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수 베 뜰에 논이 있느냐"
"여수 베 뜰에 논이 있느냐"
  • 임영수
  • 승인 2012.12.06 12:5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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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영수의 세종을 만나다]김해 김씨 정려문이 있는 반곡리

   김해 김씨 정려지문 비각 앞에서 딸 재영이가 내부를 살펴보고 있다.
반곡리는 백제시대에는 웅진의 소비포현(所比浦縣)에 속하였고 고려 때부터 공주에 속했으며 조선말엽에는 공주군 명탄면의 지역으로서 지형이 소반과 같으므로 반곡(盤谷)이라 불렀는데, 1914년 행정구역 개편 때 반곡리라 하여 연기군 금남면에 편입되었다.

재영 : 반곡리에 아빠는 언제 온 것이 처음이에요?

아빠 : 중학교 다닐 때이니 1978년도이지. 이곳 마을에 사는 친구 집에 오려고 고개를 넘어 오다보니 돌부처가 밭 근처에 있었어. 친구말로는 처음에는 몸이 있는 온전한 돌부처였는데 머리가 부러져 버리자 밭주인이 그것을 자기 밭에다 묻었단다. 그 당시 돌부처의 머리를 밭에다 묻으면 좋은 일이 일어난다는 이야기가 있어 그리 한 것이지.

재영 : 지금도 그 돌부처가 그곳에 있나요?

아빠 : 아니야. 지금은 그 돌부처가 국립공주박물관 야외에 전시되어 있어.

   반곡리 마을 표지석

그것이 아빠 때문인데 들어보겠니?

재영 : 예. 궁금해요.

아빠 : 1985년도 일 거야. 아빠가 서울에서 직장생활 할 때 어느 날 뉴스에서 우리나라 돌부처가 수난을 당한다는 내용이 보도되었어. 나는 그것을 보고 문득 반곡리 돌부처가 생각났지. 그래서 공주박물관장에게 편지를 썼어. 반곡리 부처골에 가면 목 없는 돌부처가 있다고 쓰고 약도까지 자세히 그려 넣었지. 그리하여 이곳에 있던 돌부처가 지금은 국립공주박물관에 전시되게 된 것이야. 예전에 이곳 마을 입구에도 장승이 세워져 있었단다. 그런데 어느 해부터 장승을 세우지 않아 지금은 사라졌는데 이곳을 장승백이라 부르지.

재영 : 이곳 넓은 들판에 관한 이야기는 없나요?

아빠 : 재미있는 이야기가 있지. 마을 앞으로 금강이 흘러서 그런지 이곳에는 농사가 아주 잘되는 곳이야. 반곡리에서 혼인을 하려면 중매인을 통하여 여수베 뜰에 논이 있느냐? 큰개에 밭이 있느냐고 물어서 여수베에 논이 있다면 혼인조건이 적격이라 여기고 혼인승락을 했다는 말이 전하지. 여수베란 농사짓기 알맞은 걸은 논을 지칭하는데 이곳 마을은 장승배기 옆 강가에 있는 논을 지칭하지. 큰개란 큰 개울가인 뜻이어서 이곳의 밭이 최고로 좋은 곳이란 뜻이지.

재영 : 여수베와 큰개에 논과 밭이 있으면 부자란 뜻이네요.

아빠 : 그런 뜻이지. 마을에서 동쪽산을 납작동이라 부르는데 이곳에서 석교리로 넘어가는 길목을 여우봉이라 하는데 여우봉을 넘으면 큰 바위가 있고 그 바위에 장군 발자국이 두개가 있어. 이곳이 넓고 평평하기에 벼를 널면 몇 가마 널 수 있도록 되어 있어. 옛날에 한 장군이 바위 위에서 힘을 주니 두발이 푹 들어가 자국이 남았다는 말이 있어.

   반곡리 마을 전경

재영 : 그래서 그 바위를 장군바위라 부른다는 이야기이지요.
이 마을에는 예양진씨들이 많이 사는데 언제 이곳에 와서 살기 시작했나요?

아빠 : 예양진씨는 이괄의 난을 피하여 처음에는 남면 양화리에 터를 잡고 살려다 그곳에 살고 있는 부안임씨들이 오랜 세월 살아오기에 타성들이 정착할 수 없어서 강 건너 이곳을 선택하게 되었지. 어느 날 적군이 이곳까지 와서 황급하게 피한다는 것이 부엌의 고래구멍으로 들어갔대. 그런데 적군이 부엌으로 들어와 고래구멍을 바라보더니 이상하게 생각하며 긴 칼로 고래구멍을 푹푹 찌르는 것이었어. 그러자 진씨 오른쪽 팔뚝에 칼이 스치면서 피가 칼에 묻었어. 그때 같이 피신했던 부인 남양홍씨가 얼른 치마를 칼에 대고 닦아 내었지. 그래서 화를 면했다고 해.

