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속인은 있고 교회는 없는 마을
무속인은 있고 교회는 없는 마을
  • 임영수
  • 승인 2012.12.21 16:54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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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영수의 세종을 만나다]고인돌이 만든 동네 '석교리'

   석교리 암자 돌탑
석교리는 백제때에 웅진의 소비포현(所比浦縣)에 속했으며 고려때에는 공주에 속해있다가 조선말엽에는 공주군 명탄면 지역이었다. 1914년 행정구역 개편 때 연기군 금남면에 편입하여 석교리라 불렀다. 마을 앞 개울에 돌로 된 다리가 있어서 붙여졌다고도 하고 이곳 마을에는 고인돌이 있어 고인돌은 커다란 돌에 다리를 만든 것처럼 되어 있어 돌에 다리가 달렸다고 하여 돌다리라 부른다고 한다. 돌다리를 한자로 표현한 것이 석교리(石橋里)이다.

재영 : 지난번에 괴화산 이야기 하실 때 석교리가 돌다리라고 불렸다고 하셨지요?

아빠 : 그래. 이곳을 돌다리라고 불렀는데 사람들은 돌다리가 마을 앞으로 흐르는 개울에 돌로 다리를 놓았기 때문에 붙여진 이름으로 알고 있거든. 그런데 그 보다 더 중요한 유래는 돌다리가 고인돌의 또 다른 표현 방법이라는데 주목해야해. 커다란 덮개돌에 마치 다리를 달아 놓은 것처럼 작은 돌로 받쳐 놓는 것이 바로 고인돌이거든.

재영 : 이곳 마을에 고인돌이 있나요?

아빠 : 석교리에 조사된 고인돌은 완연한 것 2기가 있는데 아마 정밀조사하면 더욱 많을 거야.
우선 고인돌이 무엇인가부터 이야기 해줄까?

   석교리 고인돌
재영 : 예. 고인돌이 옛사람들의 무덤이라는 것은 알고 있는데 더 자세히는 모르고 있거든요.

아빠 : 고인돌을 한자로 쓰면 지석묘(支石墓)라고 하는데 청동검과 지석묘는 청동기(靑銅器)시대의 대표적인 유물이라 해도 과언이 아닐 거야. 우리나라 청동검은 비파형(琵琶形)이라하여 비파라는 악기를 닮았지. 이는 위아래가 곡선으로 불룩 나왔다 들어간 형태인데 중국의 동검은 길게 쭉 빠져서 세형동검이라 부르지. 우리나라 비파형 동검이 옛고구려 영토에서까지 발견되고 있으니 넓은 곳까지 퍼진 거야.

고인돌은 전세계에서 가장 많은 나라가 바로 우리나라야. 전세계 발견 고인돌 중 절반이 우리나라에서 발견되었으니 우리나라를 ‘고인돌의 나라’ 라고도 부르지. 그래서 전남 화순과 고창, 경기도 강화 같은 곳의 고인돌은 세계문화유산으로 등재될 정도이니 우리나의 고인돌 문화는 대단하다고 할 수 있지.

고인돌은 북쪽지방의 것과 남쪽지방의 것이 조금 다른데 고인돌의 형태와 크기가 다르지.  북쪽 지방의 고인돌은 탁자식 고인돌이라 부르는데, 두개의 받침돌을 커다랗게 세우고 그 위에 덮개돌을 올려놓아 마치 커다란 탁자처럼 보이기 때문에 이렇게 부르고 남쪽의 고인돌은 받친 돌이 땅속으로 들어가 있어 보이지 않기 때문에 덮개돌만 보이지.

이를 바둑판처럼 생겼다고 표현하는 이들도 있는데 남방식 고인돌이라 부르고 있어. 우리 연기군의 고인돌이 바로 남방식 고인돌에 속하지.  고인돌을 잘 보면 덮개돌 위에 구멍이 나있는 것이 많이 있어. 이를 성혈(星岤)이라 부르는데 성혈자국은 그 당시 사람들이 이곳에서 무엇인가 손으로 돌려가며 하늘의 별에게 비는 의식을 하지 않았을까 하는 추측 때문에 붙여진 이름이야.

   석교리 마을 모습
재영 : 우리 연기군에는 고인돌이 얼마나 있나요?

아빠 : 우리 연기군의 고인돌을 한번 세어볼까.
우선 대전과 경계인 박산에는 대전 경계 부근에서 몇 기의 고인돌이 있었는데 도로공사로 인하여 모두 사라졌어. 다만 한기만 옆의 밭으로 옮겨져 나무 아래에서 쉼터용으로 쓰이고 있고, 봉기리에는 두 곳에 고인돌이 있고, 이곳 석교리가 2기, 장재리에는 3기가 있었는데 현재 2기는 그대로 있지만 1기는 도로공사 중 부득이 이전해야 되기에 당시 공주대 교수였던 안승주 교수님이 공주대학교로 이전하여 그곳에 있고 신촌리에는 금남초등학교 뒷산에 1기가 있고 용포리에는 가동 넘어가는 고개 입구에 1기가 있고, 동면 송용리에는 고개에 있는 것을 길 넓히는 공사를 하다 파괴하여 사라졌고 남면 월산리에는 금강가에 1기가 있으며 전의지역에는 금이산에 고인돌이 1기가 있어 주목을 받고 있지.

