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종지역 만세운동, 상세 소개 책자 있다
세종지역 만세운동, 상세 소개 책자 있다
  • 김중규 기자
  • 승인 2019.02.27 16:14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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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치원읍장 지낸 맹의섭씨의 '추운실기'...현장감있는 기록으로 역사적 의미 커
조치원 및 연기지역, 탑골공원 만세운동 저널리스트 시각으로 상세하게 기록
맹의섭의 '추운실기'에는 조치원읍 서창지역 만세운동 주도자로 김규열이라고 쓰여져 있다.(사진은 2002년 연기지역 유림들이 건립한 김규열 의열비)

‘3.1 독립만세운동’ 당시 서울 탑골 공원과 거리 표정, 그리고 세종시(옛 연기군)에서 일어났던 민중 봉기 현장을 생생하게 묘사한 책이 새롭게 조명되고 있다.

특히, 이 책의 저자는 1891년 천안에서 출생해 1913년 조치원으로 이사한 뒤 매일신보, 경성일보, 동아일보 기자 등 일제 치하에 약 20여 년 간 언론계에서 활약, 저널리스트 문장으로 현장감을 살려 당시 역사 연구에 귀중한 자료가 되고 있다.

화제의 책은 훗날 조치원읍장을 지낸 맹의섭의 ‘추운실기’(鄒雲實記)로 고희(古稀)를 기념해서 집필에 들어가 자신이 작성했던 기사 스크랩과 기억을 더듬어 1972년에 발행했다.

당시 이 수기를 본 東大(동국대를 지칭하는 듯) 홍순옥(洪淳鈺) 교수는 “3.1운동에 관한 기록은 신변의 위험 때문에 글로 써두기를 꺼린 탓인지 거의 찾아볼 수 없다” 며 “실제 만세의거에 참여 실기로는 처음으로 매우 귀한 자료”라고 평가하기도 했다.

또, 편집국 권근술 기자(소속사는 불분명함)는 ‘추운실기’ 내용을 신문에 전재하면서 “그날의 주인공들이 하나 둘 노령으로 사라져 가면서 그날의 감격도 한갓 ‘옛 얘기’로 오르내릴 뿐”이라며 “서울의 만세 시위에 참가했던 한 항일투사가 자필로 쓴 수기를 간직하고 있음이 밝혀져 희귀한 자료로 관심을 끌고 있다”고 편집자 주를 달았다. 1972년도 신문이었다.

필자는 서울 탑골 공원에서 벌어진 ‘3.1 독립만세운동’을 기록으로 남기면서 연기지역에서 함께 상경한 인물들과의 관계, 활약상, 옥고 등을 상황별로 자세하게 적어 당시 만세운동과 지역인물들의 동정을 동시에 알 수 있게 했다.

'추운실기'에는 서울 탑골공원에서 일어난 만세운동에 대한 상세한 기록과 함께 연기군 지역의 횃불만세운동도 자세하게 수록해놓았다.

또, 연기군 내에서 일어난 만세운동 회수와 참가 인원, 그리고 주동 인물 등을 면별로 기록해 놓은 데 다가 경기도 광주 사람인 윤기조와의 사적인 인연, 즉 만세운동 때 헤어진 후 45년 만에 연기 남면 향교 제향에서 만난 사연, 을 소개해 생생한 증언과 현장감을 더해주었다.

탑골공원 만세운동과 조치원 지역 관련 글을 발췌하면 다음과 같다.

‘...우리 연기군에서는 2월초부터 나와 김재형군이 모의에 가담했다. 우리 2인은 2월 19일 상경하여 연기군민 일동의 명의로 봉도기 1폭과 사등롱 10쌍을 납상하고 내가 군민을 대표하여 3월3일 인산일에 상복차림으로 배종키로 한 후 경비들을 조달키 위해 김군은 유경(留京)키로 하고 나만 귀조(歸鳥)했다...

3월 1일 이다. 나는 연기군민을 대표하여...오후 1시쯤 조금 지나 김재형 전병수 이은식 3인 동지와 탑골공원에 들어가 보니 오전 학과를 평상시와 같이 마친 수천명의 학생들이 모여 있었다. 처음에는 학생들이 팔각정 전면으로 집결하다가...

추운실기 저자 맹의섭씨

학생대표와 상의한 후 다시 팔각정 후면으로 이동, 집결케 했다. 이 학생들은 조선민족대표들과 기맥이 상통해 있는 보전(普專)학생 강기덕과 연전(延專)학생 김원벽 양군의 지휘 하에 선포식에 참여하기 위해 운집 한 것이며 일반 민중들은 다수한 학생들이 모여드는 것을 보고 무슨 구경거리가 있는 줄 알고 모여든 것이었다.

