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종지역 3.1 만세운동, 일제가 왜곡·축소했다
세종지역 3.1 만세운동, 일제가 왜곡·축소했다
  • 세종의소리
  • 승인 2019.01.21 08:5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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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철원의 '세종 독립만세운동'] <1>전의 만세운동 기록에는 1백여명, 실제로는 1천여명은 넘었을 것
조치원, 금남, 장군면 등 만세운동, 새롭게 밝혀지면서 세종시 전역에 걸쳐 대한독립 외쳐
1919년 3월 전국적으로 전개된 독립만세운동에 세종지역에서도 여러지역에서 동시에 횃불을 앞세워 동참한 것으로 알려졌다. 사진은 지난 2017년 전의만세운동을 기념하는 거리 풍경

올해는 3.1운동 100주년이 되는 해다.

나라를 잃고 10년 동안 실의 빠졌던 우리 겨레가 일제로 부터 독립에 대한 열망을 한 순간에 표출했던 이 사건이야 말로 우리역사에서 국민이 진정한 나라의 주인이라는 것을 대내외에 천명한 첫 장거였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그 역사의 물결 속에서 세종시 지역에서는 어떠한 형태로 만세운동이 전개 되었는지 살펴보는 것도 의미 있는 일이라고 생각하면서 ‘세종의 소리’ 지면을 통해 6회에 걸쳐 소개하고자 한다.

연재는 ⓛ한눈에 보는 세종시 지역 3.1운동 ②전의면 ③조치원읍 ④금남,장군면 ⑤연기,연서,전동,소정면 ⑥연동,부강면 순으로 게재한다./필자 주

세종시 지역에서 만세시위는 1919년 3월 13일부터 4월 10일까지 11일에 걸쳐서 총 24회 진행되었다. 읍면별로 보면 남면 7회, 서면 5회, 조치원 3회, 동면·부강 각 2회, 금남·전의·전동·소정·장기면 각 1회 등이다.

이에 대한 근거는 일제가 발행한 소요사건 일람표(총독부 자료, 헌병대 자료 2종)과 매일신보기사, 보훈처의 전자공훈사료관, 연기군지 등에서 찾을 수 있는데 자세한 내용은 연재 편에서 밝히도록 하겠다.

세종지역 만세운동의 특징은 ⓵ 횃불형 만세 시위가 주를 이루면서, ⓶지방인 점을 고려해도 대규모 행진형 시위였고, ⓷비폭력시위였다는 점이다.

먼저 횃불 만세시위를 살펴보면, 3월 23일부터 시작하여 4월 10일까지 지속됐다. 그 진행방식은 어느 마을주민들이 산상에 모여 횃불을 밝히고 만세를 부르면 이웃마을에서도 산상에서 횃불로 호응하는 방식으로 주민의 관심과 참여를 유도하는데 주효했던 것으로 평가된다.

특히, 3월 23일 조치원을 중심으로 이루어진 야간 횃불만세시위는 연기군 관내 조치원면, 서면, 남면의 여러 마을과 청주서부 지역의 강내, 강외, 옥산 지역이 함께 호응하여 진행된 시위다.

이날 참여한 인원을 초대 조치원 읍장을 지낸 맹의섭씨는 ‘추운실기’에서 3,500여명이라고 회고하였다. 매일신보의 보도에 따르면 조치원에서 수 천명이 횃불 만세를 불렀고, 이웃의 청주 강내면, 강외면에서는 주민 1,000여명이 횃불을 들고 조치원을 향하여 행진하다가 일제 헌병의 저지로 해산하였다는 기록이 있는데 그날의 시위가 대규모였음을 짐작케 한다.

이 부분에서 우리가 특별히 주목해야 할 것은 3월23일 시위가 전국 최초의 도계 마을간 연합시위였다는 점이다.

행정구역을 달리하는 도계 마을 주민들이 사전에 연락하고 치밀하게 준비하여 같은 시각에 연합시위를 했다는 점은 당시 우리민족의 독립에 대한 열망이 얼마나 간절했는지를 보여 주는 대목이라 하겠다.

