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 어 하다 박물관장과 전통놀이 달인 됐다”
“어, 어 하다 박물관장과 전통놀이 달인 됐다”
  • 신도성 기자
  • 승인 2018.04.17 10:4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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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종인] 고향 문화재지킴이로 애국하는 임영수 연기향토박물관장

8년 전 모 중앙지에 게재된 임영수 연기향토박물관장의 기사에 “어, 어, 어 하다 보니 어느새 박물관장이 되었다”는 임 관장의 표현이 나온다. 그로부터 8년 후 세종시 금남면 용포리 출신인 임영수 연기향토박물관장(54)은 큰바위 얼굴이 되어 있었다. 문화재와 전통놀이 부문에 있어서 연기군 시절의 아마추어가 아닌 괄목성장한 전문가로 인정받고 있는 것이다. 그의 열정으로 말미암아 연기향토박물관에는 유실될 뻔한 7천여 점의 문화재가 살아있고, 그는 우리나라 전통놀이 개발 및 교육 보급 전문가로 국내외에 알려진 것이다.

 

임영수 관장은 용포리에서 지금은 고인이 되신 선친 임헌종씨와 모친 장춘자 여사의 5남매(4남 1녀) 중 3남으로 출생하여 금남초등학교와 금호중, 조치원고를 졸업했다. 어려서부터 그림그리기를 좋아했던 임 관장은 고교시절 미술부에서 활동하였고, 조치원읍내에서 열린 졸업전시회에 작품을 출품했는데, 당시 이영자 조치원여고 교장이 전시회에 왔다가 임영수 학생의 그림을 보고 감동하여 인연을 맺게 됐다.

 

임 관장은 고교 3학년 때 집안 가세가 기울면서 대학진학을 못할 형편이었다. 이를 안타깝게 여긴 이영자 조치원여고 교장이 서울에 있는 동양화가 혜촌 김학수 선생에게 소개하여 문하생으로 사사받게 했다. 이후 서울 인사동의 한지지업사에 취업하여 직장생활을 했는데, 이것이 골동품 등 문화재에 대한 안목을 키우는 계기가 되었다.

 

그는 인사동에서 문화재에 대한 공부를 하다가 군에 입대하여 강원도 강릉 해안가에서 3년 간 군복무를 했다. 그런데 군에서 희한한 중대장을 만나 중대 문예지를 만들고, 인근 마을에서 도자기를 굽는데 임 관장으로 하여금 그림을 그리게 하는 등 문화재와 관련된 일을 하면서 재미있게 보냈다.

 

제대 후에 임영수 관장은 귀향하여 조치원읍사무소 앞에서 생계를 위해 카페를 차렸다. 야간에 대학생들을 상대로 차를 팔다보니 낮에 시간이 많아 카페가 한가할 때면 이곳저곳 그림을 그리러 다녔다. 하루는 버스를 잘못 타고 엉뚱한 곳에 내려 그림을 그리려고 화구를 펼치다 땅에 켜켜이 쌓여있는 사기 조각을 보았다. 분청사기 가마터였다. 당시 연기군 전동면 송성리 일명 점고개(그릇을 굽는 곳)로 알려진 동네였다. 그날 분청사기 조각을 수없이 주어 연기군청에 정식 신고했더니, 담당 직원이 “이런 깨진 쇠금파리는 아무 소용없다”고 무시했다.

 

임 관장은 오기가 생겨 그걸 들고서 다시 연기문화원에 갔더니 이기봉 문화원장(후에 연기군수)이 “이런 것을 들고 온 것은 당신이 처음이다”며 “지역의 분청사기 가마터에 대해 연구해보라“는 권유를 받고 문화원 자료를 보고 40여 곳의 가마터를 찾아냈다.

 

소중한 지역 문화재 외지로 마구 반출되어가는 현실 외면할 수 없어

 

이기봉 문화원장이 분청사기가마터 공개 전시회를 열어줘 처음 오픈하는 날 형사들이 임영수씨를 잡으러 왔다. 도굴꾼으로 신고가 된 것이다. 형사들은 전시장에서 임영수씨의 설명을 듣고 오해를 풀고 돌아갔다. 이후 임영수씨는 군 문화원 사무국장 일을 맡게 되었다. 문제는 문화원 일을 하다 보니 연기군의 소중한 문화재가 수없이 외부로 반출되는 것으로 마음이 쓰라렸다. 골동품상인들은 집집마다 다니며 촌로들의 손에 몇 푼 쥐어 주고 대대로 내려온 물건들을 싸그리 가져갔다.

