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대인, 앵무새가 되어서는 안됩니다"
"현대인, 앵무새가 되어서는 안됩니다"
  • 김중규 기자
  • 승인 2013.02.22 17:12
  • 댓글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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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터뷰]소설가 김제영..."진보 의식으로 조치원 문학이끌어..."

   조치원 문학의 대모(大母) 김제영 선생은 "현대인은 자신의 생각을 말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안면이 있어요. 반가워요. 그 때 내가 무슨 글을 썼더라. 아! 그렇지, 정몽헌 자살에 대해 썼지.”

조치원 문학계의 대모(大母), 소설가 김제영 선생은 기자를 보더니 반색했다. 대전에서 인터넷 신문을 하던 2003년, 김 선생은 독특한 필법으로 기고를 자주 했다. 거의 독설에 가까운 자신의 주장을 거침없이 펼쳤던 칼럼리스트로 필자는 기억하고 있다. 당시 75세, 적지 않은 나이였다. 2003년 12월 마지막 날, 그는 ‘노무현을 그만 흔들고 그만 씹어라’라는 제목의 글에 이렇게 썼다.

‘...김대중 전 대통령 조차 묵과한 청남대 개방이라든가 균등한 지방 발전의 분권화 구상 등은 참신한 노무현의 창의성, 행정력의 현시라고 할 수 있겠다. 민주당이 노무현을 질타함은 이해가 간다...그러나 한나라당의 매도는 웃기는 일이다. 까짓 상고 출신이 감히···잠재된 권위의식이 애당초 노무현의 집권을 얕잡아 본 자만에서이기 때문이다. 노무현은 포장할 줄도 책략을 세울 줄도 모른다. 그래서 세련되지 않은 언어들이 마음먹은 대로 불쑥불쑥 쏟아진다...’

제목도 자극적이지만 글, 또한 에두르는 게 없다.
올해 여든 하고도 다섯을 더 한 노 작가는 19일 점심시간에 조치원읍 원리 집을 찾아간 기자의 손을 잡아 끌면서 책 냄새 물씬한 방에 앉혔다.

“나 좀 봐, 물 얹어 놓고 불을 안 켰네요. 요새 내가 이래요.”

천상 여자였다. 찻물을 끓이면서 커피 폿에 전원 연결을 잊었던 모양이다. 나이를 탓하면서 자리에 앉자마자 ‘북핵문제’를 들고 나왔다.

“남북 관계는 평화협정을 막으려는 세력과 하려는 세력들 간에 싸움이 되고 있어요. 그 뒤에는 군수산업을 장악한 자본가들이 도사리고 있고... 장사꾼들이 가장 두려워하는 게 평화지. 그게 어느 측면으로 보면 남북한을 자유롭게 오가려는 양심세력과 그렇지 않는 집단 간에 싸움일 수도 있지.”

사전에 진보적인 사고를 가진 분이라는 얘기를 들었지만 이어지는 통합진보당 이석기 의원, 이정희 대표 등을 평가하는 가치관을 보고서는 ‘많이 앞 서 가는 분’이라는 결론을 내렸다. 화제는 남북협상을 원했던 김구 선생 암살에다 자신이 젊은 시절 모셨던 조봉암 선생, 그리고 인혁당 사건 등 한국 현대사의 족적을 더듬었다. 특히, 그는 지난 번 대통령 선거를 새누리당의 ‘이이제이’(以夷制夷)전략으로 민주세력들이 분열하면서 패배를 한 것으로 분석했다. 민주통합당과 통합진보당 간의 불협화음과 노선 차별화를 염두에 둔 발언으로 들렸다.

김제영 선생은 인터뷰를 하는 동안 줄곧 정확한 기억과 설명으로 기자를 놀라게 했다.
“문재인은 현대사를 가장 잘 꿰뚫고 있어요. ‘사람이 먼저다’라는 슬로건은 핵심을 알고 있다는 뜻이죠. 박정희를 산업화 역군이라고 하는 데 내 소설 ‘우문(愚問)의 설계도’의 모델이 바로 박정희입니다. 저는 달리 평가를 합니다.”

