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금강 사수하라, 조치원 잃으면 보급로 차단된다"
"금강 사수하라, 조치원 잃으면 보급로 차단된다"
  • 윤철원
  • 승인 2019.07.08 10: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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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철원 칼럼] 개미고개 전투 1950년 7월 9일부터 16일까지 일주일의 조치원 전투<상>
일방적으로 밀리는 가운데 금강 사수 명령...미 전투기 아군을 적군 오인, 기총 사격

지금부터 꼭 69년 전. 한국전 발발 초기 기습공격을 받은 국군과 미군은 일방적으로 밀렸다. 일차 방어선으로 정해진 금강 전투는 쌍방이 치열한 접전을 벌였으나 개미고개에서 많은 희생자를 내면서 결국 무너지게 된다. 이 과정에 나라를 위해 고귀한 생명이 희생됐으며 세월이 흐르면서 점차 희미한 기억 속으로 사라지고 있다. 1950년 7월 8일은 바로 조치원 전투가 시작된 날이다. 생명을 담보로 치열했던 당시 상황을 상,중,하로 나눠 연재한다./편집자 씀

1950년 7월 8일, 한국전이 발발한 지 19일만에 금강까지 밀린 유엔 군은 보급로가 차단되는 조치원 사수를 위해 전의지역에서 치열한 전투를 벌였다. 사진은 전의면 동교리 일대로 좌측이 24사단 1대대, 우측이 빅슬러진지가 있었던 곳이다.

진지를 구축하고

1950년 7월8일, 미 제24사단 제21연대장 스티븐스(Richard W. Stephens) 대령은 전의면 동교리 뒷산에 진지를 구축하고 비장한 눈빛으로 전의읍내를 바라보고 있었다.

그리고 사단장 딘 소장의 명령을 되뇌어 본다.

“사단은 어떠한 희생을 감수하고서라도 금강을 고수할 것이다. 21연대는 조치원 정면에서 적의 침공을 저지하라. 반드시 조치원을 확보하여야 한다. 한국군 제1군단이 청주에서 방어전을 펼치고 있으니 조치원을 잃으면 보급로가 끊겨 이들이 큰 타격을 입게 된다. 따라서 동 군단이 철수할 때 까지 만이라도 조치원을 사수하라. 그러나 귀 연대는 앞으로 4일간 일체 지원을 받지 못할 것이다.”

엄명이 그의 귓전에 아직도 맴돈다.

3일전인 7월5일 새벽, 21연대 소속 1대대장 스미스 중령이 특수부대를 급하게 조직하여 오산 죽미령에서 6시간 15분 동안 치열한 전투를 벌인 것 말고는 지금까지 제대로 된 지연전을 벌이지 못하고 천안까지 밀려 있는 상황이었다.

더욱이 오늘 아침 6시 천안에서 벌어진 시가전에서 적 탱크를 향해 직접 로켓포를 조준하던 34연대장이 전사하였다는 소식과, 혼란 속에서 장병들이 장비도 챙기지 못한 채 철수하기 바빴다는 전황은 긴장을 최고조에 달하게 했다.

이처럼 다급한 전황 속에서 21연대장은 조치원 방어를 위해 전의를 택한 것이다. 진지가 구축된 동교리는 전의역에서 동쪽으로 1km정도 떨어진 해발 134m의 나지막한 구릉이다.

산비탈 남쪽으로 경부선 철도와 국도1호선이 지나가는 길목이기 때문에 적의 진격을 저지하기에는 매우 유리한 지점이었다. 아울러 빅슬러 중위에게는 소대를 이끌고 국·철도와 접해 있는 조천 건너편 신방리 오야고지 산에 진지를 구축하도록 했다. 적의 진격로를 가운데 두고 양쪽에서 적을 저지하면 효과적인 작전이 되겠다는 판단이 섰기 때문이다.