재영 : 또 마을에서 있었던 이야기를 해주세요.

아빠 : 도깨비 이야기를 해줄까. 1924년경 김상복씨가 금남 용포장터에서 술을 많이 마시고 마을에 들어서는데 도깨비 굴멍에서 도깨비를 만났어. 도깨비는 김상복씨에게 갑자기 달려들어 씨름을 하자며 말뚝이 박힌 곳으로 끌고 가더니 엉덩방아를 찧게 하는 것이었어. 김상복씨는 정신을 바짝 차리고 도깨비를 뿌리치고 간신히 탈출하였으나 그 후 시름시름 앓다가 얼마 후에 돌아가셨어.

재영 : 도깨비와 씨름을 해서 지면 화를 당하는가 봐요?

아빠 : 종종 도깨비와 씨름을 하였다는 이야기가 많이 전해지고 있지. 씨름을 해서 이긴 사람도 있는데 그 도깨비를 나무에 꽁꽁 묶어 놓고 다음날 가보니 피 묻은 빗자루가 묶여 있었다는 이야기도 있지.  괴화산에 대한 전설 한 토막 들려줄까?

재영 : 예. 들려주세요.

아빠 : 괴화산은 옛날부터 명당자리로 손꼽히는 곳이지. 여기에 내려오는 이야기가 있는데 옛날 백제때 불행하게도 나․당연합군에게 나라를 빼앗긴 백제의 유민 한 사람이 몸종에게 무거운 짐을 들려 금강 기슭을 올라가고 있었어. 실은 웅진(공주) 기슭에 자리를 잡을까 하였으나 자기가 사비성에 살 때 서라벌에 아는 장사꾼이 많았기 때문에 살기 위해서는 더욱 산속으로 들어가야겠다고 생각하고 길을 재촉하는 것이지.

 

그까짓 있는 재산을 신라에 바치면 그만이었지만 자기가 살던 백제가 망하고 나니 그럴 수가 없어서 산속으로 숨어 들어가는 것이었어. 그는 마침내 한 산을 발견하고 그 아래 짐을 푼 다음 산에서 나무를 잘라다가 움막을 짓고 그리고 짐은 땅속에 파묻은 다음 몸종을 곰나루에 한번 보내봤지. 그는 사비성에서도 이름 난 부자였으므로 혹시나 자기에게 해로움이 돌아오지 않을까 하고 몸종을 곰나루에 보낸 것이지. 몸종을 보내 놓고 그는 나머지 종들을 불러 모아 놓고는 큰 금 한덩이씩을 나누어 주면서 이제까지 고생했으니 지금부터 자유의 몸이 되어 잘 살라 하였어.

그러자 종들은 좋아서 모두 입이 함박만 해 졌다가 얼굴이 갑자기 어두워지더니 한 종이 금덩이를 땅에 놓으면서 “사람이 재복을 탐내면 도적이 되기 쉽고 돈은 땀 흘려 벌어야 된다.”고 말하였지. 그러자 다른 종들도 주인과 같이 살겠다며 모두 금덩이를 주인 앞에 갖다 놓는 것이었어. 그렇지 않아도 된다며 주인은 다시 그들을 타일렀지만 그들은 땀을 흘리며 번 금덩이가 아니라고 모두 우기는 것이었어. 그때 때마침 곰나루에 갔던 그의 몸종이 헐레벌떡 들어와서는 주인을 잡으려고 현상금이 걸려 있다는 말을 전하였지. 이 말을 듣고 주인은 기가 막히었어. 자기가 죄가 있다면 돈을 모은 죄밖에 없는데 현상금까지 걸려있다니 기가 막힌 것이지.

그때 한 종이 고개를 번쩍 들더니 이제부터 자기들이 주인을 보호할 테니 여기에서 같이 숨어 살자고 말을 하자 말이 떨어지기 무섭게 종들은 각자 뿔뿔이 흩어져 가더니 모두 집을 짓기 시작했어. 그들이 집을 짓고 땅을 개간하는데 나․당연합군의 군사들이 말을 타고 몇 번이고 찾아와 그들의 주인 같은 인상을 가진 사람을 못 봤냐고 물어 봤지만 아무 소용이 없었어. 주인도 농부로 가장해서 그들과 함께 일을 했으니 돈이 없으면 금괴를 한쪽 잘라 사비성에 가서 팔아 보탬을 했지. 주인은 종들이 농부로서 자기를 지키며 열심히 일을 하는 것을 보고 그들을 마음껏 도와줬어. 그래서 그들은 늙어선 부자가 되어 땅을 가지고 살았지.

