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나라 장수 합단적 물리친 '연기 대첩' 아시는지요
원나라 장수 합단적 물리친 '연기 대첩' 아시는지요
  • 윤철원
  • 승인 2019.06.02 20:24
  • 댓글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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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철원 칼럼] 그믐밤 어둠 이용, 흉폭한 합단적 연기에서 물리쳐
연기 들판, 군량조달 용이...보리수확계절 정좌산에 주둔한 적 격퇴
세종시 연서면 고복저수지 옆에 있는 연기대첩비. 원나라 장수 합단적을 충의 정신으로 물리쳤다.

오는 4일은 음력 5월 2일이다.

세종시에서 해 뜨는 시간은 오전 5시 14분, 달뜨는 시간 오전 5시52분이다. 낮에만 달이 뜨기 때문에 밤에는 달을 볼 수 없다. 이러한 천문현상을 이용하여 합단적(哈丹賊)을 무찌르고 『연기대첩』을 이룬 날이 728년 전 오늘이다.

합단적은 원나라의 반란세력에 섰던 인물로 1290년 5월 고려 동북에 침입하여 연기현에서 패퇴할 때까지 1년 여 동안 한반도 중·북부 내륙을 유린하며 온갖 만행을 저질렀다.

『고려사』에 “합단의 군사 수만 명이 화주와 등주를 함락하고 사람을 죽여서 양식으로 삼고 부녀자들을 만나면 윤간한 다음 포(脯)로 떴다”라는 기록이 이를 증명한다.

합단적 무리가 흉포하다는 소문에 천연요충지 철령을 지키던 만호 정수기는 겁에 질려 싸워 보지도 않고 도주한 사례에서 보듯이 이들의 남진에 고려군은 장애가 되지 않았다.

그러던 이듬해 1291년 1월 원주성 전투에서 원충갑을 비롯한 의병과 관군의 합동방어에 큰 타격을 입고 4월 20일 충주성 전투에서도 고려군에게 패하면서 그 예봉이 꺾였다.

경상도 방면의 길목인 충주에서 패한 합단적 무리는 충청 중부지역으로 방향을 돌렸는데 이들이 연기현에 도착한 것은 4월 하순이었다. 두 번의 패전과 춘궁기까지 겹쳐 사기가 떨어진 합단적 무리에게 가장 시급한 일은 향후 진로모색과 군량조달이었을 것이다.

이처럼 절박한 필요를 채워 줄 수 있는 곳이 연기현이었다. 영남과 호남을 모두 갈 수 있는 교통의 요충지일 뿐만 아니라, 계절상 보리수확이 가능한 평야지대였기 때문이다.

특히 정좌산은 보리가 누렇게 익어가는 들녘은 물론이고, 말먹이로 훌륭한 미호천 평원을 바라볼 수 있는 위치에 있었기 때문에 이들의 발길을 머무르게 했을 것이란 생각이 든다.

한편, 원나라에 복속된 고려의 충렬왕은 합단적을 막아낼 능력도 의지도 부족했다. 이러한 조정의 무능에 전의를 상실한 고려군은 합단 무리를 제대로 물리치지도 못하고 원나라에 지원군을 요청하는 상황이 계속되었다.

세종실록지리지와 동국여지승람에는 정좌산에서 합단적을 무찔렀다고 전하면서 '대첩'이라고 표현했다.

그러던 1291년 4월 중순, 원나라 장수 설도간(薛闍干)이 지원군을 이끌고 고려에 당도하여 여원연합군이 편성된다. 고려군은 3개 부대로 나누어 중익군 인후, 좌익군 한희유, 우익군 김흔 등이 이끌도록 하였다.

5월 1일, 연합군은 합단적을 격파하기 위해 진군하여 천안 목천에 이르러 “합단적 무리가 연기 정좌산에 주둔한다”는 정찰보고를 접하게 된다.

때는 마침 그믐을 막 지난 5월 초하루였다. 달이 없는 칠흑 같은 밤에여 목천을 출발한 연합군은 다음날 새벽 동트기 전에 연기현에 도착할 작정으로 야간행군을 강행하였다.

5월 2일, 새벽 여명에 연합군은 적이 주둔한 정좌산을 포위했다. 그리고 고려 보졸이 전면을 차단하고 기병이 뒤에서 공격하는 작전계획에 따라 전후 양면으로 공격을 시작하였다. 갑작스런 야간기습에 당황한 적들은 말을 버리고 산으로 올라가 숲 속에서 활로 대응하였다. 선봉에 섰던 고려군이 화살에 맞아 쓰러지는 수가 늘어나자 아군의 공세가 잠시 주춤거린다.

이때 “물러서는 자는 베겠다”는 김흔 장군의 단호한 호령에 500여 병사가 결사적으로 돌격하였다. 사졸 이석과 전득현이 적의 선봉 2명을 베면서 합단군의 전열이 무너지기 시작하였고 승세를 탄 아군의 공격에 적들은 흩어져 달아나기 바빴다.

이때 상황을 『고려사절요』는 “공주하(公州河, 금강)까지 추격하니 엎어진 시체가 30여 리에 이어졌고 익사한 자들이 매우 많았다. 적의 정예 기병 1,000여 명은 강을 건너 도망갔다”라고 전한다.

5월 8일, 즉 연기대첩 후 6일째 되는 날 합단의 정예 기병이 강을 건너와 연합군과 대진하여 2차 전투가 전개되었다. 이 싸움에서는 활을 잘 쏘는 적병 때문에 아군의 사기가 꺾이는 듯하였다. 그때 한희유 장군이 나서서 그 적병의 머리를 베어 창에 꽂아 내보이는 활약에 힘입어 대승을 거두게 된다.

이날 패한 합단적은 아들 노적과 죽전방향으로 도망하였는데 이후 합단적의 생사여부를 확인하는 문헌은 찾을 수가 없다. 따라서 ‘원수산 『항서방위』가 합단적이 연합군에게 항복할 때 무릎 꿇은 바위’라는 이야기는 정사(正史)에 근거하지 않은 전설이라고 보아야 한다.

연기현 전투가 “대첩”이라는 근거는 『세종실록지리지』와 『동국여지승람』의 기록에서 찾을 수 있다. “연기현 남쪽 정좌산에서 합단적을 무찌르니 대첩(大捷)이다. / 哈丹賊戰于燕岐縣南正左山下, 大捷”이라고 기록하고 있기 때문에 『연기대첩』 이라고 부르는 것이 적합한 표현인 것이다.

연기현에서 있었던 전투를 정리한다면 “1291년 5월 2일 정좌산에서 대첩의 승세를 굳혔고, 5월 8일 원수산에서 승전으로 마무리하였다” 라고 할 수 있다.

호국보훈의 달 6월에,

제728주년 『연기대첩』 기념일인 오늘,

우리지역에서 있었던 승전의 역사를 되새겨 본다.

이 글을 쓴 윤철원은 세종시 상하수도과장으로 지난 2017년 정년퇴임을 한 조치원 토박이다. 조치원읍장 재직 당시 세종시로 명칭이 변경되면서 전통과 역사에 대한 시민 의식이 부족한 점을 아쉬워하면서 지역문화 연구에 매진했다. 이후 세종시 향토사 연구위원으로 활동하면서 지역과 관련한 역사를 찾아내 후손들에게 전해주는 역할을 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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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종시민 2019-06-03 16:18:16
우리나라 7대 대첩 중의 하나인 연기대첩에 대해 너무 모르는 게 안타깝습니다. 세종시의 역사를 이야기할때 빠지지않고 설명이 들어가면 좋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