 

그는 “문화재를 잃는 것은 지역의 정체성을 잃는 것과 같다”고 생각해 문화재 지키기 운동에 나섰다. 틈만 나면 오토바이를 몰고 마을을 돌아다니며 마을의 유래와 역사를 조사하면서 촌로들을 만나면 막걸리를 대접하며 이야기를 나눴다. 촌로들은 토기든, 자기든, 족보든 집에 있던 묵고 묵은 것들을 문화원으로 가지고 왔다. 그가 지금도 아끼는 조선시대 목조 불상도 그렇게 얻은 것이다.

 

언젠가는 어느 아주머니가 족보를 꺼내 불태우려고 하길래 이유를 물었더니 ‘쥐가 갉아 먹은 데다가 자식들이 한자를 모르니 태운다’고 하여 족보를 얻어오기도 했다. 어느 해인가 비 오는 날에 잘 아는 포클레인 기사에게 전화가 왔다. 묘 이장 일을 하러 갔는데 묘 앞에서 글씨가 쓰여진 흙벽돌이 잔뜩 나왔다는 것이다. 달려가 보니 숯물로 글씨를 쓴 흙벽돌 지석이 수십 개 나뒹굴고 있어 상주가 집에 보관하기도 힘들어 트럭에 싣고 왔다.

 

또한 친일인사 집안의 묘에서 도자기 지석이 발견됐다. 그 집안에서 독립기념관에 기증하려고 했지만 친일인사 집안이라고 받아주지 않았다는 소식을 들은 임영수 관장이 부랴부랴 찾아가 가져왔다. 연기향토박물관 앞마당에 있는 ‘황국신민의 서사’ 비도 오래된 초등학교 공사현장에 있던 포클레인 기사의 연락을 받고 가져왔다. 노비 출신으로 열녀에 봉해진 ‘일개(一介)’의 비석과 이런저런 인물들의 공덕비도 도로공사 현장에서 얻은 것이다.

 

문화원 사무국장 시절 그렇게 해서 모은 유물이 500여 점이나 되어 문화원 마당에 수북이 쌓인 옛 물건들을 보며, 군 박물관이 있어야 한다고 생각해 당시 서영석 연기군수에게 건의했다. 1991년 서영석 군수는 폐교에 연기군박물관을 건립하기로 하고 예산안을 올렸으나 연기군의회에서 예산이 삭감되는 바람에 무산되었다.

 

순식간에 문화원 마당에 쌓인 유물들은 천덕꾸러기 신세로 변했고, 문화원측은 “마당이 지저분하니 물건들을 치워 달라”고 요구했다. 임영수씨는 할 수 없이 조치원읍내의 자신의 셋방으로 실어 날랐다. 그러나 같은 이유로 셋방에서 4번이나 쫓겨나 이사를 다녔다.

 

임영수씨는 주민들이 모아 준 옛 물건을 버릴 수는 없어 고민하다가 수소문 끝에 지금의 박물관 자리인 연서면 청라리 시골 농가를 찾아냈고 이곳에 사설 박물관을 만들기로 했다. 백제시대 고찰인 비암사 가는 길목의 분청사기 가마터가 있는 동네인데다가 금상첨화의 위치로 인연이 된 것이다. 지원 하나 없는 사설 박물관 건립에 요구조건은 턱없이 많았지만 일단 집을 개조해 전시실, 사무실, 수장고 등을 만들어 어렵사리 1996년 연기향토박물관 등록을 마쳤다.

 

연기향토박물관에는 세종시에서 출토된 선사, 산국, 고려, 조선시대의 유물과 일제강점기, 근대의 유물이 전시되어 있다. 불상, 무기, 오층석탑, 토기, 청자, 분청사기, 청동, 백자, 기와, 그림(민화), 목판, 고서, 소방기구, 가구, 농사관련 각종 가구, 나무로 만든 쥐덫 등 7천여 점의 유물이 있다. 연기향토박물관은 연구실 겸 학예관과 3개의 전시실이 있다. 제1전시실에는 고고, 민속자료가 전시되어 있고, 제2전시실에는 민속자료 및 전통놀이 기구가 전시되어 있다. 제3전시실에는 전통놀이연구소와 고 강주현 선생 기념관이 있다.

