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쇠줄'이 변한 '소골'이 있는 마을
'쇠줄'이 변한 '소골'이 있는 마을
  • 임영수
  • 승인 2013.02.08 09:08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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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영수의 세종을 만나다]금강-동진강이 만나는 합강리

   합호서원
합강리는 백제시대 두잉지현(豆仍只縣)에 속했으며, 통일신라시대에 연기현(燕岐縣)으로 고쳐서 연산(燕山)에 속하였으며 고려때는 연기현이 청주(淸州)에 속하였다. 조선시대 들어와 연기현에 속했다가 조선말엽에는 연기군 동일면 지역이었다. 금강과 동진강이 이곳에서 만나므로 합강(合江)이라 불렀으며 1914년 행정구역 개편 때 이웃마을과 병합하여 연기군 동면에 편입되었다.

재영 : 합강리는 강이 합한다는 뜻을 가지고 있다고 금방 느껴지는 곳이에요.

아빠 : 그래. 금강을 오강(五江) 팔정(八亭)이라 하는데 강의 이름이 다섯이라는 뜻이지. 맨 위를 초강(楚江)이라 부르며 위치는 부강하류이고, 두 번째가 오강(吳江)으로 동진하류 그리고 금강(나성리 앞에서 공주까지), 백강(부여의 백마강), 청강(백마강 하류 서천지역)이지. 여기서 초강과 오강이 만나는 곳을 합강(合江)이라 부르는 거야.

또 팔정(八亭)은 합강정(合江亭), 독락정(獨樂亭), 한림정(翰林亭), 탁금정(濯錦亭), 금벽정(錦碧亭), 사송정(四松亭), 청풍정(淸風亭), 수북정(水北亭)인데 이 중 합강정(合江亭)이 바로 합강리에 있었는데 지금은 없고 그 터만 전하고 있어.

이곳 합강에는 나루가 남쪽과 서쪽에 있었어. 남쪽은 합강 나루라고 하여 이곳에서 강을 건너면 바로 금남면의 반곡리와 봉기리로 갈 수 있지. 그곳을 거쳐서 용포리로 갈 수 있고, 달전리를 거쳐 대전 유성으로 갈 수 있어. 또 서쪽나루는 꽃벼루 나루라고 하여 남면의 월산리로 갈 수 있어. 월산리를 통하여 양화리, 종촌리와, 연결되어 있지.  지금은 이곳에 다리가 놓여져 개통만을 기다리고 있지만 예전에 이곳으로 배들이 오가며 서해안의 물자가 이곳을 통하여 청주지역으로 전해지기도 하였지.

   순흥 안씨 세장비
재영 : 합강리에는 어느 성씨가 많이 살고 있나요?

아빠 : 합강리에는 순흥안씨, 예안김씨, 인천채씨가 살고 있는데 순흥안씨는 가람뜸에 많이 살고 예안김씨는 양지말, 인천채씨는 잿절에 많이 살고 있어.

재영 : 그렇게 세 성씨가 이곳에 살게 된 동기가 있나요?

아빠 : 순흥안씨와 예안김씨는 혼인으로 맺어진 사돈관계이지. 먼저 순흥안씨 이야기를 하여주마.

순흥안씨의 시조는 안자미(晏子美)야. 세 아들을 두었는데 큰아들이 추밀공파(樞密公派), 둘째가 별장공파(別將公派), 셋째가 교서공파(校書公派)이지.

추밀공파의 7세손인 안조동(安祖東)을 파조로 하는데 이를 양공공파(良恭公派)라 부르지. 안조공은 고려말 인물로 조선이 개국하자 벼슬을 버리고 지금의 충청북도 청원군 현도면으로 내려왔어. 이곳에는 양공공을 비롯하여 14대까지 묘소와 재실이 있어.

양공공인 안조동이 죽었을 때 후손들이 문중의 고향인 순흥에 묘를 쓰기 위하여 상여를 메고 가던 중 현재 부강고등학교 근처에 다다르니 갑자기 상여가 부서졌어. 후손들이 주변 지형을 살펴보니 자리가 좋아 명당이라 판단하고 고향인 순흥으로 가는 것을 중단하고 현재 위치에 묘를 썼지.

