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향 금남면에서 나고 자라 40여 년째 약국을 경영하며 살아온 청송(靑松) 김승웅 박사(69)는 세종시를 둘러싸고 벌어진 그동안의 마음고생을 토로했다. 김 박사는 청송이라는 호 이름처럼 푸른 소나무로 고향을 지켜오고 있다.
김 박사는 1942년 연기군 금남면 박산리에서 3남4녀의 장남으로 태어나 금남초등학교(31회)와 금호중학교(5회)를 졸업하고 서울로 유학, 인창고등학교와 경희대 약학과를 졸업하고 26세 되던 해에 약사자격을 따냈다.
그런데 그 해 고향에서 사업을 하던 부친이 갑자기 돌아가시게 되자 좋은 직장을 마다하고 낙향한 김 박사는 금남면 용포리 193번지 현 위치에 금남약국을 개설했다.
해방되던 해 홍수로 대평리 마을 떠내려가 용포리로 이전
“외지사람들이 잘 모르는 사실인데요. 원래 대평리는 일제시대 현재의 건설청 주변에서 마을이 번창했었습니다. 내가 네 살 때인 해방되던 해 금강에 큰 홍수가 나서 마을이 폐허로 변하자 지금의 용포리로 마을이 옮기게 된 거예요.”라고 밝히는 김 박사는 대평리가 나라 중심의 큰 도시로 자리잡음을 기뻐했다.
당시 홍수로 폐허가 된 곳에서 마을사람들은 밭을 만들어 특수 농작물로 시오리(참외과 식물)와 무 등을 농사지어 단무지를 만들어 대전과 군 부대에 납품하며 수익을 올렸다. 정부시책으로 밭을 논으로 바꾸면서도 원주민들은 열심히 살며 자식들 가르치기에 여념이 없었다. 그 결과 각계에서 금남면 출신으로 성공한 사람이 많다. 근세 대표적인 인물로는 자유당 때 진헌식 충남도지사(내무부장관도 역임), 공화당 때 성낙서 충남도지사, 노명우 충남도지사 등이 있다.
고향의 지킴이로 금남면의 산 증인으로 활동한 김 박사는 토박이 친구들이 아직도 많이 살고 있는데, 객지 사람들이 들어와 주인행세를 하고 있음을 안타까워했다. 그래서 토박이 친구들이 모여 상의한 끝에 원주민의 권익을 보호하고 믿고 맡길 수 있는 ‘(가칭) 금남원주민조합’을 설립키로 뜻을 모아 조만간 창립 발기인 총회를 열 예정이다.
노무현 정부 때 안이 이루어진 세종시 개발안이 이명박 정부 들어서면서 수정안이 나왔을 때 원주민들은 마음 고생이 너무 심했다. 심지어 지역 출신 총리나 장관들은 물론 정치인등 지도층 인사들이 “대기업 공장이 들어와야 주민들이 잘 산다”고 마을 사람들을 회유했다.
하지만 원주민 마을사람들은 똘똘 뭉쳐 항거했다. “조상의 선대 무덤을 비롯해 농작지와 집을 내줄 때, 공장 지으라고 준 게 아니다”며 원안대로 행정중심도시 추진을 강력히 요구했다.
“공장 지어준다”는 각종 회유에도 주민들 흔들리지 않아
“민심은 천심”이라고 했던가. 이명박 정부는 지방선거에서 참패한 후 종전의 수정안을 철회하여 세종시는 미래 한국의 중심 수도로서의 기능이 기대된다.
김 박사는 “어떻게든 원안대로 되어서 마음이 편하고, 땅을 내준 의미와 보람을 느낀다”며 “원주민조합이 결성되면 개발 과정에서 원주민이 피해가 없도록 권익을 보호하는 일이 중요하다”고 역설했다.
후덕한 인상에 활달한 성격의 김 박사는 그동안 다방면에서 활동을 벌였다. 고향에서 현재의 약국 건물 터에 한옥을 구입하여 약국을 개설한 김 대표는 74년 건물 200여 평의 대지에 3층 건물을 지었다. 당시 금남면에서는 가장 큰 건물로 인기를 끌었다. 김 박사는 어려서 부친이 간으로 고생하시는 것을 보고 약사를 지원하여 대학에서 석사학위와 박사학위를 간에 관련한 것으로 취득하여 ‘간 박사’로 소문이 나있다. 지금도 전국에서 환자들이 찾아오고 있다.
김 박사는 또한 올해 60주년을 맞는 금호중학교 총동창회장을 맡아 장학기금 조성사업으로 후배 양성에도 정성을 쏟고 있다.
금남약국의 한 견에는 20여 년 전 유명한 서예가가 썼다는 초서체 글씨가 눈에 들어온다. “藥學智的進碩士 金醫名勝進時雄(약학지적진석사 김의명승진시웅:약학의 지혜로 석사의 경지까지 갔으니, 김씨의 의술이 이름을 날리어 때에 맞추어 영웅으로 나아간다)의 내용은 이미 김 박사의 봉사하는 삶을 예고한 글이다.
김 박사는 또한 1986년 금남신협을 창설하여 고향의 자금을 잘 운용하기도 했고, 충남아마튜어레슬링협회 회장, 충남약사회 회장을 역임하는가하면 국제라이온스클럽 309-2지구 부총재 등도 맡아 봉사활동에도 열심이다.
자식들에게 “최선을 다해 노력하며 살라”고 가르쳐
자식들이나 주변 지인들에게 “최선을 다해 노력하며 살라”고 권고한다는 김 박사는 아버지의 병환으로 인해 갖게 된 약사의 직업에 아주 만족한다고 밝혔다.
김 박사는 중매로 만난 대전 출신의 동갑내기 부인 손길순 여사와의 사이에 2남2녀의 자녀를 두고 있다.
우리나이로 70살의 연세임에도 피부가 너무 맑고 윤기가 나는 김 박사에게 기자가 건강 비결을 묻자, 7가지로 요약해 대답했다.
첫째로, 밥을 먹는 데 현미와 콩을 넣어 주식으로 한다.
둘째, 신선한 야채를 많이 먹는다.
셋째, 적당한 운동을 매일 30분에서 1시간 한다. 김 박사는 유산소 운 동으로 런닝머신을 한다고 밝혔다.
넷째, 항면역식품(버섯반찬, 해조류, 야채 등)을 먹는다.
다섯째, 절제(節制)가 무엇보다 중요하다. 과음하지 않고 담배는 전혀 안 피우고 저장식품이나 가공식품은 절대 안 먹는다.
여섯째, 물은 약알칼리수(PH 6.3정도)를 마신다. 세계적으로 유명한 루드루마을의 광천수처럼 깨끗한 물만 잘 마시게 되면 건강이 매우 좋아진다는 것이다.
일곱째, 하루에 20~30분 씩 햇볕을 쬐어라. 햇볕에는 비타민 A, D를 생성하는가 하면 각종 바이러스를 죽이는 살균력이 대단하다. 따라서 얼굴이나 배, 관절 부위에 수건 등으로 가리고 햇볕을 쐬면 좋다.
김 박사는 자신의 7가지 건강비결만 잘 지키면 건강을 충분히 유지할 수 있다고 역설했다.
기자는 인터뷰를 마치면서 스승을 찾아 나선 문외한이 인생의 고수로부터 대단한 비법을 전수받은듯 희열을 느꼈다. 인생도처유상수(人生到處有上手)라고 했던가. 그저 기쁘고 감사할 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