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 허무하구나, 그래서 허무니 고개"
"아~ 허무하구나, 그래서 허무니 고개"
  • 임영수
  • 승인 2013.01.24 17:31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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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영수의 세종을 만나다]비봉귀소형 명당에서 유래한 봉기리

   봉기리 전경
봉기리는 백제시대 웅진의 소비포현(所比浦縣)에 속하였고 고려때부터 공주에 속했으며 조선말엽에는 공주군에 속하였다. 조선말기 공주군에 편입되었을 때에는 명탄면 전탄리라 불렀다. 이곳은 북서쪽으로 흐르는 금강의 물살이 화살과 같이 빠르다는 뜻으로 지명이 붙여진 것이며 비봉귀소형(飛鳳歸巢形)의 명당이 있다하여 풍수가들에게 널리 알려진 곳이며 여기에 연유하여 봉기(鳳起)라는 이름이 생겨났다. 1914년 행정구역 개편 때 연기군 금남면에 편입되었으며 봉기리 앞으로 흐르는 금강을 새여울 이라 불렀던 것이 변하여 ‘사려울’이라 부르고 있다.

재영 : 봉기리에는 고인돌이 있고 마을 언덕에 커다란 느티나무도 있고 이곳에는 왠지 재미있는 전설이 많을 것 같아요.

아빠 : 봉기리에는 고개에 얽힌 전설, 고인돌에 얽힌 전설 그리고 나무에 얽힌 전설 등 많이 있지. 차례대로 들려줄까.

재영 : 우선 고개에 얽힌 전설 먼저 들려주세요.

아빠 : 마을에서 북쪽으로 고개를 넘어가면 금강이 나오는데 이 고개를 허무니 고개라고 부른단다.

재영 : 허무니 고개요?  이름이 특이하네요.

아빠 : 옛날 이곳 마을에는 인색하기 짝이 없는 자린고비가 살고 있었단다. 그는 재산을 많이 가지고 있으면서도 어찌나 절약을 하는지 시장에서 조기 한 마리를 사다가 천장에 매달고는 밥 먹을 때 밥 한술을 떠먹고 그 조기를 한번 쳐다보는 것으로 반찬을 대신할 지경이었어. 하루는 그가 마당을 쓸고 있는데 똥파리 한 마리가 날아와 장독대를 날아다니다가 마침 열어 놓은 된장독에 들어가 된장을 빨아 먹었어. 깜짝 놀라 그 파리를 쫓으니 그 파리가 다리에 된장을 묻혀 가지고 달아났어.

   마을 회관
그는 그 파리 다리에 묻은 된장이 아까워 그것을 되찾아 오려고 행주를 들고 똥파리를 쫓아갔지. 그 파리와 자린고비가 경주를 하듯이 달아나고 쫓아서 마을을 몇 바퀴 돈 뒤에 마을 뒤에 있는 고개까지 가게 되었지.  열심히 파리를 쫓아서 고개까지 왔는데 그만 고개에서 돌부리에 걸려 넘어지고 말았어. 그 순간 파리는 어디론가 사라지고 행주를 든 자기 모습이 초라하게 느껴져 ‘아. 허무하거나.’라고 외쳤지.  그 후부터 이 고개를 ‘허무니 고개’라고 부르고 있어.

재영 : 정말 어처구니없는 이야기네요.
그런데 절약정신을 본 받아야할지 아니면 할일 없는 부자의 모습인지 아리송하기만 해요.

아빠 : 또 하나 이야기 하여 줄까. 이곳 마을에는 두 군데에 고인돌이 있어.  마을 서쪽에 금강으로 가는 곳에 두기가 있고, 마을 북쪽 방금 이야기한 허무니 고개에서 금강쪽으로 중간에 기다란 고인돌이 있지.  지금 이야기는 마을 서쪽에 있는 고인돌을 마을 사람들은 넓적 바위라고 부르는데 이 넓적 바위 중간에 부잣집이 있었지. 이곳 일대의 땅은 모두 이 부잣집 땅이었기에 하인 또한 많았지.

그런데 그 집 마님은 욕심이 많기로 소문이 났으며 하인들은 주인마님의 등살에 혀를 내둘렀어.  광에는 곡식이 가득 찼으나 집안 식구들은 물론 절약에 절약을 강요하고 심지어는 부엌에 가서 밥 짓는 것을 감독할 정도로 짜고 짠 마님이라는 소문이 돌았어.  어느 날 이곳에서 멀지 않은 대박리 절에 사는 스님이 이곳으로 시주하러 왔었어.