또, 예하 제3대대장에게는 1km 후방, 즉 전동면 미곡리 뒷산 개미고개 능선에 배치하여 진지를 구축하도록 했다. 1대대 저지선이 무너지면 3대대가 개미고개 부근에서 경부선과 국도를 장악하고 적의 진격을 지연시키겠다는 계획이었던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계획은 처음부터 승산이 없었다. T-34전차부대를 앞세우고 38선을 돌파한 이래 거침없이 경부축 도로를 남진해 온 막강한 북한군 제4사단과 제3사단 등 2개 사단을, 불과 2개 대대로 편성된 제21연대가 대응한다는 것은 역부족일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진지 구축이 끝나자 연대장은 전의가 보이는 134고지 능선에 1대대 주병력을 배치하고, 4.2인치 박격포대는 능선 뒤편에 배치했다. 대대장 스미스 중령이 오산 전투에 차출된 상황이었기 때문에 연대장은 대대의 진지구축을 지휘하면서 장병과 더불어 1대대진지에서 하루를 보냈다.

전의전투가 벌어지다

7월9일, 한낮이 지나도록 전의 읍내는 고요한 가운데 적의 그림자도 보이지 않았다. 내리쬐는 여름 땡볕과 푹푹 찌는 지열 때문에 온몸이 땀으로 흥건하였지만 곧 적이 들이 닥칠 것이라는 생각에 긴장을 늦출 수도 없는 상황이 계속되었다. 오후 3시, 드디어 적의 T-34탱크 11대가 덕고개를 넘어 읍내로 진입하는 것이 관측되었다. 연대는 즉각 공중지원을 요청하였다.

얼마 후 미공군 전폭기 편대가 나타나 북한의 전차 대열과 북한군 집결지에 폭격을 가했다. 이와 동시에 21연대장은 4.2인치 박격포와 6.5km 후방 보덕리에 있던 155mm 곡사포 부대에게 사격명령을 내렸다. 공중 폭격과 포병화력이 집중되면서 적 전차 5대, 차량 12대를 파괴하는 전과를 올렸다.

주목할 것은 이날 황혼 무렵 폭격을 마치고 북상하던 미군기가 전의∼천안사이의 국도에서 남진하는 200여대의 적 차량과 T-34탱크 수십 대를 발견·폭격하여 적 전차 15대, 차량100여 대를 파괴하는 전과를 올린 것이다.

이 때문에 북한군 4사단의 예봉이 꺾였음은 물론이고, 이후 북한군은 밤에만 이동하게 되어 남진속도가 현저하게 늦춰졌다고 전사 연구가들은 평가하고 있다. 아무튼 이날 밤 미군과 북한군은 1km도 채 안 되는 거리를 두고 밤을 지새웠다.

7월10일 날이 밝았다. 그런데 한여름임에도 때 아니게 짙은 안개가 끼어 전의 일대를 휘감았다. 동교리 마을은 물론이고 진지 바로 아래를 지나는 국도의 관측도 불가능한 상황이었다.

심지어 구릉의 참호조차 잘 보이지 않을 정도로 가시거리가 짧았다. 그러던 오전 6시 경, 진지 부근에 접근한 적이 요란사격을 가해 왔다. 21연대 주진지와 빅슬러 소대가 즉각 응사하였으나 이로써 아군의 위치와 병력규모가 노출되고 말았다.

한국전에 참가한 미군 탱크부대의 모습

미군이 응사한 총성으로 대략 병력 배치상황을 파악한 북한군은 인원이 적은 빅슬러 소대를 먼저 공격했다. 오전 7시 경 북한군은 오야고지를 향해 박격포사격을 퍼부은 후 소대 정면으로 공격을 개시하였다. 이에 21연대장은 4.2인치 박격포로 지원사격을 가하여 적의 공세를 일단 멈추게 하였다.

이렇게 공방을 벌이는 동안 북한군 병력일부가 대대 동쪽을 우회하여 박격포 진지에 접근하였고, 같은 시각 전차 1대가 안개를 무릅쓰고 국도를 돌파하여 대대 후방으로 돌진하였다. 그러나 능선의 주진지에서는 이러한 상황을 전혀 눈치 채지 못하고 있었다.

