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평리 만세운동, 2천3백명 참가한 대규모 시위였다
대평리 만세운동, 2천3백명 참가한 대규모 시위였다
  • 윤철원
  • 승인 2019.02.01 08: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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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철원의 세종 독립만세운동]금남 감성리, 대평리 등에서 최대 만세운동 벌여
만세운동으로 고초겼었으나 기록없어 후대 서훈받지 못한 점 안타까워

올해는 3.1운동 100주년이 되는 해다.

나라를 잃고 10년 동안 실의 빠졌던 우리 겨레가 일제로 부터 독립에 대한 열망을 한 순간에 표출했던 이 사건이야 말로 우리역사에서 국민이 진정한 나라의 주인이라는 것을 대내외에 천명한 첫 장거였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그 역사의 물결 속에서 세종시 지역에서는 어떠한 형태로 만세운동이 전개 되었는지 살펴보는 것도 의미 있는 일이라고 생각하면서 ‘세종의 소리’ 지면을 통해 6회에 걸쳐 소개하고자 한다.

연재는 ⓛ한눈에 보는 세종시 지역 3.1운동 ②전의면 ③조치원읍 ④금남,장군면 ⑤연기,연서,전동,소정면 ⑥연동,부강면 ⑦후기 등의 순으로 게재한다./필자 주

세종시 금남면 대평리 만세운동은 조선총독부 기록에 2천3백명이 참가한 것으로 남아있어 대규모 시위가 2차례에 걸쳐 있었다. 사진은 대평리 주변 항공사진
세종시 금남면 대평리 만세운동은 조선총독부 기록에 2천3백명이 참가한 것으로 남아있어 대규모 시위가 2차례에 걸쳐 있었다. 사진은 대평리 주변 항공사진

대평리 만세시위 ---- 조선총독부 기록이 2,300명일 정도로 대규모

금남면에서는 1919년 4월1일, 4월2일 등 두 번의 시위가 있었다.

4월1일 만세시위는 감성리에서 이루어진 것으로 생각된다. 헌병대 자료에는 ‘4월1일 연기군 대평 다수(燕岐郡 大平, 多數)’라고 기록되어 있다. 그러나 연기군지에 의하면 4월2일 감성장에서 두만리 고택현(高澤賢) 선생이 주도하여 100여명이 만세를 불렀다고 기록하였는데 두 기록을 종합하면 4월1일 감성리에서 만세시위가 있었다고 보는 것이 타당할 것 같다. 

4월2일 만세시위는 대평리장에서 일어났다. 대평리장은 감성장이 폐쇄되면서 1908년부터 열리기 시작하였다. 대평리 장은 뱃길이 닿던 공주, 부강지역과 유성, 남면 등의 장꾼들이 모여들던 곳으로 규모가 상당히 컸던 시장이다. 대평리 만세시위는 전의, 조치원에 이어 세종시 지역에서 있었던 마지막 행진형 시위였는데 조선총독부 『소요사건 경과개람표』에 참가인원이 2,300명으로 기록된 대규모 시위였다.

그러나 헌병대『조선소요사건 일람표』에는 300명으로 기록되어있는데, 이는 축소한 기록이라고 보는 것이 타당하다. 참고로 3월30일 수천 명이 참여한 조치원장날 시위도 헌병대는 230명으로 기록하였고, 3월23일 조치원 횃불 연합시위는 등재조차 않은 등의 예를 보더라도 헌병대 기록은 축소·조작한 기록한 것이라고 보아야 한다.

대평리 만세를 주도한 인물은 남면 양화·진의리에 거주하던 임헌규, 김봉식, 임병주, 이덕주, 임순철, 임헌빈 선생과 연기청년회 금남면 분회장이었던 반곡리 김상설 선생 등이다. 이들은 대평리 만세시위를 사전에 계획하였다.

모진 고문, 만세운동 참여 분명한데 기록 없어 서훈 받지못한 것 안타까워

4월2일 한 낮, 임헌규 선생이 장터 한복판에서 '대한독립만세'를 선창하고 군중이 호응하면서 행진시위는 시작되었다. 시위가 한창 진행되던 중에 도착한 조치원 헌병분견대의 무차별적인 진압에 시위대는 해산되었는데 그 와중에서 임헌규, 김봉식 선생 등 8명이 체포되었다.

