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치원읍 만세운동, 전국 최초 마을 간 연합 횃불시위
조치원읍 만세운동, 전국 최초 마을 간 연합 횃불시위
  • 윤철원
  • 승인 2019.01.28 07:5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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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철원의 세종 독립만세운동] ③조치원에서 만세시위 3차례 ... 충북 강내 오송, 태성리 주민들 대거 참여
추운실기 저자 맹의섭, 탑골공원에서 3.1 만세운동 목격하고 조치원에 돌아아 홍의섭 등과 만세운동 계획

·올해는 3.1운동 100주년이 되는 해다.

나라를 잃고 10년 동안 실의 빠졌던 우리 겨레가 일제로 부터 독립에 대한 열망을 한 순간에 표출했던 이 사건이야 말로 우리역사에서 국민이 진정한 나라의 주인이라는 것을 대내외에 천명한 첫 장거였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그 역사의 물결 속에서 세종시 지역에서는 어떠한 형태로 만세운동이 전개 되었는지 살펴보는 것도 의미 있는 일이라고 생각하면서 ‘세종의 소리’ 지면을 통해 6회에 걸쳐 소개하고자 한다.

연재는 ⓛ한눈에 보는 세종시 지역 3.1운동 ②전의면 ③조치원읍 ④금남,장군면 ⑤연기,연서,전동,소정면 ⑥연동,부강면 순으로 게재한다./필자 주

조치원 만세시위 3번 열려 --- 전국 최초 충남·북 마을간 연합 횃불시위도

조치원읍 만세운동은 전국 최초로 충남북 도계 마을 간 합동으로 횃불시위를 했다는 데 역사적 의미가 있다. 사진은 조치원읍 만세운동이 시작된 전통시장

조치원 지역에서는 3월23일, 28일, 30일 등 3번의 만세 시위가 있었는데 그 추진 배경부터 소개하고자 한다.

1919년 1월21일 고종황제께서 갑자기 붕어하셨다. 이때에 경향각지에는 고종황제께서 독이 든 감기약을 마시고 돌아가셨으며 곁에서 모시던 궁녀 2명도 현장에서 학살당했다는 소문이 돌았다. 이 소문은 삽시간에 전파되어 전국적인 분노를 자아내면서 일제의 만행에 총궐기해야 한다는 분위기가 고조되었다고 ‘추운실기’(鄒雲實記)는 전하고 있다.

이러한 분위기 속에서 추운실기 저자인 맹의섭(초대 조치원읍장 역임)은 연기청년회장으로서 연기군민을 대표하여 3월 3일 거행되는 인산(因山, 황제의 장례)에 참여하기로 하고 연기청년회원 김재형, 전병수 등과 함께 상경하였다.

2월19일 서울에 도착한 이들은 시국분위기를 알아보던 중 3월1일 탑골공원에서 독립선언서 낭독 및 만세시위가 있다는 정보를 입수하면서 고조된 독립의지와 열기를 확인하였고, 기독교인이었던 김재형은 민족대표 33인 중 한분인 박동완 당시 정동감리교회 전도사를 만나 독립선언문 500매를 수령하게 된다.

3월1일이 되자 이들은 탑골공원 현장에 도착하여 학생과 군중이 모여드는 광경과 정재용 경신중학교 졸업생이 단상에 올라가 독립 선언서를 낭독하는 모습을 목격하였다.

그리고 그곳에 있던 군중과 함께 ‘대한독립만세’를 외치며 종로 방향으로 행진하던 중 일경의 무차별 진압에 쫓겨 사방으로 흩어졌다. 서로 소식을 모르다가 3일 후에 다시 만날 때는 이들보다 늦게 상경했던 이은식 까지 4명이 귀향하면서 조치원 만세운동을 결의를 하게 된다.

조치원에 돌아 온 맹의섭 등은 시강원 주사로 있다가 고종황제께서 역신들의 강압에 못 이겨 양위하는 것을 보고 분개하여 사직 후 서면에 낙향은거 중이던 홍일섭 선생을 뵙고 만세운동에 앞장서 줄 것을 청하였다. 흔쾌히 참여하겠다는 홍일섭 선생의 쾌락에 따라 6인동지회를 구성하고 은밀하게 계획을 세운다.

