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왜 '호려울 마을'인지 아시는지요"
"왜 '호려울 마을'인지 아시는지요"
  • 윤철원
  • 승인 2019.04.02 14: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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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철원 칼럼] 호려울은 금남면 호탄리를 지나는 금강 연안 우리 말 지명
호리병은 한번 재물이 들어가면 나오기 힘들다고 해서 재물 수호 상징물
'호려울'은 호리병 목처럼 옛날 금강이 마을입구까지 좁게 흘러내렸다는 데서 따온 말이다.
'호려울'은 예전에 금강물이 호리병 목처럼 마을입구까지 좁게 흘러내렸다는 데서 따온 말이다.

세종시 보람동에 있는 ‘호려울’이라는 지명이 있다. ‘호려울’은 금남면 호탄리(壺灘里)를 지나가는 금강연안을 일컫는 우리말 지명이다. ‘호리동 여울’, 즉 ‘호리 여울’의 준말이라고 보면 된다.

과거 금강제방이 축조되기 전에는 호탄리 마을 앞으로 강물이 흘렀다. 물길이 마치 ‘호리병목처럼 생긴 여울’이라 해서 붙여진 이름이다.

전통적으로 ‘壺’(호, 병)라는 글자는 ‘好’(호, 좋다)자와 더불어 상서로운 의미를 지니고 있다. 그 중에서 ‘壺’(호)는 호리병을 본뜬 한자라고 한다. 그러고 보니 글자의 중간부분이 병과 같이 생겼고 윗부분은 뚜껑을 형상화한 모양새다.

전하는 말에 의하면 주둥이부분이 길고 가늘게 생긴 호리병은 무엇이든 한번 들어가면 나오기가 어렵기 때문에 재물수호의 상징물이라고 한다. 또, 도가(道家)에서는 신선들이 약을 담는 도구라 하여 무병과 건강을 표현하는 상징으로 묘사되고 있다.

호려울과 관련된 기록은 옛 문헌에서 찾아볼 수 있다.

공산지(공주읍지)에 ‘호리동리(好里洞里), 공주 관문에서 동쪽 40리’라고 수록되어있다.

호서읍지에는 이에 더하여 ‘편호83가구, 남자 139명, 여 163명’이라고 기록한 것으로 보아 당시 공주목 양야리면 관할 중에서는 비교적 큰 마을이었음을 알 수 있다.

이때까지만 해도 마을명의 음차가 호리(壺里)가 아닌 호리(好里)로 표기했다는 것이 흥미롭다.

이렇게 ‘호리’(好里)로 쓰이던 음차는 1910년대 초반 발간된 『조선지지 자료』에서 ‘호탄리’(壺灘里)로 조사되었는데 그 무렵에는 아마도 ‘호리’(好里)와 ‘호탄리’(壺灘里)를 같이 사용하였던 듯하다.

한편, 호탄리 마을을 ‘동창’(東倉)이라고도 부르는데 다음과 같은 연유가 있다.

조선시대 공주목의 동헌을 비롯한 대부분의 관아는 공산성내에 배치하였다. 그러나 5개의 창고는 공주 바깥 지역에 배치하였는데 동창은 양야리면, 서창은 신상면, 남창은 반탄면, 북창은 정안면, 그리고 유성창을 두었다.

그중에 공주 동쪽에 위치한 양야리면(陽也里面, 금남면)에 배치한 창고가 호탄리에 있었기 때문에 지금도 연로하신 분들은 호탄을 일명 동창(東倉)이라고 부르는 것이다.

지금까지 호려울에 대한 유래를 알아보았다.

금강 변에 만들어 놓은 호리병 모형을 딴 조각품

그러나 애주가들은 호리병하면 맑은 술을 연상하기에 기사와 어울리지 않는 줄 알면서도 호(壺)자가 들어간 한 시 한편을 소개한다.

 술은 기다려도 오지 않고...(待酒不至)  - 李 白 -

옥병에 파란 끈 매고(玉壺繫靑絲, 옥호계청사)

술 사러 간 이 어찌 이리 더딘가(沽酒來何遲, 고주래하지)

산꽃이 나를 향해 웃으니(山花向我笑, 산화향아소)

지금이 술 한 잔 머금을 때라(正好銜盃時, 정호함배시)

꽃피는 봄날 호리병술을 기다리는 시정(詩情)이 보이는 듯하다.

각설하고 호리병의 상징대로 ‘호려울’이 건강한 마을, 경제적으로 풍요한 마을이 되기를 기원한다.

이 글을 쓴 윤철원은 세종시 상하수도과장으로 지난 2017년 정년퇴임을 한 조치원 토박이다. 조치원읍장 재직 당시 세종시로 명칭이 변경되면서 전통과 역사에 대한 시민 의식이 부족한 점을 아쉬워하면서 지역문화 연구에 매진했다. 이후 세종시 향토사 연구위원으로 활동하면서 지역과 관련한 역사를 찾아내 후손들에게 전해주는 역할을 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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