박 전 대통령이 화제가 되자 그는 힘들게 몸을 일으켰다. 그러면서 “내가 이렇게 일어나려면 힘들어요”라며 조갑제가 쓴 박정희 평서 ‘내 무덤에 침을 뱉어라’를 찾아왔다. 한동안 조갑제의 책을 얘기하면서 한동안 현대사를 넘나들었다. 그리고 다시 북핵 문제까지 오는 데는 한참의 시간이 걸렸다.

“현대를 사는 사람은 모두가 앵무새가 되어서는 안 됩니다. 자기 목소리로 울어야 합니다. 자신의 머리로 생각하고 말해야 한다는 얘기지요. 세계를 제패한 군수산업의 수족이 되지 말고 자기 목소리로 우는 새가 필요합니다. 진보 진영에도 앵무새가 된 사람이 많아요. 다만 이석기, 이정희는 그렇지 않습니다.”

겨우 필요한 덕목을 질문하면서 인터뷰어를 필자가 원했던 프레임으로 끌어들였다. 시간은 약 40여분이 지난 후였다. 많은 말을 들어주는 것도 중요한 대화 중의 하나라고 생각하지만 오후 일정 때문에 필요한 얘기를 조금은 빨리 나누고 싶었다.

- 선생님께서는 살아오시면서 가장 기억에 남는 일은 무엇이죠.
“기자시험 합격입니다.(1949년 민국일보 문화부 기자를 역임했다) 편집국장이 ‘어느 부서로 가고 싶으냐’고 물어서 ‘문화부’라고 했습니다. 평소 꿈이 문학을 하는 것이였는데 그걸 하려면 신문사에 들어가는 게 가장 좋을 것 같았죠. 내 인생의 전환점이 되었어요.”

- 이화여고 졸업 후 죽산(竹山) 조봉암 선생 비서로 일했는데 그것과 문학과도 연관이 있습니까.
“그 때 농림신문사인가 어디에서 죽산선생에게 원고 청탁이 왔어요. 선생님은 그걸 하실 시간이 부족하니까 저보고 쓰라고 했어요. 20살 정도 되었을 때죠. 몇 군데 글을 보냈는데 그게 감동적이었다는 평을 들었죠. 그래서 문학에 대한 자신감이 생겼지요.”

그러면서 신문사 입사 후기를 늘어놓았다. 기자를 뽑으면서 자격 제한을 해서 그걸 항의하러갔다가 편집국장을 만났던 일, 20살 약관의 나이에 100명 중 5명을 선발하는 기자가 된 과정, 그리고 너무 잘 써버린 논문 시험으로 인한 ‘공산당 프락치’ 오인 사건 등등... 참으로 언론계 대선배에게서만 들을 수 있는 ‘호랑이 담배 먹던 시절’ 얘기를 기록했다.

김제영 선생은 1928년 제주 출생이다. 그리고 25살이 되던 해 조치원읍에 정착을 했다. 그 과정이 궁금했다.

“아버지(김관회)께서 3.1운동 때 충남지역을 지휘하던 분이었죠. 어른은 ‘독립운동을 내세우는 게 아니다’라는 생각을 가지고 있었죠. 요컨대 조선인으로서 독립운동은 당연하다는 뜻이죠. 와세다 대학을 졸업하고 공주 영명학교 교사를 할 정도였으니까 지식인이었지. 그런데 일본 놈들이 조선 사람들에게 존경을 받는 아버지를 잡아넣기 위해 당시 금융조합이사에게 보증을 선 것처럼 꾸몄어. 모든 재산을 털어 빚을 갚았지만 다 못 갚았어. 그래서 하는 수 없이 일본으로 도망갔다가 제주도로 다시 들어왔어요. 거기서 태어나서 제주출생인 된 것이죠.”