이 계획에 따라 조치원면은 연기청년회원을 지역별로 분담 편성하여 준비하게하고 그외 면은 면분회장을 중심으로 추진하게 하였으며 인접한 공주, 천안, 청주 등의 마을에도 비밀리 독립선언서를 전달하면서 만세시위를 하도록 권유했다고 ‘추운실기’는 전한다.

이 기록이 사실이었음을 확인할 수 있는 사례가 청주 서·남부지역 만세 운동이다. 당시 조치원에서 매일신보 판매업을 하던 김재형은 서울에서 가져온 독립선언서 500매 중 350매를 조치원에 사는 김재석에게 주어 문의, 미원, 보은 등에 전달하게 하고 나머지 150매는 자신이 직접 50매씩 봉투에 넣어 강내면에 사는 조동식, 김봉회, 박준평 등에게 전달하여 만세 운동을 전개하도록 권유하였다.

이후 3월 23일 전개된 조치원 횃불만세운동에 강내·강외·옥산면 주민이 함께하였고 3월30일에는 미원장터, 4월6일에는 문의면, 4월8일에는 보은장터에서 연속적으로 만세운동이 일어났는데 조치원에서 전달한 독립선언서가 상당한 자극제 역할을 하였을 것이 분명하다는 생각이 든다.

3월23일은 조치원을 중심으로 전국 최초로 충남·북 도계마을 간 연합횃불만세 운동이 전개된 날이다. 이날을 위해 연기청년회에서는 조치원 및 인근 면별로 사전준비를 하도록 회원별 분담구역을 편성하였다.

조치원 만세운동을 주도한 홍일섭 생가. 그는 노태우 대통령 당시 건국훈장 애족장을 받았다.

구장터(평리) 최성삼, 신안·서창리 김규열, 동리(봉산리) 김재형, 번암리 맹의섭, 백관(신흥리)·월하 이은식, 죽림리 전병수, 서면 와촌 신도균·장달식, 서면 봉암리 윤봉균, 남면 양화·진의 임헌빈 등으로 편성했다. 이들은 미리 횃불을 준비하고 직접 다니며 주민에게 참여하도록 계몽·계도를 펼쳤다.

이윽고 3월23일 밤 11시가 되자 각 지역에서 횃불을 들고 일제히 “대한독립만세”를 목이 터져라 외쳤다. 이날의 참여 기록은 연기군지와 추운실기에 동일하게 실려 있는데 3,500여명이라고 전한다.

이날 특별히 주목되는 것은 청주 강내·강외면 주민의 횃불시위이다. 당시의 상황을 매일신보는 ‘23일 밤 11시경 부터 청주군 강내면에서 산상에 불을 피우고 연달아 만세를 부르다가 점점 조치원을 향해 달려왔는데 그 수를 확실히 알 수는 없으나 이삼천명 가량이 되는 모양이며 .....’라고 보도했다.

조치원에서 8㎞이상 떨어진 강내면 태성리와 오송주민이 산상에서 만세를 외치고 야간에 조치원을 향해 행진했다는 것은 각 지역 지도자들이 사전에 일정 및 집결 장소 등을 협의했다고 보는 것이 합리적이다.

따라서 이날 전개된 횃불시위는 전국최초로 도계마을이 연합하여 전개한 ‘횃불만세시위’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이와 같이 일제 기관지인 매일신보가 보도하였고 엄청난 규모의 인원이 참가한 횃불시위였음에도 조선총독부 및 헌병대의 『조선소요사건』 기록에서는 찾을 수가 없다는 것은 일제가 고의로 누락했다고 밖에 달리 생각할 여지가 없다.

3월28일 밤 11시, 조치원 구장터(평리)에서 횃불시위를 하였다고 매일신보는 보도하였다. 또 추운실기에도 100여명이 횃불만세를 불렀다고 수록하고 있으나 이 역시 일제의 『조선소요사건』기록에서는 찾을 수 없다.

3월 30일은 조치원 장터에서 만세 시위가 전개된 날이다.