하인들은 주인이 여태까지 남을 돕는 모습을 보지 못했기 때문에 스님께 이곳은 포기하고 그냥 가시라고 타일렀어. 그랬더니 스님 또한 그냥 갈 수 없다며 대문 밖에서 계속 염불을 외우며 목탁을 두드렸어. 그 소리를 들은 안방마님은 하인을 시켜서 구정물을 떠 오게 했어. 그리고 스님께 냅다 끼얹으면서 “가라거든 얼른 갈 것이지. 왜 이리 안가냐?, 시주할 쌀이 있으면 우리 하인 주지 너를 주겠냐!”하였어.

   봉기리에 있는 기와집
재영 : 스님이 가엾네요.

아빠 : 구정물 세례를 받은 스님은 계속 목탁을 치더니 다음과 같은 말을 남겼어. “더 큰 재산이 올 터인데 돌아 앉았구먼” 하였지. 화를 내던 마님은 그것이 무슨 소리냐며 스님께 다그쳤지. “이곳의 지형을 보아하니 앞으로 천석, 만석 불어날 터인데 집 옆에 있는 넓적 바위가 돌아 앉았으니 그리 되지 않고 있소”

안방마님은 이번에는 부드러운 목소리로 어떻게 하면 되냐고 물었어, 그랬더니 넓적 바위를 반대 방향으로 틀면 된다고 가르쳐 주고 어디론가 사라졌어.  안방마님은 당장 하인을 시켜 바위를 돌려놓게 했지. 그로부터 시간이 흐르면서 재산이 불기는커녕 점점 줄어 이제는 가세가 기울대로 기울어 결국 이곳의 부자는 망하고 현재 이곳에는 당시 부잣집 이었던 흔적으로 기와 편만이 간간히 출토 되고 있지.

재영 : 욕심 부리던 안방마님이 스님에게 당하고 말았네요.  봉기리에 전해오는 이야기가 하나 더 있으면 해 주세요.

아빠 : 봉기리에서 금강쪽으로 분홍고개를 넘어 괴뱅이 나루 바로 뒷산 중턱에 엎드린 바위라는 굴 바위가 있어. 그 바위 아래로 큰 방 2칸 만한 공간이 있지. 거의 인공적인 석굴을 연상하게 하는데 여기에 안으로 벌어진 틈이 있는데 여성의 성기와 같이 생겼다 하여 전해오는 이야기가 있지.

옛날부터 아들을 못 둔 부부가 이 굴바위에 와서 치성을 드리고 굴 안 틈새에 돌을 던져 그 돌이 쏙 들어가 홈을 타고 굴러 나오면 아들을 낳는 다는 것이야. 이러한 믿음이 생긴 후로는 아들을 낳고자 하는 부부들이 찾아와 기도를 하고 돌던지기를 하고 가지. 지금은 그 굴이 아예 기도터가 되어 많은 사람들이 찾아오고 있는데 그곳에 조그만 암자가 생겨서 관리하고 있어.

재영 : 봉기리에서도 산제를 지내나요?

   봉기리 골목
아빠 : 지금은 산제를 지내지 않고 있지만 마을 뒷산에 산제당이 있어. 다른 마을처럼 산제를 정성껏 지냈지. 이곳 산제는 음력 10월 1일에 지냈어. 만약 9월 15일이 넘어서 동네에 초상(부정한 날)이 나면 동짓달로 연기를 하지. 그래서 1992년과 1993년에는 부정한 일이 생겨서 산제를 지내지 못했어. 산제 지낼 때 우선 생기 복덕한 사람을 뽑아서 제관으로 삼고 5일 동안 찬물로 목욕을 한 다음 제당 청소를 깨끗하게 하고 제관은 매일 새 옷으로 갈아입지. 제수는 삼색실과와 통돼지를 제물로 바치는데 간혹 소 앞다리를 놓고 지낼 때도 있었어. 동네사람들은 집집마다 시루를 만들어 장독에 놓고 1년 집안 편안함을 기원하지.
재영 : 석교리와 반곡리의 괴화산 산제처럼 이곳 마을도 산제를 정성들여 지내고 있었네요.

아빠 : 지금은 마을 회관에서 약식으로 지내고 있지만 몇 해 전까지만 해도 산제당에서 지냈었어.  마을에 있는 큰 나무에 관하여 이야기 하여 줄까?