 

우리 교과서 204개 놀이 중 90%가 일제에 의해 강제로 보급 치욕의 역사

 

임 관장은 특히 박물관을 운영하며 자신이 좋아하는 전통놀이 보급에 역점을 두고 있다. 그의 명함엔 연기향토박물관장과 부설 우리전통놀이연구소장, 두 직함이 새겨져 있다. 그는 일제에 의해 강제로 전래된 우리전통놀이 복원에 더욱 신경을 쓰고 있다. 그는 “우리 전통놀이를 연구하다보니 우리나라 유치원과 초등학교, 중학교에 나오는 204개의 놀이 중에 90%가 일제에 의해 식민지 정당성을 강요한 일본제라는 사실이 부끄럽다”고 토로한다.

임 관장은 승경도 놀이 등 양반놀이 10가지를 체계적으로 정리하는 한편 4월 8일에는 고려시대부터 불가에서 내려오다 조선시대 서산대사가 대중들에게 불교를 쉽게 전하기 위해 보급한 성불도놀이를 마당놀이 형태로 새롭게 만들어 공주 한옥마을 내 선화당에서 놀이연구가들이 동참한 가운데 마당놀이 형태의 성불도놀이 첫 발표회를 가졌다. 이미 수십 권의 문화재 소개와 놀이 관련 책자를 발행한 임 관장은 2012년에 ‘전통놀이의 뿌리를 찾아서’라는 책을 펴낸데 이어 올 5월에 국내에서 처음으로 성불도 마당놀이에 관련된 책을 출판할 예정이다.

 

연기향토박물관 부설 우리전통놀이연구소에서는 민간자격증으로 ‘전통놀이 전문강사’를 배출해내어 현재 전국적으로 600여 명이 활동하고 있다. 45시간을 이수하여 시험을 치러 1, 2, 3급자격증을 주어 우리 전통놀이의 올바른 보급에 나서고 있다.

 

또한 올해도 정부 지원으로 ‘박물관, 길위의 인문학’ 프로를 운영하고 있는 연기향토박물관은 5월부터 11월까지 2000여 명의 초, 중등 학생들을 상대로 전통놀이를 보급한다.

 

연기향토박물관은 설과 추석을 제외하고 연중무휴로 오전 9시부터 오후 6시(동절기 오후 5시)까지 관람객을 받고 있다. 한지공예, 솟대 만들기, 전통차 및 전통 양반놀이 등 체험프로그램도 운영하고 있다.

 

앞으로의 계획을 묻자, 임영수 관장은 “교과서에 실려 있는 대다수의 일본제 놀이를 우리나라 놀이로 바꾸는 일에 몰두하고 싶습니다. 무엇보다 연기향토박물관이라는 이름을 고수하여 지역의 소중한 가치를 향유하고, 올바른 전통놀이 보급과 과거 지역의 역사를 정확히 알려주는 일에 정성을 기울이겠습니다.”라고 결의를 다졌다.

 

“나는 진실이라는 말을 가장 좋아합니다. 사람들이 자기 내면의 진실을 잘 안 밝히려고 하는 것이 역사 왜곡의 시작입니다. 왜곡된 문화를 바로 잡아서 문화 속에 숨어 있는 진실을 제대로 알려주는 일이 어느새 나의 사명처럼 되어버렸습니다.”

 

1996년 연기향토박물관이 생길 때, 연기군이 언젠가 행정복합도시로 바뀌면 그곳에 들어설 박물관에 소장품을 모두 기증하고 자신은 전통놀이 보급에 매진할 생각이라고 했지만, 시절인연이 안 와서 그런지, 임영수 관장은 여전히 사설 연기향토박물관장을 맡아 문화재 지킴이와 우리전통놀이 보급에 지치거나 싫어함이 없이(無有疲厭) 즐겁게 전념하고 있었다. 소중한 문화재와 전통놀이가 사라질뻔한 것을 지켜내고 있는 임영수 관장이야말로 나라사랑이 아쉬운 이 시대에서 본받을만한 애국자이다. 

 

◇연기향토박물관 가는 길

 

천안-논산고속도로 정안IC로 나와 고복저수지로 가다보면 연서면 청라리가 나온다. 비암사 가기 전 4㎞ 좌측 동네에 있다. 조치원시외버스터미널, 조치원역에서 청라리행 710번 버스 타고 쌍류보건진료소에서 하차하여 비암사 방향으로 5분 정도 걸으면 연기향토박물관 이정표가 보인다. 세종특별자치시 연서면 양대길 34-4번지 (044)862-744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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