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치원 포기해야 한다"..딘 소장 표정 '침통'
"조치원 포기해야 한다"..딘 소장 표정 '침통'
  • 윤철원
  • 승인 2019.07.15 11: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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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철원 칼럼]개미고개 전투 1950년 7월 9일부터 16일까지 일주일의 조치원 전투<하>
전투에는 졌지만 결과적으로 전쟁은 승리로 이끌어...성공한 지연전이 결정적 역할

지금부터 꼭 69년 전. 한국전 발발 초기 기습공격을 받은 국군과 미군은 일방적으로 밀렸다. 일차 방어선으로 정해진 금강 전투는 쌍방이 치열한 접전을 벌였으나 개미고개에서 많은 희생자를 내면서 결국 무너지게 된다. 이 과정에 나라를 위해 고귀한 생명이 희생됐으며 세월이 흐르면서 점차 희미한 기억 속으로 사라지고 있다. 1950년 7월 8일은 바로 조치원 전투가 시작된 날이다. 생명을 담보로 치열했던 당시 상황을 상,중,하로 나눠 연재한다./편집자 씀

금강방어를 위해 결사항전을 벌였던 개미고개 전투 희생자들은 전쟁 발발 69년이 흘렀지만 영웅들의 활약상을 매년 조명하고 있다.

조치원을 포기하고, 금강방어선도 무너져

제24사단장 딘 소장은 시시각각 들어오는 전황과 앞으로의 작전계획 구상에 눈코 뜰 새 없이 바쁜 시간을 보내고 있었다. 대구와 포항의 후속부대를 사단이 있는 대전에 집결토록 이동명령하면서 일선의 전황을 지켜보았는데 저녁 무렵 21연대장으로부터 3대대가 참패했다는 보고를 접하였다.

조치원을 포기해야 할 상황이라는 판단에 딘 소장의 얼굴은 굳은 표정이 역력했다. 결국 공병부대에게 조치원에서 금강에 이르는 도로에 장애물을 설치하고 21연대의 철수를 도우라는 명령을 내렸다.

7월12일 오후, 조치원 북쪽을 지키던 21연대 1대대는 2,000여명의 북한군으로 부터 동·북·남의 3면에서 공격을 받게 되었다. 이러한 상황을 놓고 21연대장은 고민을 거듭하다가 결국 철수 명령을 내렸다. 조치원 사수를 고집할 경우 전날 3대대와 같은 궤멸상태를 면치 못할 것이라는 판단이 섰기 때문이었다.

철수명령에 따라 스미스 중령은 1개 중대씩 뒤로 빼면서 남은 병력은 적의 공격에 대비하도록 지휘하여 희생 없이 대대병력을 조치원으로 집결하는데 성공하였다. 그리고 잠시 후, 조치원역 부근에 있던 21연대 본부에 적의 포탄이 작렬하는 가운데 차량으로 국도를 이동하여 금강을 건넜다.

금강을 건넌 21연대는 대전으로 이동하여 재정비를 할 계획이었다. 그러나 그때까지 금강을 방어임무를 수행해야할 제19연대가 도착하지 않았기 때문에 그들이 도착하는 다음날까지 금강방어선을 지킬 수밖에 없었다. 7월12일 조치원을 점령한 북한군은 저항 없이 남하하여 그날 밤 금강 이북 전역을 장악하였다. 그리고 15일까지 수차례 공격을 가하면서 금강도하를 위한 준비에 열을 올렸다.

7월16일 새벽 3시, 북한군 제3사단은 포병공세를 앞세우고 3면 공격을 개시했다. 미군은 포병의 조명탄 사격으로 금강을 낮처럼 밝히면서 북한군의 도하를 잘 막아냈다. 그러다가 통신장애와 포병의 판단착오로 약20분간 조명탄 지원이 되지 않았다.

이러한 기회를 놓칠 리 없는 북한군은 칠흑 같은 어둠을 틈타 보트와 뗏목으로 나성리에서 대평리까지 강을 건너는데 성공하였다. 그리고 일부병력은 동쪽 미호천을 우회하고, 또 일부는 서쪽으로 우회하여 주요도로와 거점을 장악함으로써 전·후방부대 간 연락과 지원을 차단하였다.

