한학을 공부하고 후학들을 교육하던 유학자였으나 마을의 안녕을 기원하고 마을 사람들의 화합에 커다란 역할을 하는 산제의 중요성을 인식하고 평소 후손들과 마을사람들에게 산제를 절대 폐지하지 말고 계속 지내라고 당부하셨지. 그리하여 그가 세상을 떠난 후에도 그 자제들과 마을사람들은 그 당부를 잊지 않고 계속해서 일제시대와 6․25전쟁, 새마을운동을 거치면서 단 한번도 중단되는 일 없이 꾸준히 산제를 지내오고 있어.

재영 : 산제는 언제 지내나요?

아빠 : 하룡마을 산제는 매년 음력 10월 초 이튿날 밤부터 초사흗날 새벽까지 진행되지 그러나 실질적으로 하룡마을 산제는 음력 9월 보름이 되면 유사(有事)는 마을주민들 전체를 모이게 한 후 일년 동안 가장 깨끗하게 지낸 사람을 추천받아 제관(祭官)과 축관(祝官)을 선출하지. 제관과 축관이 선출되면 이때부터 모든 주민들은 산제가 끝날 때까지 가능한 마을 밖 출입을 삼가고 비린 음식을 먹지 않아. 그 후 음력 9월 그믐날이 되면 제관들은 이날부터 제당에 올라가서 출입을 삼가하고 정성을 드리기 시작하지. 또 이날부터는 모든 주민이 이발을 하지않고 각 가정마다 인분을 푸지 않으며 부정 타지 않기 위하여 가능한 마을 밖 출입을 삼가하고 이날 마을에 손님이 오게 되면 산제가 끝날 때까지 마을 밖으로 나가지 못하고 머물러야만 했는데 대신에 주민들은 회관에서 정성껏 손님을 대접 하였어.

음력 9월 그믐날부터 몸을 삼가고 정성을 드린 제관과 축관은 10월 초이튿날 밤 자정을 전후해서 산제당에 올라가 제를 올리고 이튿날 닭이 울기 전에 내려왔어. 일반적으로 산제는 마을과 각 가정의 안녕과 번영을 기원하고 주민들간의 화합을 다지기 위하여 지내는데 하룡마을 산제 또한 예외가 아니야. 그러나 다른 산제들이 음력 11월 초에 행해지는데 반하여 하룡마을 산제는 9월 그믐에서 10월 초이튿날 사이에 이루어지는 특색이 있으니 여기에는 특별한 의미가 있어.

이 시기는 추수가 거의 끝나는 무렵이고 추수를 마친 마을 주민들은 그해에 추수한 햇곡식으로 술을 담고 떡과 밥을 하여 산신에게 올림으로써 풍년이 든 것을 감사드리고 내년에도 더욱 풍성한 수확을 할 수 있게 해달라고 기원하는 것이지. 그래서 제관들이 제당에서 나누는 이야기도 누구누구네 농사가 잘 되었다느니, 내년에는 어떤 품종을 심어야 풍년이 들 것이라느니 하는 등 농사와 관련된 이야기만 하도록 정해져 있지.

   제물 진설
산제 기간에 마을에 초상이 난다거나 하는 부정한 일이 생겨서 부득이하게 제를 올리지 못하면 이듬해 정월 열 나흗날 밤 자정을 전후하여 제를 올리지. 이는 일단 부정을 타면 최소한 100일이 지나야 부정이 가시며 해를 넘겨 부정 탄 해가 아닌 새로운 해에 제를 올려야 효과가 있기 때문이야.

재영 : 제관들이 지켜야 할 사항이 있나요?

아빠 : 산제를 지내기 위해서는 제관 2인과 축관 1인을 선출하는데 이는 음력 9월 보름날 마을전체가 회의를 열어 주민들이 일년 동안 가장 깨끗한 사람을 추천하면 유사가 이를 선정하지.

예전에는 마을사람들 전체를 대상으로 엄격하게 생기 복덕(生氣 福德)을 가려 선출하였으나 그 방법이 너무 까다롭고 번거로워서 요즘에는 일년 동안 부정한 일을 하지 않은 가장 깨끗한 사람 가운데 3명을 유사가 선출하는 식으로 간소화 되었다고나 할까. 일단 3명의 제관이 선출되면 연령순으로 제관과 축관을 정하게 되는데, 이때 나이가 가장 어린 사람이 축관을 하게 돼. 제관으로 선출되기 위해서는 집안에 임신하거나 해산한 아녀자가 있어서는 안 되고, 일년 동안 부정한 일을 하지 않아야 함은 물로 부정한 곳에 가서도 안 되지. 그리하여 일부러 제관으로 선출되기 위하여 몸을 깨끗하게 하고 부정한 일을 하지 않기 위해 노력하는 사람들도 많다고 해. 그러나 이를 지키기가 너무 어려워 3번 이상 산제당에 올라간 사람이 없을 정도야.