또. 탑골공원에 전부 모일 수가 없어 시내 각 요소요소에 조선독립선포식을 마친 후 만세를 부르며 행진할 때 합류키로 한 학생들이 대기해 있었다. 2시가 되자 경신학교 졸업생인 정재용군이 선언서를 들고 팔각정 후면 단상으로 올라가 감격에 넘치는 흥분된 어조로 오등은 자에...하고 낭독을 시작하자 10년 동안이나 자취를 감추었던 태극기가 아름답고 씩씩한 자세로 한성 중앙의 창공에 춘풍에 표양하니 무심코 모여 들었던 대중들은 태극기를 보고 독립선언서를 들으니 이것이 꿈이 아니겠지 하고 취한 듯 미친 듯 갈피를 잡지 못하고 목이 터질 듯이 조선독립만세를 외쳤다.

만세소리가 진동하자 삽시간에 수만의 대중이 몰려 들다 다시 각 방면으로 흩어져 시내 요소에 대기 중인 학생과 합류하여 조선독립만세를 고창(高唱)하면서 나아갔다. 특히, 이승만 박사의 출신교인 배재고보의 1천명 학생들은 우리고장 조치원 학생인 홍범규 군의 영도 하에 학교 소재지인 정동을 떠나 탑골공원에 가장 가까운 우미관에 구경 차 집결하는 양 가장하고 대기하고 있다가 ...

연기지역 만세운동 기록물

서대문통을 향해 통한에서 터져 나오는 만세소리를 남달리 폭발시켰다. 천지를 진동시키는 조선독립만세 소리에 놀란 시민들은 상점문을 폐쇄하고 대중과 함께 시가행진에 참가하여 질서정연하게 행진했다...왜적들이 10년 동안이나 악질적으로 역선전하는 것만 믿고 우리민족은 독립할 자격이 없다고 믿고 있던 외국인들도 질서 정연한 시위 군중을 보고 문화민족으로서 진지한 기백에 놀랐음인지 미국 영사를 비롯한 각국 영사들도 문을 열고 혹은 손을 흔들고 혹은 함께 만세를 부르며 환영하며 동의를 표했다...’<탑골 만세운동>

‘...조치원을 중심으로 하여 군내 각지 산상에서 거화(炬火)를 들고 대한독립 만세를 부룬 회수는 참가인원과 피검인원도 상당한 수효였으나 금일을 위하여 기록할 수 없었던 그때의 실정이였으므로 기억에도 나아있지 아니하고 다만 적측에서 대강 추출하여 발표한 만세운동 진행 일람표를 참고로 하여 4296년 병신춘에 사단법인 애국동지 원호회에서 편집한 한국독립운동사와 시사시보사에서 출판한 3.1운동 비사 중에 수록한 것과 본부 내에서 누구나 다 알고 있는 실증을 토대로 해서 만세 부른 실적을 종합하여 보면...

단, 조치원에서 3월 30일 부른 만세는 조치원 시일을 이용하여 시장에서 부른 것이요. 기타 특히, 3월 23일은 조치원을 중심으로 하여 신안, 서창, 동리죽내, 번암백관, 월하 각 부락과 서면일부 촌락에서 부른 ...헌병 분소인 까닭에 총괄적으로 3,500명이라고 한 것과 같다....’<조치원 만세운동>

저자 맹의섭은 훗날 언론과의 인터뷰에서 “1927년 조치원 공립보통학교 운동회보에 ‘개인은 평등하나 사회는 불평등하다’는 글을 써서 뿌렸다가 옥살이를 했다” 며 “그 때 조치원 유치장이 내 사랑방이었다”고 회고하기도 했다.

탑골공원 만세운동 당시 궁지에 몰린 일본 순사가 모자와 칼을 버리고 시위군중과 함께 대한독립만세를 외쳤다고 쓰여져 시위군중의 위세가 대단했음을 암시했으며 권근술 기자는 “나라의 훈장도 없었고 국민의 기억 속에도 제대로 살아있지 못한 어느 독립투사의 쓸쓸한 모습이었다”고 기사를 마무리했다.

맹의섭씨는 일제 하에 20여년 간 언론계를 거쳐 해방 후 ‘건준’과 ‘국민회’ 연기군 지부장으로 재직했으며 지자체가 실시되기까지 8년간 조치원읍장으로 일을 했다. 훗날 근화원이라는 고아원을 16년간 운영하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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