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성을 위한 나라는 없다”
“여성을 위한 나라는 없다”
  • 김선미
  • 승인 2018.08.27 07: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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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선미칼럼] ‘사적 복수’ 부추기는 느슨한 성폭력 처벌

후폭풍 거센 안 전 지사 무죄 판결, 미비한 법 개정에 한 목소리

   김선미 편집위원

'여성에게 국가는 없다 - 못 살겠다 박살내자’

개명 천지에 이 무슨 과격한 구호인가. 안희정 전 충남지사의 성폭력 사건 무죄 판결의 후폭풍이 거세다.

성폭력범에 대한 법의 심판이 피해자를 보호하기 보다는 가해자의 입장을 보다 더 적극적으로 헤아리는 듯한 사법부에 대한 규탄이 한 두 번이 아니지만 성폭행 판결을 놓고 이번처럼 사회적 파장이 거센 것도 드문 일이다.

안 전 지사 재판부는 무죄 판단의 근거로 ‘피해자다움’과 피해자의 진술 불일치를 들었다. 도지사와 수행비서 사이의 위계와 위력은 인정하지만 이른바 ‘노 민스 노 룰(No means no rule)’ ‘예스 민스 예스 룰(Yes means yes rule)이 입법화되지 않은 현행 우리 법체계 하에서는 안 전 지사의 행위를 처벌하기 어렵다"고 판결 이유를 밝혔다. 법이 미비해서 어쩔 수 없다는 것이다.

<립스틱> <피고인> 재판이 왜 ‘2차 강간’이라고 불리는지 보여줘

미온적인 성폭력범 처벌이 사회적 파장을 일으킬 때마다 오래전 상영됐던 두 편의 영화를 자동반사적으로 떠올리게 된다. <립스틱>과 <피고인>.

어니스트 헤밍웨이의 두 손녀, 마고 헤밍웨이와 마리엘 헤밍웨이 자매가 출연해 화제가 됐던 <립스틱>. CF 모델인 크리스는 자신을 강간한 남자가 무죄로 풀려난 후 동생까지 강간하자 법정에 가는 대신 범인에게 총탄세례를 퍼붓는다. 법에 의한 단죄가 사라진 자리를 대신한 ‘사적 복수’다.

피해자이면서도 피해 사실이 밖으로 알려질까 봐 전전긍긍 하던 시절에 본 이 영화의 끔찍한 장면은 따로 있었다. 가해자 측 변호사는 손발이 묶인 상태였던 피해자에게 ‘오르가슴’ 운운하며 몰아치고, 판사는 이에 덧붙여 법의 이름으로 피해자를 후벼 파는 질문을 던지는 재판정은 포르노 중계장을 방불케 했다.

성폭력 재판이 왜 ‘2차 강간’이라고 하는지, 정작 보호를 받아야 할 피해 여성에게 어떻게 그렇게 잔인할 수 있는지를 적나라하게 보여준 법정 장면은 충격 그 자체였다. 오죽하면 내가 피해자가 된다 해도 ‘사적 복수’를 택할지언정 사건을 법정으로 끌고 가지는 말아야겠다는 생각을 하게 했을까.

자신에 이어 동생까지 성폭행한 범인에게 총탄 세례로 응징

조디 포스터 주연의 <피고인 (The Accused)>. 남자친구와 다투고 술집에 간 사라는 한 무리의 남자들 앞에서 유혹적인 눈빛과 헤픈 웃음을 날리며 춤을 춘다. 여자는 한 눈에도 그다지 정숙해 보이지는 않는다. 흥분한 남자들이 그녀를 강제로 당구대에 눕히고 집단 강간한다.

당구대 주위로 몰려든 남자들은 스포츠 경기를 구경하듯 환호하고 박수치며 응원한다. 말리는 사람은 없다. 이어지는 재판. 사라의 행실이 문제될 듯하자 처음에는 변호사와 합의하려고 했던 여성 검사는 사라의 반발에 끝까지 재판을 진행, 끝내 무리 중 3명을 강간죄로 3명을 강간을 유도한 교사죄로 기소한다.

영화는 1983년 미국 메사추세츠 뉴 베드포드의 한 술집에서 15명의 남자가 21세 여성을 집단 성폭행한 실화를 바탕으로 만들었다. 실제가 영화보다 더 참혹했다고 한다. <피고인>은 성폭력 범죄를 다룬 영화 중에서도 백미로 꼽힌다. 집단 성폭행을 당한 여성의 재판과정을 통해 여성인권, 특히 하류층 여성에 차별적인 계급차별에 주목하고, 남성 본위의 왜곡된 성인식 등등의 문제점을 끄집어냈다.

사라는 지옥 같은 상황에서도 시종일관 “No!” “Stop!”을 외쳤다. 약과 술에 취하고 야한 옷차림에 선정적인 춤을 추기는 했으나 정숙하지 못한 여성은 당해도 싸다는 왜곡된 인식을 뚫고 윤간범들을 법정에 세울 수 있었던 근거다.

‘헤픈’ 여성 낙인 뚫고 집단 성폭행범 처벌케 한 “No!” “Stop!”

성범죄에 관대한 것은 우리나라만은 아닌 것 같다. 안희정 전 지사 건이 우리사회를 흔들고 있는 가운데 최근 보도된 스페인 발 기사 하나가 눈길을 끈다. 스페인을 발칵 흔들어 놓았던 성폭행 사건의 범인들이 공공 수영장을 찾았다가 이들을 알아본 다른 수영객들의 항의로 쫓겨났다는 것이다.

전직 경찰과 군인 등이 포함된 문제의 20대 남성들은 2016년 7월 소몰이 축제로 유명한 스페인 북부 도시 팜플로나의 축제 기간에 10대 여성을 집단 성폭행 했음에도 비교적 가벼운 처벌을 받은 데다 그나마 2개월 후에 가석방돼 스페인 국민들의 공분을 샀다. 범인 5명 중 일부가 수영장에 있었던 것이다.

스페인 법원 역시 폭력을 쓰거나 협박을 하지 않았다는 이유로 ‘집단 성폭행’ 대신 죄가 가벼운 '성적 학대'를 적용했다. 피해자가 눈을 감은 채 적극적으로 대항하지 않았다는 게 법원의 판단이었다고 한다. 다른 나라 이야기라고 하기에는 기시감이 들지 않는가.

스페인, 재판부는 솜방이 처벌 시민들은 수영장에서 범인 쫓아내

안희정 판결을 계기로 "성폭력 처벌강화 법안을 조속히 처리해야 한다.”는 목소리가 높아지고 있다. 입법 미비로 항소심에서도 또 다시 같은 판결이 나오게 될지 말지는 이제 전적으로 국회 손에 달렸다.

‘노 민스 노 룰’은 특정인을 처벌하기 위한 법이 아니라 성폭력의 지옥에서 살아남은 모든 생존자를 위한 최소한의 장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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