제관이 정해지면 유사와 주민들이 축하와 격려의 인사를 한 후 제관에게 금기사항과 주의할 점을 신신당부하지. 제관은 음력 9월 그믐날이 되면 제당에 올라가 소롱골 샘을 깨끗하게 품어내고 제당과 산제당 주변을 깨끗하게 청소하지. 또 3일 동안 소롱골 샘물로 몸을 정갈하게 하여 산제를 지내는 날까지 제당에서 생활하면서 비린 음식을 먹지 않고 3일 동안 정성을 다하지. 또 몸에 상처가 나지 않게 조심하는데 만약 작은 상처가 나서 피라도 나게 되면 산제당에 올라 갈 수 없기 때문이지.

예전에는 9월 그믐날 마을 입구와 제관, 축관의 집에 금줄을 치고 마을 출입구 양쪽에 황토를 뿌려 놓아 부정한 것이 출입하지 못하게 막았어. 금줄을 칠 때에는 유사와 제관 3명 등 4명이 참여하여 왼산내끼를 꼬아 소나무가지 4개와 ‘외인금지 산제 올립니다.’라고 쓴 종이 3장을 번갈아 끼워서 금줄을 만들었지. 소롱골 샘에도 금줄을 치고 제관들만 그 우물을 사용하였어. 제관으로 선정된 사람 중 혹 부정탄 이가 있으면 그 사람을 빼고 나머지 제관들이 제를 올리지.

   효자 임양문의 묘
재영 : 제물은 무엇을 사용하나요?

아빠 : 제물은 소머리, 삼색과일, 백설기, 명태, 메(밥), 다시마, 채소류(3가지) 등이지. 채소는 예전에 무, 배추, 시래기 등 그 산에서 나오는 것들만 사용하였어. 그런데 요즘에는 콩나물이나 고사리 등을 추가로 올리기도 하지. 소머리는 반드시 황소머리를 쓰고 마을 형편이 소머리를 못 쓰면 검은 수퇘지를 대신 올리지.

재영 : 산제당에서 일어난 이야기에 대하여 들려주세요.

아빠 : 장달진씨가 제관으로 선출되었을 때 이야기야. 그 해는 제관 중 한사람이 사정이 생겨서 못 올라가고 두 명의 제관만 올라갔지. 두 사람은 부정한 것을 보지도 듣지도 않고 비린 음식은 입에 대지도 않는 등 제관이 지켜야할 금기사항을 잘 지켰어. 그런데 두 사람이 산제에 쓸 수퇘지를 잡아서 지게에 지고 제당 문 앞에 가져다 놓은 후 제 올릴 시간을 기다리면서 방안에서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고 있을 때 한 사람이 “계란을 삶아 술안주로 먹었다.”는 이야기를 하자 갑자기 밖에서 지게가 넘어지는 소리가 크게 났어. 두 사람은 혹시 산짐승이 내려와 재물로 쓸 돼지를 건드려 지게가 넘어 갔나 얼른 문을 열어 보았는데 분명 지게와 재물은 그대로 있고 소리가 어느덧 산꼭대기에서 또 들려왔어. 이에 두 사람은 자신들이 부정한 이야기를 했기 때문에 산신님이 화가 나서 낸 소리로 알고 소롱골 샘으로 내려가 목욕재계를 한 후 몸과 마음을 정갈하게 한 후에야 산에 올라 산제를 지냈지.

산제를 잘 지내어 복을 받은 이야기도 있어. 이 마을에 사는 임익경씨는 유난히도 산제에 정성을 들이는 사람이었어. 마흔이 넘도록 아들이 없어서 걱정하였는데 산제를 정성껏 올리면 아들을 낳을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해서 제관으로 선출되기 위하여 일년 내내 부정한 것을 보지 않고 조심한 결과 제관으로 선출되었어. 그 해 산제당에 올라가 지극 정성으로 제를 올리니 다음 해에 마침내 아들을 하나 낳아 4형제를 두게 되었지.

재영 : 산제이야기는 남면의 원수산 산제와 금남의 괴화산 산제 그리고 동면의 용산 산제가 계속 이어지고 있는데 과연 세종시가 들어섰을 때 산제를 계속 지내게 될까요?