그 후 양공공의 6세손인 안윤희(安允禧)가 현도면에서 분가하여 이곳 합강리로 들어오게 되었는데 안윤희의 부인은 예안김씨인데 이곳에는 예안김씨(禮安金氏)들이 이미 오래 전 터를 잡고 살고 있으므로 그 당시에는 결혼풍습이 남자가 여자에게 장가를 들러 가기 때문에 처가가 있는 동네에서 살았지. 안윤희도 예안김씨를 아내로 맞이하면서 예안김씨들이 살고 있는 이곳으로 내려오게 된 것이야. 안윤희에게는 두 아들이 있었는데 안곤(安鵾)과 안붕(安鵬)이지. 이들은 각각 1파, 2파라 부르는데 재실이 합호서원 옆에 있어 매년 음력 10월 12일과 13일에 시제를 지내고 있어.

   안순근씨 댁에 있는 정자
재영 : 예안김씨는요?

아빠 : 예안김씨의 시조는 고려 숙종 원년 경상북도 안동군의 예안에 정착한 김담(金淡)으로 그의 후손 김만인(金萬引)이 충청도로 이주하고 그의 아들 김몽가(金蒙哥)가 공주의 장기면 오공동에 살다가 그의 아들 김삼섭(金三燮)이 합강으로 처음 이주하여 살았지. 김상섭은 좌부승지를 지냈어. 그때가 지금으로부터 400여 년 전이니 순흥안씨는 그 후에 이곳으로 들어와 살게 된 것이지.

재영 : 인천채씨 이야기도 해 주세요.

아빠 : 그래 합강에 인천채씨가 살게 된 것은 700여 년 전의 일이며 남양홍씨가 몇 가구 살고 있는데 이들도 인천채씨와 혼인관계를 맺고 들어와 살고 있지.

인천채씨의 시조는 채선무(蔡先茂)야. 고려시대 동지추밀원사에 추증되었으며 인천에 세거 하였으므로 관향은 인천으로 쓰고 있지. 채선무의 10세손인 채귀하(蔡貴河)가 고려말에 정몽주 등과 교류하며 공양왕 때 호조전서를 지냈으나 고려가 멸망한 뒤 조선에 협력하지 않은 두문동 72현 중 한명이라고 전하고 있어. 채귀하의 묘는 황해도 연백군 목단면에 있으며 그를 기리는 사당을 대구광역시 북구 검단 토성 안에 신도비와 함께 서 있어.

합강2리에 입향한 이는 채귀하의 아들 4형제 중 셋째인 채동양(蔡東陽)의 셋째아들이며 고려말에 참의의 벼슬을 지낸 채승(蔡昇)으로 참의공파 시조이지. 채승은 고려가 멸망하여 남쪽으로 이주 하던 중 합강2리가 당시 수로 교통이 발달한 부강과 인접하고 경치가 좋아 이곳에 터를 잡고 정착하게 되었지. 이곳에 채씨들이 오랜 세월 살고 있으니 이곳에 사는 사람들을 연기파라 부를 정도로 오랜 세월 살아오고 있어.

재영 : 마을에 있는 합호서원에 대한 이야기도 들려주세요.

아빠 : 합호서원은 순흥안씨들이 이곳에 터를 잡고 살면서 고려시대 주자학을 들여 온 안향(安珦, 1243~1306)선생의 영정을 모시기 위하여 1716년(숙종42년)에 건립한 합호사(合湖祠)를 그 시조로 하고 있지. 그 후 1843년(헌종9년)에 후손 안정량(安靖良)과 안사량(安師良)이 연기의 유림들과 합호서원으로 승격시키면서 신덕제(辛德濟)와 박금서제(朴琴書濟)를 함께 배향하였어.

   안순근씨 댁 방문
1896년 대원군이 서원철폐령으로 합호서원도 훼철(없어짐) 되었다가 1931년 후손 안배호 등이 유림의 동의를 거쳐 서원을 복원하기로 하고 1937년 본전과 내삼문을 재건하였어. 1949년 지역 유림이 협의하여 성균관에 상신 서원 복설 허가를 받아 1950년 합호서원으로 정식 현액(현판을 걸음) 되었지. 1990년도에 후손 안순근씨가 면장을 할 당시 군비 및 도비를 받아 전사청과 외삼문을 재건하였어.

안향과 함께 배향하였던 신덕제는 안향의 제자이고, 박금서제는 그 후대 사람으로서 서원을 복원하는 과정에서 이들의 위패를 배향하지 않고 안향선생만 모시고 있어.

