치열한 공방전 벌였던 '개미고개'.."무조건 사수하라"
치열한 공방전 벌였던 '개미고개'.."무조건 사수하라"
  • 윤철원
  • 승인 2019.07.10 08: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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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철원 칼럼]개미고개 전투 1950년 7월 9일부터 16일까지 일주일의 조치원 전투<중>
전날 밤 매설한 대전차 지뢰...하나도 폭발하지 않아 아군 불리로 전세 급전

지금부터 꼭 69년 전. 한국전 발발 초기 기습공격을 받은 국군과 미군은 일방적으로 밀렸다. 일차 방어선으로 정해진 금강 전투는 쌍방이 치열한 접전을 벌였으나 개미고개에서 많은 희생자를 내면서 결국 무너지게 된다. 이 과정에 나라를 위해 고귀한 생명이 희생됐으며 세월이 흐르면서 점차 희미한 기억 속으로 사라지고 있다. 1950년 7월 8일은 바로 조치원 전투가 시작된 날이다. 생명을 담보로 치열했던 당시 상황을 상,중,하로 나눠 연재한다./편집자 씀

한국전 당시 치열한 공방을 벌였던 개미능선 일대. 개미능선 좌측에는 미국 3대대, 우측은 K중대가 진지를 구축하고 있었다.

3대대 역습에 성공하다

제3대대 진지로 철수한 21연대장은 3대대장 젠슨 중령에게 “즉시 역습을 가하여 1대대 진지를 탈환하라”고 명령하고 철수병력과 함께 조치원에 있는 연대본부로 복귀하여 부대를 수습하였다.

연대장으로부터 역습명령을 받은 3대대장 젠슨 중령은 14시 M-24 경전차 2대의 엄호를 받으면서 전의 134고지를 향해 공격을 실시하였다. 이 것이 북한의 T-34전차에 대응하여 미군의 M-24 경전차가 벌인 첫 전차전이었으나 결과는 미군 전차의 완벽한 패배였다.

미군전차는 선공으로 북한군 전차1대를 파괴하기도 하였지만 곧 북한군의 전차에게 2대가 모두 파괴되는 수모를 겪었다. 상대적으로 장갑이 얇았던 M-24 경전차는 북한군 탱크의 상대가 되지 않았던 것이다. 그럼에도 3대대는 134고지 탈환작전을 성공하였는데 해가 저무는 바람에 빅슬러 소대가 옥쇄한 오야고지 뒷산은 탈환하지 못하였다.

21연대장은 이러한 상황을 저녁 무렵 사단장 딘 소장에게 보고하였다. 이에 사단장은 “적이 전의로 집결하고 있는 상황에서 3대대는 너무 근접해 있다. 따라서 새벽 전까지 당초 3대대진지(개미고개 능선)로 철수하라. 그리고 조치원을 잃으면 한국군 보급로를 잃게 됨을 명심하라”는 명령을 하달하였다. 이때가 20시45분이었다.

이에 3대대는 자정 직전 철수하여 당초 진지인 개미고개능선으로 복귀하였다. 그런데 자세히 보니 경부선 철로 서쪽에 구축해 놓은 K중대 진지를 적들이 점령한 것이 아닌가! 1시간 가까이 각축전을 벌인 끝에 고지를 탈환하고 주진지로 돌아온 3대대는 밤새도록 진지보수와 대전차지뢰 매설작업을 실시하였다.

7월11일 새벽, 여명 전 시작된 적의 공세는 엄청나게 날카로웠다. 그동안 선봉에 섰던 북한군 제4사단이 7월9일 미공군에게 당한 폭격과 10일 1대대의 완강한 저항으로 받은 타격이 심하여 뒤로 빠지고, 뒤따르던 제3사단이 선봉에 나서 치루는 첫 전투였기 때문이었다. 북한군 3사단은 전례 없는 보·전·포 협동공격으로 정면 돌파와 측면 포위작전을 벌여 3대대를 단번에 궁지로 몰아넣었다.

먼저 북한군의 포화가 작렬하였는데 명중률이 높았다. 전날 밤 K중대진지를 일시 점령하였던 북한군이 3대대의 주진지를 관측한 자료로 가한 포격이었기 때문에 주요시설이 피폭되었던 것이다. 실례로 도로변에 위치한 3대대 지휘소가 피격되어 통신지휘소와 탄약저장고가 폭파되었는데 이로 말미암아 연쇄폭발을 일으켜 상당수 대대병력을 상실하였다.

당시 한국전쟁에 참여했던 미군들이 포사격을 하고 있다.