이날 시위에서 임헌규 선생은 태극기를 앞세우고 군중을 이끌다가 체포되어 모진 고문과 매질에 인사불성이 되었다. 혼수상태가 계속되자 일제는 선생을 가족에게 인계하였다. 가족들의 극진한 간호로 일단 죽을 고비를 넘기고 점차 회복되던 중 그해 8월 다시 붙들려가 재판에 회부되어 2년이 지난 1921년 9월 공주지법에서 징역1년을 선고받았다. 최종적으로 그해 11월 경성법원에서 징역6월 집행유예 2년을 최종선고 받았으나 이미 2년3개월을 미결수 신분으로 옥고를 치룬 상태였다.

김봉식 선생은 전날인 3월 31일 양화리 전월산에서 진의, 송담리로 이동하면서 횃불시위를 주도한 후, 이날 시위에서도 선두에서 만세를 선창하다가 체포되었는데 징역 10월의 옥고를 치렀다. 정부에서는 임헌규 선생에게는 건국훈장 애족장을, 김봉식 선생에게는 건국포장을 추서하였다.

이날 함께 시위를 주도하다 체포된 남면의 임병주, 이덕주, 임순철, 임헌빈, 금남면 반곡리의 김상설 선생 등도 일제로부터 엄청난 고초를 겪었을 것이 분명한데, 당시 재판기록과 수형사실이 없다하여 아직까지 정부로 부터 어떠한 예우도 받지 못하고 있는 것은 참으로 안타까운 일이 아닐 수 없다.

장군면민 1,000여명 횃불시위 ... 40명 가까이 체포 구금돼

1919년 4월 6일자 매일신보는 『공주군 장기면 백성들은 일제히 단체가 되어 4월1일 밤으로 2일 상오 두시까지 등산하야 대한독립만세를 부르며 소요를 일으키어 형세가 점점 불온하다는 급보를 들은 공주경찰서원과 수비대가 출동하여 주모자로 인정할 만한 김가동(金嘉東), 김세현(金世顯), 리선구(李宣求), 리교찬(李敎燦), 리성실(李成實), 박정오(朴正五)외 30여명을 체포하여 공주로 압송하얏는데 그 후에도 계속 경계 중이라더라』고 보도하였다.

그런데 조선소요사건 일람표(헌병대)에는 4월3일 대교리에서 1,000여명이 소요하였으며 검거인원은 8명으로 기록하였다. 두 기록에 대하여 판단해보면 『4월 1일 밤에 장기면 일원에서 면민 1,000여명이 야간횃불시위를 전개했는데 일경과 헌병이 출동하여 주모자 김가동, 김세현, 리선구, 리교찬, 리성실, 박정오 등 36명 이상을 체포하였다』고 볼 수 있다.

조선소요사건 일람표(헌병대)에 기록은 대교리로 한정하고 있지만 주변마을들이 함께 참여했다고 보는 것이 타당하다. 매일신보를 주목해야 할 것은 『장기면 백성들이 단체가 되어...』라는 구절이다. 따라서 대교리를 중심으로 인근 도계리, 봉안리, 송학리, 태산리, 하봉리 등 대다수 마을주민이 참여해야 1,000명이 될 수 있다는 계산이 되는데 어린이와 노인, 그리고 부녀자를 제외하고 1,000명이 되려면 면 전체가 참여야 가능한 인원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조선 총독부는 4월1일 도계리, 100명이라고 기록하였는데 이것도 축소 조작한 것이라는 생각이다.

안타까운 것은 매일신보에 등장한 김가동 등 6명에 대하여 일제 재판기록이나 보훈처 공훈전자사료관을 검색해 보았으나 찾지를 못했을 뿐 아니라 다른 기록에서도 발견할 수 없었다. 엄청난 고초를 당하였을 것이 분명하지만 그분들이 받은 고난의 기록이 있는지 조차 알 수 없음에 송구할 뿐이다. 이분들의 공적이 잊혀 지지 않도록 장군면민들이 그 후 행적을 찾아주셨으면 하는 바람이다.

이 글을 쓴 윤철원은 세종시 상하수도과장으로 지난 2017년 정년퇴임을 한 조치원 토박이다. 조치원읍장 재직 당시 세종시로 명칭이 변경되면서 전통과 역사에 대한 시민 의식이 부족한 점을 아쉬워하면서 지역문화 연구에 매진했다. 이후 세종시 향토사 연구위원으로 활동하면서 지역과 관련한 역사를 찾아내 후손들에게 전해주는 역할을 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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