재영 : 그래요. 그렇잖아도 언덕에 있는 커다란 느티나무와 은행나무에 관하여 묻고 싶었었어요.

아빠 : 이 마을에는 오래된 세 그루의 나무가 있지. 회나무, 은행나무, 느티나무인데 일제시대에 은행나무를 팔려고 하였어. 그런데 동네사람 꿈에 “너희가 그 나무를 건드리면 마을이 망할 것이다.”하였지. 동네사람들은 그 후 세 나무를 더욱 정성들여 보살폈으며 6․25 전쟁 때 이곳 사람들은 전혀 해를 입지 않았어. 그것이 이 삼목(三木)의 덕택이라고 믿고 있지.

재영 : 나무가 그냥 서 있는 것이 아니라 마을을 지켜주고 있네요.

아빠 : 와와 이야기를 해 줄까?

재영 : 와와가 뭐예요?

   봉기리 고인돌
아빠 : 옛날에 이곳 마을에 ‘와와’라는 머슴이 있었어. ‘와와’라는 머슴은 고집이 세어 주인하고 의견충돌이 잦았어. 주인이 이 일을 해라 하고 명령을 내려도 마음이 내키지 않을 때에는 그 일을 하지 않았어. 한번은 주인이 야단을 쳤더니 와와가 마음이 상하여 음식을 전폐하였어. 주인은 하는 수 없이 와와가 밥을 먹어야 일을 하기 때문에 쇠고기국을 끓여 주었는데 그래도 고집을 풀지 않고 밥도 먹지 않고 일도 하지않고 있는 것이야. 하는 수 없이 주인은 자존심을 버리고 와와 앞에 가서 잘못했다고 사과를 하였어. 그런 후에 와와가 고집을 꺾고 일을 했지. 그때부터 이곳에서는 누가 고집을 세게 부리면 ‘와와 고집 세운다.’라고 하고 있어.

재영 : 대단한 고집쟁이이네요.

아빠 : 봉기리의 지명을 이야기 해 줄까?

재영 : 예. 이야기 해 주세요.

아빠 : ‘새말’이라 부르는 곳은 마을 남쪽 큰길 건너에 있는 곳으로 새로 생긴 마을이란 뜻이지. 일제시대에는 이곳을 ‘원봉’이라 불렀고, 새말은 ‘신봉’이라 불렀어. 마을 동북쪽 골짜기를 ‘이성골’이라 부르고 동쪽을 ‘용실봉(龍實峰)’이라 하는데 그 아래를 ‘용실’이라 부르지.

마을 남쪽으로 절터가 있는데 이곳을 ‘금당’이라 부르고 있어. 지금도 기와 조각이 출토되고 있지.  마을 동쪽에 있는 골을 ‘구레’라고 부르고, 안동김씨 중시조 묘가 있는 곳을 원래 ‘꽃밭’이라 했는데 지금은 ‘웃밭’이라 부르고 있지. 마을 서쪽을 ‘배내’라 부르는데 예전에는 금강물이 이곳까지 들어와서 배가 보였다고 하지.  마을 북쪽 대나무가 있는 골짜기를 ‘방죽골’이라 불렀어.

   봉기리 느티나무
성재 아래 한일레미콘 회사가 있는 곳을 ‘사장터’라고 부르고 있어. 이는 6․25사변 때 여울을 건너 온 군인들이 이곳에서 치열하게 격전을 벌여 많은 사상자가 발생하자 그때부터 이곳을 ‘사장터’라 부르고 있어. 마을 북쪽 성재 밑을 ‘독골’이라 부르고 독골 옆을 ‘숫막재’라 부르고 날등이 꼬부랑 꼬부랑 하다 하여 ‘꼬부랑재’라 부르는 곳이 있어.

마을 북쪽에 있는 산을 ‘성재’라 부르는데 여기에는 돌로 쌓은 성이 있다고 하는데 나는 아직 확인을 하지 못하였어. 마을 남쪽의 산은 ‘시루봉’이라 부르고 고개를 ‘누렁재’라 부르지. 그 외 ‘굴바위’, ‘선바위’, ‘선돌’, ‘분홍고개’ 등 여러 가지의 이름이 붙은 지명이 전해지고 있지.

     
임영수, 연기 출생, 연기 향토박물관장,국립민속박물관 전통놀이 지도강사, 국사편찬위원회 조사위원, 이메일: ghmuseum@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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