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행사상 숨어있는 오봉산, 걸출한 장군 탄생 비밀은?
오행사상 숨어있는 오봉산, 걸출한 장군 탄생 비밀은?
  • 윤철원
  • 승인 2019.03.12 15:5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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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철원 칼럼] 등산하고 나면 마음이 편안해지는 조치원 오봉산
낮지만 사방이 확틔여 보석같은 산, 오행이 등산객 마음 어루만져
조치원 오봉산은 오행사상이 곁들어져 있는 산으로 오르고 나면 마음이 편안해진다.

전국에 오봉산이 10여개 이상 있다. 그중 세종시 조치원읍 오봉산은 해발 262m로 낮지만 정상에 올라 사방을 바라보면 북으로 운주산과 동림산, 흑성산이 바라다 보이고, 동으로는 청주 상당산성과 팔봉산이, 그리고 남으로는 원수산, 전월산과 멀리 계룡산이 눈 안에 들어와 가슴을 탁 트이게 한다.

특히, 동남 편에는 평야지대를 가로 지르는 미호천과 조천이 있어 옅은 초록이 피어나는 맑은 봄날 바라보면 그 경치가 더욱 아름답다.

이 산은 역대 지리지 등에서는 찾기가 매우 어렵다. 하지만 대동여지도나 팔도분도 등 등 조선시대 제작된 여러 지도에서는 비교적 쉽게 찾을 수 있는데 연기현과 전의현의 경계를 이루는 산이기 때문이었다.

크기로 따진다면 오봉산은 고산준령의 이름 없는 작은 봉우리만도 못하다. 그러나 아담한 다섯 봉우리가 이 지역을 살아온 주민들의 마음처럼 있는 듯, 없는 듯 다소곳하여 부담 없이 다가 설 수 있는 산이기에 매일 오르내려도 질리지 않는 포근함과 정겨움을 지닌 산이다.

경사면이 완만하고 황토가 섞인 마사토라서 맨발등산을 해도 좋을 만큼 부드러운 육산(肉山)으로 주차장부터 정상까지 왕복 10,000보 가량, 서두르지 않아도 2시간이면 넉넉히 다녀올 수 있는 아담한 산이다.

삶 속에서 물질의 많고 적음과, 크고 작은 것에 호불호(好不好)를 단정할 수 없으나 때로는 작은 것이 더 사랑을 받는 일이 있듯이 오봉산도 비록 작지만 보석 같은 산이라는 이야기를 하려고 한다.

전해오는 말에 의하면 오봉산은 오행연주형(五行連珠形)의 명산이다. 오행(五行)은 음양(陰陽)과 더불어 동양철학의 기본을 이루는데 그 이론에 의하면 세상은 목화토금수(木火土金水)라는 다섯 질서의 틀에서 진전한다는 것이다.

대동여지도에 실린 오봉산

즉, 나무(木)는 불(火)을 만들고, 불에 탄 재는 흙(土)이 되고, 흙은 쇠(金)가 되고, 쇠는 물(水)을 만들고, 물은 나무(木)를 자라게 하는 순서로 생성·소멸함이 반복되는 것을 상생이라 하고 그 순서를 어기는 것을 상극이라고 한다. 오봉산은 상생순리로 산이 배치되었기 때문에 오행연주의 형국이라고 한다.

오봉산 정상이 나무(木山)에 해당하고, 그 앞쪽의 우각봉(牛角峰) 일명 문필봉(文筆峰)이 불(火山), 아래 쪽의 성주봉(聖周峰)이 흙(土山), 그 아래의 두루봉 일명 두우봉(斗牛峰)이 쇠(金山), 그리고 동산(童山, 애기봉)이 물(水山)에 해당한다는 것이다. 따라서 오봉산을 등산하면 오행의 질서를 어기지 않기 때문에 마음이 평안하고 건강해진다는 것인데, 등산을 하고 나면 왠지 모를 상쾌함과 만족감을 느끼는 것도 이 때문일까?

덧붙여 오봉산 장군혈(將軍穴) 전설 하나 소개한다.

제주도 삼성혈에는 고씨, 양씨, 부씨 등의 시조가 출생했다는 전설이 있듯이 오봉산 동편 기슭에 사람 하나 들어갈 정도의 자그마한 동굴에서 까마득한 옛날에 세상을 구할 걸출한 장군이 태어났다는 이야기다.

용력이 얼마나 대단했던지 아름드리 거목을 거뜬히 뽑았고 점프력도 대단하여 오봉산에서 한 번 뛰면 내창천의 널 바위까지 날았다. 그때 생긴 발자국이 30cm가 될 만큼 움푹 파였으며 팔뚝만큼 굵은 철 지팡이 자국도 깊이가 두 길이 넘을 만큼 깊게 파였다고 한다. 그 반석에서 한 번 더 뛰면 멀리 청주 팔봉산까지 날아갈 정도로 용력이 뛰어난 장군이었다고 한다.

그런 전설이 마땅치 않았는지 일제가 장군혈 안에 있던 바위를 캐내어 내창천 제방 석축자재로 쓰고 동굴은 흙으로 메워 정기(精氣)를 훼손하였다고 하니 그저 안타까울 수밖에.....

이 글을 쓴 윤철원은 세종시 상하수도과장으로 지난 2017년 정년퇴임을 한 조치원 토박이다. 조치원읍장 재직 당시 세종시로 명칭이 변경되면서 전통과 역사에 대한 시민 의식이 부족한 점을 아쉬워하면서 지역문화 연구에 매진했다. 이후 세종시 향토사 연구위원으로 활동하면서 지역과 관련한 역사를 찾아내 후손들에게 전해주는 역할을 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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