재영 : 우리 연기군에도 고인돌이 꽤 많네요.

아빠 : 그것은 우리 연기군 남면, 동면, 금남면으로 금강이 흐르고 있기 때문에 청동기 시대 사람들은 강가에 모여 살았기에 이곳에 집중적으로 고인돌이 많이 있단다.

재영 : 결론적으로는 이곳 마을이 청동기 시대부터 있었다고 해도 되겠네요.

아빠 : 그래. 우리 연기군 아래에는 공주시 석장리가 있단다. 이곳은 구석기 유물이 우리나라에서 처음 발견된 곳이고 위로는 청원군의 비루봉 동굴과 대전의 둔산동에 선사유적지로 보아 이와 가까이 있는 연기군도 청동기 시대 이전부터 사람들이 살았을 것이라는 말을 하지.  이렇게 연기군의 역사는 오래된 것이야.
석교리의 형국에 대한 이야기를 해줄까.  석교리는 400년 전에 전주이씨와 청송심씨가 정착하기 시작했는데 전주이씨는 낮에 들어오고 청송심씨는 저녁에 들어왔다는 말이 있어. 이곳에 터를 먼저 잡은 이가 전주이씨라는 말인데 터를 잡은 이의 부인이 청송심씨라 하여 두 집안은 사돈관계인 것 같아.  석교리에는 없는 것이 하나 있는데 그것이 바로 교회야.

   석교리 중탑
   석교리 하탑
재영 : 어! 그러고 보니 석교리를 아무리 둘러보아도 교회를 보지 못했네요.

아빠 : 요즘 교회 없는 마을이 없는데 유독 이곳에는 교회가 들어서지 못하고 있어. 그 이유는 이곳 마을 뒷산인 괴화산이 오른쪽 날이 길고 왼쪽 날이 짧기 때문에 오른쪽의 좌청룡인 남자가 짧고 왼쪽의 우백호인 여자의 기가 세기 때문에 무속인이 많이 배출되었어. 무속인이 많다보니 자연스레 암자도 많이 생기는데 작은 마을에 암자가 10여개 있다면 그러한 내용을 알 수 있지. 이곳의 암자를 대충 이야기 해 보면 대불사, 태국사, 석불암, 천하정사, 괴화사 등이 있어.

재영 : 괴화산은 마을 뒷산이고 마을 앞산에 관한 이야기는 없나요?

아빠 : 마을 앞산은 말 그대로 앞산이라 부르는데 이 산의 형국이 커다란 돼지가 드러누워 많은 새끼들에게 젖을 먹이는 형국으로 돼지가 젖먹이는 자리를 현재 금석초등학교가 있는 곳이니 재미있지 않니.

재영 : 재미있어요. 마을에 돌탑이 보이는데 그 돌탑에 관한 이야기도 해 주세요.

아빠 : 이곳 마을에는 돌탑이 세 개가 있단다.  마을 위에 있는 것을 상탑이라 하고 정자에 있는 것을 중탑이라 하고, 고인돌 가는 길목에 있는 것을 하탑이라 부르지.  상탑은 네모난 돌 하나이고, 중탑과 하탑은 돌을 모아 둥그렇게 쌓은 것인데 하탑에는 돼지처럼 생긴 돌을 올려놓아 머리는 마을 밖을 향하게 하고 꼬리는 마을을 향하게 하였지. 이는 돼지가 먹이를 배부르게 먹고 이곳에 똥을 누워 거름이 되게 하게끔 하면 마을에 풍년이 든다는 이야기에서 이렇게 한 것이야.

이곳 탑제는 음력 10월 15일 경에 부락민 전체가 나와 정성을 다하여 탑제를 지내는데,1970년대 박정희 대통령 재임시 새마을 사업의 일환으로 미신을 타파한다고 장승과 이러한 탑을 없애면서 탑제를 못 지내게 하였는데 석교리 사람들은 조상대대로 지내온 탑제를 그대로 보존하면서 탑제를 한해도 거르지 않고 지내왔어.

   괴화정
그 이유는 이 탑을 세우게 된 동기가 있는데 아주 먼 옛날 이곳 마을에 홍역 등 전염병이 찾아와 마을사람들이 하나 둘씩 죽어나가자 어떻게 손 쓸 방도가 없어 안타까움에 발만 동동 구르고 있을 때 이곳을 지나가던 스님 한분이 마을의 세군데 탑을 세우고 부락민이 지성으로 탑제를 지내면 부락이 유지된다고 하자 마을사람이 정성을 다하여 탑제를 지내니 돌림병이 사라져 그때부터 지금까지 매년 탑제를 지내오고 있지. 
     
임영수, 연기 출생, 연기 향토박물관장,국립민속박물관 전통놀이 지도강사, 국사편찬위원회 조사위원, 이메일: ghmuseum@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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