합호서원은 입구에 외삼문을 세웠고, 그 문을 열고 들어가면 내삼문이 있지. 외삼문의 동편에 성의재가 있고, 성의재 북편에 전사청이 있어. 내삼문 안으로 들어가면 본전으로 이곳에 안향선생의 위패와 영정이 모셔져 있지. 한때 안향선생의 영정이 도난당했다가 간신히 찾은 적이 있어. 전사청에는 제향에 필요한 제기 일체를 보관하고 있으며 성의재는 강당이자 서당으로 1950년대 초까지 이곳에서 안승춘 선생께서 동네아이들에게 한학을 가르쳤어. 과거 전사청 자리에는 합호서원 관리인들이 거주하던 집이 있었으며 제향을 올리러 온 유림들이 이곳에서 숙박을 하였었어. 1984년 5월 17일에 충청남도 유형 문화재 제41호로 지정받아 오늘에 이르고 있지.

재영 : 합강2리에 있는 효자 채관형의 이야기도 들려주세요.

아빠 : 이 비는 채관형(蔡觀亨, 1751~1817)의 효행을 기리기 위하여 건립된 것이지.
사림들이 효로써 여러 차례 현감과 감사에게 천거하여 고종조에 명정을 받아 정려가 건립되었으나 정려가 허물어져 퇴락하여 복구되지 못함을 안타깝게 여긴 후손 채진두(蔡鎭斗) 등이 중심이 되어 1968년에 비로 세운 것이야.

채관형의 아버지는 채문백(蔡文伯)이고 어머니는 안동김씨로 김만성(金萬成)의 딸이지. 5살 때부터 부친을 여의고 홀어머니와 함께 가난하게 살던 중 모친이 병으로 눕자 지성으로 간호하여 눈 속에서 달팽이를 구해다 먹이고, 엄동설한에도 강에 나가 얼음을 깨고 잉어를 잡아다 봉양하였어. 이와 같은 사실이 「충청도읍지」「호서읍지」「조선환여승람」「연기지」 등에 기록되어 있으며 묘소는 합강2리 산23번지에 위치하고 있어.

   합호서원

그의 아내인 경주최씨는 최필범의 딸로서 효성이 매우 지극하였어. 시어머니가 병환으로 인해 머리가 엉키어 빗질을 못하게 되자 최씨는 자신의 머리에 기름을 발라서 자기 머리에 이를 옮기게 하여 이를 잡았어. 병이 중해지자 7일 밤을 하늘에 빌고 연일 대변을 맛보아 약을 정성스레 지어 올려서 네 번을 소생하게 하였지.

재영 : 마을 유래에 대하여 이야기 해 주세요.

아빠 : ‘합강’이라는 지명은 동진강과 금강이 만나기에 붙여진 이름이라고 설명하였고, ‘쇠줄’이라 불리는 곳은 거름뜸의 동북쪽에 있는 곳으로 사람들은 농사지을 때 필요한 소를 키우기가 으뜸인 마을이라 하여 ‘소골’이라 부르던 것이 변하여 ‘쇠줄’이라 부른다고 하는데 사실은 이곳에 연못이 있어 그 연못을 ‘소지(沼地)’라 불렀으며 연꽃이 만발한 아름다운 연못이었지. 연꽃이 있다하여 ‘소지’라 부르던 것이 변하여 ‘쇠줄’이 되었다는 것이 맞는 말 일거야.

재영 : 그러면 소를 키워서 된 지명은 누군가 지어낸 말이네요.

아빠 : 아마 소를 키워 돈을 번 이가 편리하게 해석한 것 일거야. ‘거렁뜸’은 합호서원이 있는 곳의 지명인데 이곳이 옛날부터 글을 열심히 읽어서 출세하는 사람들이 많이 배출된 곳이지.

‘양달말’은 거렁뜸 서쪽에 있는 마을로 양지 바른 곳이란 뜻이야.
‘잿절’은 모습골 너머에 있는 골짜기로 옛날에 황용사(黃龍寺)라는 유명한 절이 있는 골짜기 부근의 마을이라 해서 붙여진 이름이야. 지금은 그 절이 없어지고 터만 있지.

     
임영수, 연기 출생, 연기 향토박물관장,국립민속박물관 전통놀이 지도강사, 국사편찬위원회 조사위원, 이메일: ghmuseum@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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