아빠 : 그래. 새로운 도시를 건설한다며 이러한 전통문화를 없애버리면 새로운 도시가 의미 없다고 보거든. 세종시는 전통을 바탕에 둔 사람이 살아가기에 편리한 도시를 만들어야지. 무조건 새로운 것이 좋은 것은 아니니까. 그러니 세종시가 들어서도 어떠한 방법이 되었던지 이러한 중요한 문화는 계승시키는 것이 옳을 것이야.

   효자 임양문의 정려
이곳 지명에 대하여 이야기 해 줄까?

재영 : 예. 골짜기와 마을, 산 이름의 유래를 들으면 참 재미있어요.

아빠 : 용호리는 상룡, 중룡, 하룡이 큰 마을이고, 부래미가 좀 떨어져 있는 마을이야. 지명 유래는 여러 가지인데 우선 ‘치바위’라 불리는 바위가 있는데 용산에 있는 다락바위 아래에 위치 하지. 동진강이 흘러 이 바위 앞으로 흐르므로 물이 바위를 치받는다고 하여 ‘치바위’라 부른다고 하는데 어떤 이는 바위의 생김새가 곡식을 거르는 치와 같다 하여 ‘치바위’라 부른다고도 했어.

‘출동산(出洞山)’은 부암 앞에 있는 산으로 장군영병출동형(將軍領兵出洞形)의 명당이 있는 산이야. 이곳에 큰 마을이 생길 것이라는 뜻으로 출동산(出洞山)이라 쓰였다는 이야기도 있어.

‘진고개’는 소정이에서 부암으로 가는 낮은 고개를 ‘진고개’라고 부르는데 어떤이는 이곳이 임진왜란 때 왜군과 싸우다 진 곳이라 ‘진고개’라 부른다고도 하는데 사실인지는 모르겠어.

‘중룡(中龍)’은 용호리의 중앙에 위치하여 용산에서 용의 허리 부분을 차지하여 언젠가는 용호리에서 훌륭한 인물이 배출될 것이라는 말이 있어. 현재 부안임씨들이 많이 살고 있지.

‘소정이’는 백수봉 아래에 있는 마을로 소나무 정자가 있다 해서 송정이라고 부르던 것이 변하여 소정이라 부르지. 여기에도 부안임씨들이 많이 살고 있어.

‘상룡(上龍)’은 용호리의 맨 위쪽에 있는 마을로 용의 머리에 해당하는 부분이라 상룡이라 부르지. 진주강씨(晋州姜氏)들이 많이 살고 있어.

‘물봉재’는 중룡 뒤에 있는 산을 물봉재라고 부르지. 이 고개는 모양이 꼭 용과 같아서 ‘미리재’, ‘미리봉(峯)’이라 부르던 것이 변하여 지금은 ‘물봉재’ 라고 부른다고 해.

‘다락바위’는 노적산 서남쪽 중턱에 있는 바위를 다락바위라고 부르지. 바위가 마치 다락과 같이 생겨서 다락바위라고 부르는데 비가 오면 이 바위 아래에 20여 명이 피할 수 있는 곳이야.

‘낡은터’는 중룡 동쪽에 있는 마을이야. 폐허가 되었던 옛터에 마을이 생긴 곳이지. 그래서 구대(舊垈)라고도 부르지.

‘노적산(露積山)’은 상룡과 불암 뒤에 있는 산을 ‘노적산’이라 부르고 있어. 산의 모양이 꼭 노적가리처럼 생겼다 하여 노적산이라 부르지. 팔봉산의 맥을 이은 산으로 산 아래 동진강이 흘러 경치가 일품인 산이야.

‘불암(佛岩)’은 노적산 동쪽에 있는 마을로 ‘부래미’ 라고도 부르지. 마을 뒷산 중턱에 옛 절터가 있는데 커다란 바위 아래이지. 그래서 이곳을 부처를 모신 바위라는 뜻에서 불암으로 불리는 것 같아.

‘동진나루’는 용호리 서쪽에 있는 나루야. 연기의 동쪽에 있다 하여 동진(東津)이라 부르며 금강에 합류하여 서해로 흐르지.

재영 : 아빠. 저쪽 길가에 비석이 하나 서 있는데 무슨 비석인가요?

   진주 강씨 열녀비

아빠 : 저 비는 열녀비라고 하는데 임식의 처 진주강씨의 비이지.