어느새 주인은 늙어 명대로 살다가 죽었어. 종들은 주인의 장례를 크게 지냈어. 그리고 장례날 한 몸종이 “주인의 재산은 주인의 너그러운 마음씨대로 곱게 쓰여야 하는데 내가 보기에 이제는 우리들에게 금괴가 더 이상 필요 없는 것 같다며 아주 주인 산소 곁에 묻어 버렸어. 또한 종들도 죽을 때까지 자식들에게 금괴이야기를 한 사람도 입 밖에 내지 않았어. 그런데 주인의 금괴가 이 산에 묻히자 신기하게도 이 산은 밤에도 빛을 낸다고 했어. 그래서 후세 사람들은 밤에도 환하게 보인다는 뜻으로 ”괴화산“이라고 불렀지.

재영 : 아주 훌륭한 주인에 훌륭한 하인들 같아요.  마을 입구에 있는 정려에 대하여 설명해주세요.

   김해 김씨 정려비

아빠 : 어린나이에 시집와서 온갖 고생을 다한 열부 김해김씨(金海金氏)에 대한 정문이지. 김해김씨는 1917년 열여섯살의 어린나이에 금남면 반곡리 예양진씨 가문으로 출가하여 시부모님과 여러 가족들을 거느리고 빨래며 조석바라지며 빈궁한 가정을 꾸려 나갔어.

그러는 동안 세월이 가니 아이를 갖게 되었고 그 당시 어른들은 며느리가 아이를 가지면 대를 잇게 되었다며 좋아하였지. 희망을 갖고 밤이면 호롱불에 둘러앉아 이야기꽃을 피워가며 즐거운 생활을 하며 살고 있었지. 아침이슬 저녁노을에 흙냄새 보리내음에 피로도 잊고 그날의 바쁜 손을 놀려가며 어떻게든지 가난을 벗어나서 잘살아 보겠다고 일을 아니하면 죽는 줄만 알았던 두 내외에겐 그날의 피로도 못 느끼며 살아갔어. 그러던 어느 날 남편 진회현(陳會顯)씨가 가까운 부강장에 솥을 사러 갔다가 집에 돌아오지 못하고 영원한 저 세상 사람이 되어 횡사를 하게 되니 부인은 열여덟살의 청상과부가 되었어.

이 마을에 사는 진씨문중의 진영하씨와 같이 있는 김동익씨의 말에 의하면 진회현씨가 장을 보고 막 집에 돌아올 무렵 독립만세의 함성이 퍼져 나와 평소 나라를 잃은 슬픔과 일제의 만행에 격분했던 진회현씨도 군중들 틈에 끼어 함께 만세를 외치고 다니다가 일본경찰과 헌병의 총칼에 쫓기어 진회현씨도 함께 도망 다니다가 스스로 몸을 강물에 던졌다고 했어.

강물에 몸을 던져 세상을 떠난 남편의 시체를 찾으려고 애썼으나 끝내 찾지 못하고 나무로 신주를 깎아 장례를 치루고 난 김해김씨는 그 날부터 고생은 더욱 심해졌지. 농토가 없는 가세에 남편마저 잃은 그는 시부모님을 모시고 가장의 노릇까지 해야 했지. 그러나 시부모마저 세상을 떠나자 유복자를 데리고 이집 저집 이일저일 찾아 하루하루 살아갔어.

김매기, 바느질, 짐나르기 등 배를 움켜쥐고 품삯으로 밭곡식을 모으고 모아서 몇 평 안되는 땅이지만 농토를 가지게 되었어. 김씨는 남편이 세상을 떠난 뒤 수십년 후에 연약한 여자의 힘으로 마련한 농토에 곡식을 심어 가꾸어 살림을 늘리었지. 당시 여자의 힘으로 가문을 일으켰다 하여 마을사람들의 칭찬이 대단하였어. 김해김씨의 열행이 후세에 전해지자 우리 어머니의 본보기라 일컫고 동민들의 정성을 한데모아 동구 밖에 조촐한 열행비를 건립하고 해마다 그분의 훌륭했던 행적을 추모해왔지. 연약한 여인이 마음먹기에 따라 가문이 일어나고 쓰러져 감을 느끼게 하는 것이지.

     
임영수, 연기 출생, 연기 향토박물관장,국립민속박물관 전통놀이 지도강사, 국사편찬위원회 조사위원, 이메일: ghmuseum@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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