따라서 3.1운동 100주년을 맞이하여 이를 재조명하고 새롭게 평가하여야 할 필요가 있다고 생각한다. 이날의 추진 배경과 경과에 대한 자세한 내용은 ‘조치원 편’에서 소개하고자 한다.

두 번째, 시가 행진형 시위는 대규모였다는 점이다.

세종시 지역에서 시가 행진형으로 낮에 이루어진 만세시위는 모두 세 번이다. 3월 13일 전의 장날, 3월 30일 조치원 장날, 4월 2일 대평리 장날 등이다. 일제 기록에 의하면 전의 150명, 조치원 1,500명, 대평리 2,300명이다. 그러나 모두 인원을 축소한 기록으로 보인다.

전의만세시위를 예로 들어 살펴보고자 한다.

전의만세의 중심에 있었던 이수욱 지사를 비롯한 신정리 마을주민 17명은 3월13일 전의 장날 만세시위를 하기로 결의하고 목판으로 태극기 150매를 제작했다.

시위당일 이들은 전의 시장으로 넘어가는 갈정고개에서 장보러가는 사람들에게 나누어 주면서 점심 무렵 만세시위를 할 예정이니 함께 호응해 줄 것과 사전에 발각되지 않도록 태극기를 품속 깊이 보관하라고 당부하고 12시 40분경부터 만세행진을 진행하였다.

그런데 일제의 기록은 이날 참여 인원이 태극기 숫자와 같은 150명으로 기록하고 있다. 이는 엉터리 통계라고 밖에 볼 수 없는데 그 이유는 다음과 같다. 당시 전의 장으로 통하는 길은 공주 방면의 소서 6개리 통로, 소정면과 광덕면에서 오는 유천리 통로, 조치원 쪽에서 오는 전동통로, 병천·수신 방면에서 관정리와 갈정고개를 지나가는 관정리 통로 등 4개이다.

그렇다면 갈정고개를 넘어가는 장꾼의 수가 모두 150명이라 해도 그 수는 1/4에 불과하다. 다른 세 길로 온 장꾼들과 읍내 지역 주민까지 합한다면 그날 참여 인원은 적어도 1,000여 명이상이라고 보는 것이 타당하다.

전의만세운동은 실제보다 축소왜곡되어 일제는 보고했다. 사진은 1919년 4월2일 전의만세운동을 보도한 '매일신보' 기사

그럼에도 일제가 참여 인원을 줄인 것은 우리 민족의 독립의지를 폄훼하려는 의도가 저변에 깔려 있다고 보아야 한다. 이러한 사례는 전국의 모든 만세시위 기록에서 발견 할 수 있는데 일제의 기록에만 매몰되어 우리 선열들의 치열했던 독립의지와 열망을 저평가하는 어리석음을 범하지 않도록 경계해야 할 대목이다.

세번째 비폭력 시위였다는 점이다.

이는 독립선언서의 공약삼장 중 세 번째 항목을 실천한 것이다.

“일체(一切)의 행동은 가장 질서를 존중하야 오인(吾人)의 주장과 태도로 하여금 어데까지든지 광명정대(光明正大)하게 하라”는 것이 그 내용인데 시위가 끝날 때까지 우리지역 선열들이 일제헌병에게 부상을 당하였다는 기록은 있어도 폭력으로 대항하였다는 기록은 찾아 볼 수 없다.

비폭력 저항을 처절하게 몸으로 실천했음을 알 수 있는데 이에 대한 내용도 연재 편에서 상세히 소개하도록 하겠다. 앞으로 5차례에 걸쳐 소개하게 될 이 자료가 3.1운동 100주년을 맞아 세종시 관내의 만세운동을 이해하는데 도움이 되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서두의 인사를 드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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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철원

이 글을 쓴 윤철원은 세종시 상하수도과장으로 지난 2017년 정년퇴임을 한 조치원 토박이다. 조치원읍장 재직 당시 세종시로 명칭이 변경되면서 전통과 역사에 대한 시민 의식이 부족한 점을 아쉬워하면서 지역문화 연구에 매진했다. 이후 세종시 향토사 연구위원으로 활동하면서 지역과 관련한 역사를 찾아내 후손들에게 전해주는 역할을 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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