재영 : 열녀는 남편에게 잘하여 받는 상이지요?

아빠 : 그래. 조선시대에는 부모에게 효를 잘하면 효자, 효부라고 불렸고, 나라에 충성하면 충신이고, 남편에게 잘 한 아내를 열녀라고 부르지. 이 비는 진주강씨가 남편이 죽자 스스로 목을 매고 따라 죽은 열녀라 선비들이 관아에 알리자 관찰사가 나라에 보고하여 1666년(현종7년)에 정문의 특전을 받은 것이야. 이 열녀의 행적은 종가집 대문에 현판을 써서 걸어두는 정문 형태로 만들어졌던 것인데 세월이 지나면서 현판이 낡아 퇴락하게 되자 1731년(영조7년)에 후손 임광후가 마을 앞에 열녀비를 세웠던 것이지.

진주강씨에 대한 기록은 「여지도서」「호서유지」「조선환여승람」「연기지」에 수록되어 있어. 진주강씨는 강석(姜碩)의 딸로 부안임씨의 임식에게 출가하였으나 남편이 일찍 세상을 떠나자 남편을 따라 스스로 목을 매어 자결함으로써 남편의 뒤를 따랐지. 묘소가 동면 호암 북록(일명 여수회)에 위치하고 있어.

재영 : 비가 길가에 초라하게 서 있는 것이 안타깝게 보여요.
저쪽 마을회관 옆에 있는 정려와 너무도 모습이 다르게 서 있어요.

아빠 : 그래. 상룡마을에 있는 정려는 효자 정려로 효자 임양문의 정려이지.
임양문은 1744년 연기군 동면 용호리에서 임시무(林時茂)와 정세평의 딸 진주정씨(1709~1782) 사이에서 태어났어. 형인 임양조(林養祚)와 함께 양친을 모시고 어렵게 살아가던 중 부친이 병으로 중태에 빠지자 엄동설한에 산약을 캐어 연명하게 하였으며 부모가 돌아가시자 3년 간 극진히 시묘살이를 하였어. 1810년 67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났어. 그의 묘소가 동면 용호리 산54-1번지 출동산 서쪽 기슭에 위치하고 있지.

임양조는 동생인 임양문과 함께 효로써 부모를 봉양함이 한 고을의 모범이 되므로 쌍효라고 말들을 하였지. 이러한 내용이 「조선환여승람」과 「연기지」에 기록되어 있어. 1937년 유인철이 지은 정려기의 내용에 따르면 임양문은 타고난 성품이 온량하고 청명하여 6~7세 때 이미 효경과 소학을 배워 어버이를 섬김에 효성이 지극하여 아침저녁으로 문안드리는 것이 성인과 다름이 없었으며 장성해서는 밖에 나가고 집에 돌아와 아뢰는데 법도를 잃지 않고 때에 맞추어서 의복을 갖추어 드리고 맛있는 음식을 장만하여 봉양하였어.

아버지가 병으로 중퇴에 빠지게 되자 의복과 허리띠를 벗지 않았고, 잠시도 그 곁을 떠나지 않았으며 아버지의 대변을 맛보아 병세를 시험하였다고 했어. 하루는 의원을 맞이하고자 길을 떠나는데 용한 의원이 스스로 찾아와 산삼이 아버지의 병에 좋다고 하니 엄동설한 임에도 불구하고 산삼을 구해드려 목숨을 연장시켰으며 아버지가 돌아가시자 매우 애통해하여 호곡소리가 끊이지 않았다고 했어.

   임광수씨댁 방문

어머니 마저 70이 넘은 연로한 나이로 자리에 눕게 되자 집안의 크고 작은 일과 마을에서 들은 바를 반드시 한글로 써서 보여드렸으며, 나이 오십에도 오히려 어린아이처럼 회롱하여 어머니를 기쁘게 하여 드렸어. 부친상과 모친상 모두 3년 간 시묘살이를 하였는데 바람이 불거나 비가 오는 날에도 매일 밤낮으로 성묘하기를 게을리 하지 않았어. 상장(喪杖)을 끌고 오르내린 자리가 길이 되고 무릎을 꿇고 앉았던 자리가 구덩이를 이루었으며 항상 묘소 곁의 송추(松楸)를 어루만지며 울부짖기를 초상 때와 같이 하니 그 눈물에 나무가 모두 말라 죽었다고 하였지.

     
임영수, 연기 출생, 연기 향토박물관장,국립민속박물관 전통놀이 지도강사, 국사편찬위원회 조사위원, 이메일: ghmuseum@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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