미군의 통신수단을 단절시킨 북한군의 탱크는 국도를 돌파하여 정면 공격을 가하는 동시에, 1.000여명의 병력을 좌우로 나누어 진지를 공격하였다. 그리고 일부는 멀리 우회하여 부상병 후송과 탄약보급을 차단하기 위하여 후방도로를 점령하였다. 초기에 통신수단을 잃은 대대는 탱크가 눈앞에 닥쳤음에도 화력지원을 요청할 길이 없어 발만 구르는 상황이 되었다.

3대대 참담한 타격을 입고... 개미고개능선에서 철수

오전 6시 30분 경, 적 전차4대가 지뢰지대를 뚫고 도로를 따라 돌진하였다. 전날 밤 매설한 대전차 지뢰가 있었으나 이상하게 하나도 폭발하지 않아 적에게 타격을 주지 못함으로써 전세는 급전직하의 상황에 휘말렸다.

이러한 혼란 속에서 길 건너 K중대는 적의 기관총에 의하여 퇴로를 위협 받는 상황에 처하였다. 이에 스피어 일병이 권총을 지니고 기관총에 접근하여 적병에게 사격을 가했으나 실탄이 없었다. 다급하게 격투를 벌여 기관총을 빼앗았으나 또 다른 적의 사격을 받고 중상을 입었다.

이와 같은 혼전을 거듭하다가 낮 12시경 3대대 진지가 모두 유린되었다. 어쩔 수 없이 각 개별로 조치원으로 철수하게 되었는데 이 과정에서 3대대장 젠슨 중령이 전사하고 L중대장 콕스 대위가 실종되기도 하였다.

조치원으로 가는 후방 1km 지점의 국도는 이미 북한군에게 차단되었기 때문에 대부분 병력은 조천 건너 청남리 방향으로 퇴로를 찾아 철수하였다. 그러나 L중대 1소대장 버나드 소위는 적의 도로 차단 망을 강행 돌파하여 조치원에 집결하였다. 버나드 소위는 스미스 중령과 함께 오산 죽미령 전투에 참가하였다가 대전에서 부대 재편 시 3대대 1소대장으로 보직된 청년장교였다.

이날 조치원에서 수습된 3대대병력은 당초 667명 가운데 장교8명과 사병 142명이었다. 이에 21연대장은 이들 150명으로 1개 화기중대와 3개 소총 부대를 임시 편성하였다. 이후 7월15일까지 실종되었던 322명이 복귀하였다고는 하나 이날 전투에서 3대대는 상당한 인원이 전사하거나 실종되는 손실을 입었던 것이다.

한편, 전날 밤 조치원으로 철수한 21연대장 스티븐스 대령은 오산에서 죽미령전투를 치루고 철수한 스미스 중령에게 대전에서 조치원에 도착하는 대로 조치원 북쪽에 방어진지를 구축토록 하였다. 이에 따라 1대대장 스미스 중령은 7월 11일 오전 7시30분부터 조치원 3km 북방지점 국도변의 송곡리 무명고지(170m)에 진지를 구축하였다. 그러나 이날 정오를 넘기지 못하고 3대대가 개미고개 능선에서 궤멸되었다는 소식에 엄습하는 불안감을 감출 수 없었다,

한국전 발발 15일 후인 1950년 7월 10일 전의부근 전황도

3대대가 참담하게 철수하자 21연대장은 조치원 북방 보덕리에 있던 155mm포대를 조치원 남방으로 이동시켜 전선을 지원하도록 하였다. 그리고 진지구축을 완료한 1대대장에게 조치원 사수를 거듭 명령하였다. 그러나 1대대병력은 죽미령 전투에서 와해된 이래 대전에서 신병으로 보충된 자원이었기 때문에 실제 전투에서는 기대를 걸 만한 형편이 못되었다.

그런데 이날 무슨 연유인지 북한군은 해가 저물도록 나타나지 않았다. 전의와 개미고개 능선에서 완강한 저항을 받았기 때문이었겠지만 어쨌든 1대대는 불안한 가운데 그곳에서 하루 밤을 지새우게 되었다.

이 글을 쓴 윤철원은 세종시 상하수도과장으로 지난 2017년 정년퇴임을 한 조치원 토박이다. 조치원읍장 재직 당시 세종시로 명칭이 변경되면서 전통과 역사에 대한 시민 의식이 부족한 점을 아쉬워하면서 지역문화 연구에 매진했다. 이후 세종시 향토사 연구위원으로 활동하면서 지역과 관련한 역사를 찾아내 후손들에게 전해주는 역할을 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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