치마 폭에 담았던 돌무더기..슬픈 전설 '가득'
치마 폭에 담았던 돌무더기..슬픈 전설 '가득'
  • 윤철원
  • 승인 2019.03.26 08: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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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철원 칼럼] 금이산성과 한치마봉...고찰 비암사보면서 부담없이 오를 수 있는 곳
애틋했던 오누이의 삶 음미하고 올라가면 더 많이 보이는 세종의 전설 깃든 유명산
테뫼형 산성이 둘러싸고 있는 금이산은 승부 근성이 강한 오누이의 내기 전설이 한치마봉 돌더미 속에 들어있는 명산이다.
테뫼형 산성이 둘러싸고 있는 금이산은 승부 근성이 강한 오누이의 내기 전설이 한치마봉 돌더미 속에 들어있는 명산이다.

세종시 전의면과 전동면의 경계에는 금성산(일명 금이산)이 있다. 이산 남쪽 끝자락에는 천년고찰 비암사가 있고, 북편에는 작성산(일명 까치산)이 위치해 있다. 금성산은 1872년 전의현지도와 1899년 전의군 지도에 철성산(鐵城山)으로 표기되어 있는데 이 지역 주민들은 쇠성산이라고도 부른다. 해발 424m의 높이로 등산하기에 부담 없는 산이다.

정상부근에 있는 금이산성은 테뫼식 석축산성으로 둘레가 714m이다. 동국여지승람에 『금이성, 운주산에 있다. 돌로 쌓았으며 주위가 1천5백28척이다』라고 수록되어 있는데 금성산을 운주산으로, 현재의 운주산은 고산(高山)으로 표기한 것이 이채롭다. 이러한 예는 세종시 관내 여러 산에서 발견되는데, 예를 들자면 현재의 동림산이 과거에는 용자산(龍子山)이었고, 전월산이 구을산(九乙山)으로 표기된 사례 등이 있다.

금이산성에서 비암사까지는 직선거리로 3km정도 된다. 그 중간쯤에 한치마봉이 위치해 있는데 맹의섭의 추운실기에 “한치마봉 전설”이 수록되어 있어 이를 소개하고자 한다.

옛날에 재주가 남다른 남매가 어머니와 함께 이 산에서 살았다. 두 남매의 뛰어난 재주에 어머니는 기쁘기도 하였지만 서로 자기의 재주가 우월하다고 다투는 것을 볼 때 마다 걱정이 되기도 하였다. 특히 딸의 재주가 더 나았는지 아들을 괴롭히는 모습을 볼 때마다 딸의 기를 꺾어 주어야겠다는 생각이 들곤 했다.

한치마봉은 전동면 쪽에 가깝다.

그러던 중 어머니는 남매에게 겨루기를 제안한다. 아들에게는 “쇠로된 나막신을 신고 서울인 경주에 가서 검은 소를 사오라”하고, 딸에게는 “네 오빠가 서울에 가서 검은 소를 사가지고 오는 동안 금이산에 돌로 성을 쌓으라”는 것이다. 딸이 따져보니 자기 오빠는 서울인 경주까지 왕복 2,000리가 넘는 거리를 다녀와야 하고, 또 돌아 올 때는 걸음이 느린 소를 끌고 와야 하니 시일이 많이 걸리겠다는 생각에 이길 수 있다는 자신감이 넘쳤다.

남매가 흔쾌히 승낙하여 겨루기가 시작되었다. 아들은 쇠로된 나막신을 신고 서울을 향해 출발했다. 그리고 딸은 금이산에 올라 성터를 닦으며 부근에 있는 돌을 운반하여 쌓기 시작했는데 그 술법이 모래가 휘날리고 돌멩이가 구를 정도로 빠르고 비범하여 보는 이를 놀라게 하였다.

그렇게 금이산 주변 돌을 다 쌓은 후에는 멀리까지 나아가서 치마에 돌을 담아 운반했는데 이겨야 한다는 욕심에 먹는 것조차 잊고 성을 쌓았다. 그런 딸의 얼굴에서 시장기를 발견한 어머니는 딱한 마음에 “허기질 테니 먹어가며 하라” 누룽지를 자주 갖다 주었고 딸은 그때마다 맛있게 먹었다. 어머니의 사랑이 감사한 일이나 먹으려고 쉬는 동안 시간이 허비되고 성 쌓는 일도 늦어지므로 생길 비극은 어찌 상상이나 했으랴.

시일이 흘러 성 쌓기는 이제 동문 턱만 쌓으면 될 만큼 마무리 단계에 접어들었다. 딸은 치마 한가득 돌을 담은 후에 금성산을 바라보며 “이 돌로 동문만 쌓으면 내가 이긴다”고 생각하니 마음에 기쁨이 솟아 사방을 휘 둘러 보았다. 그런데 아뿔싸! 이게 웬 일인가. 저편 산모퉁이에서 오빠가 검은 소를 끌고 오는 것이 아닌가. 놀라서 손을 놓치는 바람에 치마폭에 담은 돌들을 쏟아 버리고 말았다. 그리고 겨루기에서 패했다는 분한 마음을 이기지 못하고 그 자리에서 자진하여 숨을 거두었다.

딸의 기를 좀 꺾어보자는 뜻에서 겨루기를 제안한 어머니는 그토록 출중한 재주를 가졌던 딸의 주검 앞에 망연자실하여 후회막급이나 돌이킬 수없는 일이었다. 슬픔으로 장례를 치루던 어머니는 이 비통한 죽음을 잊지 않으려는 뜻에서 딸이 쏟은 한치마의 돌로 봉분을 쌓았는데 그때부터 이곳을 “한치마봉”이라 불렀다는 것이다. 그러한 연유로 지금도 금이성에는 북문, 남문, 서문지는 있으나 동문 턱이 없다고 전해진다.

한치마봉은 금이산성에서 남쪽 비암사 방향으로 2km 정도 떨어져 있는 해발 378m의 작은 봉우리이다. 풍수설에 의하면 그 돌무덤자리가 장군대좌형(將軍對坐形)의 명당이라고 한다. 150여 년 전에 어느 문중에서 이 명당을 매입하여 돌무덤을 허물고 선대 조상을 이장해서 정상부에는 흙무덤이 자리해 있고 주변에 돌무더기가 흩어져 있다.

근래 어느 등산회에서 “한치마봉”에 “수디산”이라는 표시를 붙여놓았다. 인근에 “수디”라는 지명이 있어 그런 것으로 보이나 “수디”는 물이 많은 곳이라는 뜻으로 산봉우리 이름으로는 어울리지 않는다. 이러다가는 산 이름도 바뀌고 전설도 사라지겠다는 안타까운 생각이 불현듯 스치는 것은 왜 일까? 이정표라도 세우면 좋으련만....

고찰 비암사는 금이산성에서 약 3Km 떨어져 있어 봄철 오누이의 슬픈 전설을 음미하면서 부담없이 오를 수 있는 곳이다.

이 글을 쓴 윤철원은 세종시 상하수도과장으로 지난 2017년 정년퇴임을 한 조치원 토박이다. 조치원읍장 재직 당시 세종시로 명칭이 변경되면서 전통과 역사에 대한 시민 의식이 부족한 점을 아쉬워하면서 지역문화 연구에 매진했다. 이후 세종시 향토사 연구위원으로 활동하면서 지역과 관련한 역사를 찾아내 후손들에게 전해주는 역할을 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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