 
김 선생 작품에 고문과 사형 폐지 등이 소재가 되는 이유는 아버지에 대한 기억 때문이다. 3살 때 서울로 이사갔다가 해방 후 예산 여중 교장으로 재직하던 아버지를 따라 대술초등학교에서 어린학생들을 가르치기도 했고 합덕국민학교에서 역시 교사로 재직하기도 했다. 그러다가 1948년도 조봉암 선생 비서로 있다가 글을 쓰겠다는 일생의 목표를 위한 다양한 경험 때문에 신문사에 들어갔다. 불과 4개월 정도 기자생활을 했는데 마침 언니문제로 잠시 피신한 게 조치원 사람이 된 계기가 됐다.

- 선생님이 문학작품활동을 한 동기가 있습니까.
“어릴 적 꿈이 동기죠. 문학은 인간 삶의 표현입니다. 모든 예술이 그렇죠. 춤은 동작으로, 미술은 조형물과 회화로, 삶의 언어인 문학은 글로써 표현을 하지요. 삶의 표현이 곧 문학이죠.”

- 정치와 예술도 그런 면에서 일맥상통하는 점이 있는 것 같은데요.
“정치와 예술은 같습니다. 창의성이 있어야 한다는 점에서 더욱 그렇지요. 창의성이 없는 정치는 없는 것이나 다름이 없어요.”

대화는 흘러 흘러 조치원 문인들의 동호인 집 ‘세종 문학’에 까지 이르렀다. 세종문학은 이 지역을 지키는 몇몇 문인들이 끊어질 듯한 명맥을 열정으로 연결시킨 동인회집으로 이번에 18집을 냈다. 거기에 소설가 김제영 선생의 특집판을 만들었다. 약 100페이지에 달했다. 대전일보 기자를 역임한 안휘(본명 안재휘)씨는 ‘소설가 김제영 작품론’을 실으면서 “사회문제 직시하는 지식인 고뇌 가득”으로 요약했다. 소설집 ‘거지 발싸개 같은 것’, ‘우문의 설계도’, 1960년 서울신문 신춘문예 입선작 ‘석려’(夕麗) 등을 저널리스트 문체로 평해 놓았다.

“고마운 일이죠. 이 사람들이 정말 좋은 문학을 하겠다는 의지를 갖고 있구나 하는 것을 느꼈죠. 안재휘가 내 평을 썼는데 내가 한국에 자랑할만한 인물로 생각하고 있는 언론인이죠.”

그는 안휘씨가 대전일보 문화부 기자 시절 아버지 김관회를 발견해주었다고 덧붙였다. 그리고 기자협회장을 지낸 경력 등을 내세우면서 ‘지아자’(知我者), 즉, ‘나를 알아주는 사람’으로 평가하고 있었다.

   책들로 둘러싸인 거실에서 인터뷰를 하고 있는 김제영 선생
“세종의 소리라고요. ‘소리’가 참 좋아요. 그게 더 반가웠어요. 세종시는 노무현의 창의성이 들어있어요. 아무도 생각하지 못하는 일을 해내지 않았어요. 미국과의 관계에서도 그렇고요.”

김 선생은 “내가 더 이상 할 게 뭐가 있겠느냐” 며 “하고 싶은 말 다 토해놓고 한 사람이라도 동조해주면 영광스럽고 보람스런 일”이라며 소원을 얘기하는 것을 마지막으로 인터뷰를 마쳤다.

“진보든 보수든 우리가 처한 현실을 남의 생각으로 인식하지 않고 우리 현대사에서 스스로 깨닫는 현명한 보통사람이 모두 되었으면 합니다.”(연락처) 044-862-53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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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치원읍 원리 2013-02-25 08:57:02
역시 지역의 어른이십니다. 좋은 말씀 잘 들었습니다. 앞으로도 건강 유지하시면서 진보의 목소리를 대변해줘 사회 균형을 잡아주길 바랍니다.

그렇습니다. 2013-02-25 07:41:32
김제영 선생님의 말씀이 감동을 받습니다. 앵무새가 되어서도 안되고 권력의 나팔수가 되어서도 안되는거죠.선생님의 훌륭한신 말씀 가슴에 새기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