이러한 적의 공세에 제19연대장 멜로이 대령은 발산리 연대본부에서 용포리까지 역습을 시도하여 가동 뒷산을 일시 탈환하기도 하는 등 적극적으로 대응하였으나 사방을 포위한 적의 공세에 하루를 버티지 못하였다.

이에 따라 전선의 장병들은 적군을 피해 소규모 단위 또는 각자 길을 찾아 대전으로 철수하게 되었는데 두만리를 점령한 북한군이 국도를 차단하는 바람에 혼란에 빠져 병력손실은 더욱 커질 수밖에 없었다.

전투에서 졌으나 전쟁은 승리로... 성공한 지연전 평가

지금까지 6.25전쟁 초기에 세종지역에서 있었던 전투상황을 살펴보았다.

파죽지세로 천안까지 남진했던 북한군의 공세를 세종시 지역에서 8일간 지연시킨 이 전투는 연합군의 반격에 필요한 시간을 확보하는데 결정적으로 기여하였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특히, 완강했던 전의전투 이후 북한군은 낮 시간 이동을 포기하고 야간행군으로 바꾸었는데 이 때문에 남진속도가 늦춰지게 되었다.

참전용사비에 새겨진 영광의 이름들, 후세에 까지 길이길이 전달되길 바란다.

어떤 이들은 세종시 지역전투가 미군이 참패한 전투라고 하나, 전차를 앞세운 북한군 2개 정예사단을 상대로 2개 대대로 편성된 1개 연대가 싸운다는 것은 당초부터 승전을 목표한 것이 아니었다. 막강한 무력에 밀려 속수무책으로 후퇴하는 상황에서 지원군이 도착할 때까지 시간을 벌기위한 목표를 훌륭하게 달성한 전투였으나 희생의 대가가 너무 컸다.

그렇지만 이러한 희생이 있었기에 인천상륙작전을 비롯한 연합군의 반격이 성공할 수 있었던 것이다. 따라서 세종시 지역에서 8일간 전개된 전투는 겉보기에 미군이 패전한 듯하나, 내용면에서 성공한 지연전이라는 평가를 받고 있다.

요즘 우리정부의 노력으로 북미간 대화가 이루어지고 있다. 이러한 분위기가 북한의 비핵화와 더불어 인류평화를 위한 희망이 되고 있는 것도 사실이다. 그러나 이러한 분위기에 휩싸여 아팠던 과거를 잊어서는 안 될 것이다. 특히, 우리가 어려움에 처했을 때 달려와 희생한 분들을 잊어서는 더욱 안 될 일이다.

그 젊은 청춘들이 무엇이 아쉬워 잘 알지도 못하는 나라에서 무엇을 위해 목숨을 바쳤는가? 자기의 목숨과 바꿀 만한 어떤 가치를 지키기 위하여 헌신한 것 아닌가?

이 시간 빅슬러 소대원이 지원을 요청하는 절규가 들리는 듯하다. 개미고개 능선에 작렬하던 포화와 칠흑 같은 밤 금강을 대낮처럼 밝히던 조명탄의 불꽃이 보이는 듯하다. 참으로 처절했던 그 당시를 그려보며 삼가 영웅들의 영전에 명복을 빈다.

1950년 7월9일부터 7월16일까지 대한민국 세종시 지역에서 청춘을 바치신 미 제24사단 제21연대와 제19연대 전몰장병을 추모하고, 참전용사들께 진심어린 감사를 드리면서...

이 글을 쓴 윤철원은 세종시 상하수도과장으로 지난 2017년 정년퇴임을 한 조치원 토박이다. 조치원읍장 재직 당시 세종시로 명칭이 변경되면서 전통과 역사에 대한 시민 의식이 부족한 점을 아쉬워하면서 지역문화 연구에 매진했다. 이후 세종시 향토사 연구위원으로 활동하면서 지역과 관련한 역사를 찾아내 후손들에게 전해주는 역할을 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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