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립운동 분명한데 기록없어 답답합니다"
"독립운동 분명한데 기록없어 답답합니다"
  • 김중규 기자
  • 승인 2019.03.01 08:05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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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1만세운동 조부 행적 찾아나선 김조영씨..."조치원 횃불만세 당시 머리 함몰 후 기적같이 살아나"
항일 생활화했던 조부 김규열 기록 남아있지 않아, "정년 후 본격적으로 행적 찾아 나설 예정"
할아버지 김규열의 독립운동 행적을 찾아나선 김조영씨. 그는 효심이 지극한 아버지의 한을 풀어드리기 위해 독립운동 관련 서적을 뒤지고 있다고 말했다. 사진은 지난 2002년 연기 유림들이 세워준 김규열 열사 의열비

“독립운동을 하신 것은 확실한데 투옥이나 검거된 기록이 남아있지 않아 안타깝습니다.”

할아버지 김규열의 독립운동 행적을 찾고 있는 손자 김조영씨(61, 청주시 거주)는 기록으로만 입증해야 하는 현실을 탓하면서 “지난 번 도종환 장관님으로부터 독립운동 기록이 새롭게 발견됐다는 얘기를 들었다” 며 일말의 희망을 거기에다 걸었다.

27일 오후 2시 세종시 조치원읍에서 만난 김씨는 연기군지에 “김규필은 3.1운동 당시 신안·서창 쪽 횃불만세운동을 주도, 조치원 시장에서 만세를 부르다 일본 순사가 휘두른 개머리 판에 맞아 의식불명이 됐다”는 게 유일한 기록이라고 말했다.

김규열의 항일은 의식불명이 된 후 일본 순사가 “죽었으니 집으로 데려가라”는 통보를 받았고 집에서 치료를 했다. 기적같이 다시 깨어나 훗날 당시 미나미 총독을 죽이기 위해 칼을 품고 대기했다가 미수에 그쳤다는 얘기만 전해질 뿐이다.

연기군지만으로서는 할아버지 김규열의 독립운동을 입증할 수 없는 상황이다. 군지(郡誌)의 기록은 주민들 간에 떠도는 야사(野史)도 실는다는 걸 감안하면 독립유공자로 선정되기에는 역부족이다.

맹의섭이 지은 ‘추운실기’에도 조치원 쪽 만세운동 주동자로 ‘김규필’(김규열의 오자)로 남아있으나 이 역시 1972년에 발간된 책자여서 사료로써 가치가 크지 않다.

청주 외국어고 국어교사로 재직 중인 김씨는“ 제가 할아버지의 행적을 찾아나선 건 올해 아흔 여덟의 아버지의 한을 풀어주기 위한 것”이라며 “기록을 찾을 방법도 없고 어디에다 하소연을 해야 할지 모르겠다”고 답답해했다.

할아버지 김규열은 조치원에 살있고 신교육을 ‘왜놈 잔재’라고 거부하면서 자식들에게 교육을 시키지 않았다. 소학교를 보내지 않기 위해 호적에 올리지 않았다가 해방 이후 올릴 정도였다.

해방 이후에는 남북분단을 슬퍼했고 한일합방에 비분강개하고 면암 최익현 선생의 글을 직접 필사(筆寫)하면서 항일의지를 다졌다.

조치원읍 신안리에 있는 김규열의 묘소

그런 할아버지 밑에 자란 아버지는 농사만 지었고 현재 거주하고 있는 신안리 일대 논밭을 팔아 어디론가 보냈다는 것이다.

당시 자주 사랑방에서 대화를 하던 이참봉이라는 분이 있었고 그 분을 통해 청주에 있는 김진한이라는 분에게 자금을 몰래 가져다 주었다는 게 후손들의 추정이다. 김진한은 당시 만주서 독립운동을 했고 일본 순사들이 검거를 위해 현상금을 내걸 정도로 요주의 인물이었다.

김씨는 “할아버지는 항일을 대외적으로 내세우지 않았지만 효심이 큰 아버지는 사실을 밝히고 싶어하기 때문에 제가 나선 것”이라며 “내년 정년 후 객관적인 사실을 찾기 위해 본격적으로 나설 예정”이라고 말했다.

한편, 지난 2002년 연기군 유림들이 김유열 열사 의열비를 조치원읍 신안리에 건립했고 최창규 전 독립기념관장이 발문을 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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