연기청년회는 이날 시위군중을 유도할 방편으로 회원들을 미리 시장 곳곳에 배치하였다. 이윽고 오후 2시 30분이 되자 조치원 시장의 한 모퉁이(현 시장 주차장 부근)에서 홍일섭 선생이 ‘대한독립만세’를 선창하였다.

이에 호응하여 시장 전역에서 천지를 진동하는 만세소리가 울려 퍼졌고 파발마 같은 시위군중들의 행진이 시작되었다. 얼마가 지난 후 조치원 헌병분견대의 무차별적인 진압이 시작되면서 부상자가 속출하는 동시에 수백 명이 검거되었다.

대표적인 부상사례를 소개한다. 김규열 선생은 일본헌병이 휘두른 총개머리판에 크게 다쳤다. 머리뼈가 앞뒤로 두 군데나 함몰되어 유혈이 낭자하게 흐르자 죽었다고 판단했는지 가족에게 인계하였는데 3일후 극적으로 소생했다.

임헌석 선생은 헌병의 총검에 복부가 관통되어 바로 옆에 있던 일본고시의원에 치료를 요청했으나 거부당했다. 어쩔 수 없이 한약방으로 옮겨 응급조치를 받고 생명은 구했지만 79세 작고할 때까지 병치레가 끊이지 않는 고생을 하였다.

이처럼 명백한 부상사례가 있음에도 일제의 헌병사령부 『조선소요사건일람표』에는 이날 조치원시위가 기록조차 없을 뿐만 아니라, 조선총독부『조선소요사건 개람표』에는 참가인원 1,500명, 부상자는 없는 것으로 기록되었다. 일제가 얼마나 우리민족의 만세운동을 축소 지향적으로 기록하였는지를 가늠할 수 있는 사례이다.

김규열 선생의 의열비와 홍의섭 선생의 건국훈장 애족장

이날 체포된 사람들에게 일제헌병 분견대는 자의적으로 30〜90대의 즉결 태형을 가하였다. 추운실기에 의하면 태형을 30대만 당해도 엉덩이 살이 찢겨져 유혈이 낭자했다고 하는데 90대라면 어떨는지 짐작이 안갈 정도다. 그러한 고문 속에서도 홍일섭 선생은 끝까지 한국인의 기개를 굽히지 않고 일제의 부당함을 주장하였다.

이후 징역 1년의 옥고를 치르고 출옥하였으나 고문의 여독으로 고생하다가 그토록 염원하던 조국의 광복도 보지 못한 채 1935년 작고하였다. 충청남도 문화재자료로 지정되었던 선생의 묘소는 연서면 신대리에 있었는데 2010년 대전 현충원 독립유공자 제3묘역으로 이장하였다.

같은 해 후손들이 선생의 유품은 3.1운동의 역사자료로 활용되어야 한다는데 뜻을 모으고 256점을 모두 독립기념관에 기증하였고, 신대리 승적골의 선생 생가에는 현재 손자부인 김춘영(83세)여사가 살고 있다. 정부에서는 선생의 공훈을 기려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하였다.

한편, 충북지역에 독립선언서를 비밀리 배포했던 김재형 선생은 3월29일 청주경찰이 조치원까지 와서 체포해 가는 바람에 안타깝게도 그토록 준비한 조치원 장터 시위에는 참여하지 못하였다. 일제가 징역 2년을 선고하여 옥고를 치렀으며, 정부는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하였다.

이상과 같이 일제의 악독한 만행이 있었음에도 비폭력으로 일관한 조치원 만세시위는 3.1운동의 비폭력 저항정신을 처절하게 실천한 것이라고 볼 수 있다.

이 글을 쓴 윤철원은 세종시 상하수도과장으로 지난 2017년 정년퇴임을 한 조치원 토박이다. 조치원읍장 재직 당시 세종시로 명칭이 변경되면서 전통과 역사에 대한 시민 의식이 부족한 점을 아쉬워하면서 지역문화 연구에 매진했다. 이후 세종시 향토사 연구위원으로 활동하면서 지역과 관련한 역사를 찾아내 후손들에게 전해주는 역할을 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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