오전 8시를 지나 안개가 걷히기 시작하면서 적이 등 뒤에 있다는 것을 깨달았으나 이미 돌이킬 수 없는 상황이었다. 오전 8시30분경, 적 보병과 전차가 협공으로 박격포 진지를 유린하여 주진지와 박격포 부대 간의 유선통신이 두절되었다.

그리고 오전 9시, 전의 마을로 부터 이동해 온 북한군이 대대 주진지를 향해 기어오르기 시작했다. 그러나 후방의 포사격지원에 힘입어 잘 막아 내면서 오전 11시를 넘길 수 있었다. 그러자 이번에는 좌측의 빅슬러 소대 정면을 향해 적의 공격이 집중되었다. 그러나 앞서 4.2인치 박격포대가 유린되었기 때문에 화력지원을 할 수 없는 상황이었다.

빅슬러 소대의 화력지원 요청이 빗발쳤으나

중과부적인 상황에 빠진 소대장 빅슬러 중위의 화력지원과 증원요청이 빗발치듯하였다. 그러나 마땅히 지원할 수단이 없는 연대장은 빅슬러 중위에게 진지고수 명령만 반복했다.

오전 11시30분 경, 공중지원 요청으로 출격한 공군기가 적전차를 향해 로켓포를 퍼붓고 소대진지로 기어오르는 적에게 기총소사를 가하면서 잠시 공격이 주춤하였으나 공습이 끝나자 적의 공격은 더욱 맹렬해졌다.

설상가상 이번에는 적의 포탄이 떨어져 연대장 무전차와 무전기를 파괴하였다. 따라서 후방에 있던 3대대와 포병부대는 1대대의 전투상황을 전혀 파악할 수 없는 상황이 되었다. 이에 대대진지가 적에게 점령되었다고 판단한 포병 지휘관은 대대진지에 포탄세례를 가했다.

이로 말미암아 그때까지 주진지에 버티고 있던 연대장과 대대원들은 참호 속에서 적과 아군의 포화를 뒤집어쓰는 기막힌 곤경에 처하게 되었다. 포화 속에서 머리도 들지 못하는 사이 좌측의 빅슬러 소대는 고립무원으로 적에게 포위되어 낮12시경 소대원 전원이 전사하고 말았다.

적과 아군의 포화가 계속되고 빅슬러 소대 전원이 옥쇄하자 더 이상 견디지 못한 병사들의 진지이탈이 속출하였다. 21연대장이 진두에 나서 장병의 이탈을 막고 진지를 고수하려했으나 연대장을 비롯한 몇 명의 장교와 병사만 남게 되는 바람에 하는 수없이 대대철수를 명령하였는데 이때가 낮 12시5분이었다.

철수명령이 내리자 미군들은 미곡리의 개활지를 가로질러 1km 후방 개미고개능선 제3대대 진지로 후퇴하게 되었다. 그런데 개활지는 모두 논으로 물이 가득하였다. 철수하는 병사들은 무릎까지 빠지는 논바닥을 허우적거리며 미끄러운 논두렁을 마치 곡예 하듯 달렸는데 이때 미공군기 2대가 나타나 이들을 적으로 오인하고 기총소사를 가하여 철수하던 1대대장병은 또 한 번 아군에 의해 고통을 당했다.

이 글을 쓴 윤철원은 세종시 상하수도과장으로 지난 2017년 정년퇴임을 한 조치원 토박이다. 조치원읍장 재직 당시 세종시로 명칭이 변경되면서 전통과 역사에 대한 시민 의식이 부족한 점을 아쉬워하면서 지역문화 연구에 매진했다. 이후 세종시 향토사 연구위원으로 활동하면서 지역과 관련한 역사를 찾아내 후손들에게 전해주는 역할을 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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