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생님, 글씨 한점 써주십시요"
"선생님, 글씨 한점 써주십시요"
  • 임효림
  • 승인 2017.12.18 18:24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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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효림칼럼]붓 천자루 다달아먹게 글씨도 쓰지 못했고...

ㅡ도인의 도필ㅡ

김교수가 운전하는 차를 타고 강원도 이름도 생소한 어느 산 골짝기로 돌아 돌아 들어갔습니다. 계곡이 끝나는 곳에 차를 멈추고 다시 30여분 걸어서 올라가니 너와집 하나가 나왔습니다. 흡사 빈집같이 고요한데요. 김교수가 "장선생님 계십니까?" 하니 방문이 열리며 머리와 수염이 눈처럼 하얀 노인이 나왔습니다.

서로 인사를 나누고 보니 내 눈에 장선생은 그냥 한점 티끌도 없는 맑은 분이었습니다. 방 한쪽에는 큰 책상이 놓여 있고, 그 옆에는 큰 벼루와 대붓이 먹물에 젖은 체로 놓여 있는데, 글씨를 하도 많이 연습해 까매진 종이! 수북하게 쌓여 있었습니다. 나는 단번에 아! 열심히 글씨 연습을 하시는 구나 하고 알아 보았습니다. 이에 거두절미하고,

"선생님 글씨한점 주십시오!"

그러자 어린 애기처럼 웃음을 지으며 말씀하셨습니다.

"하하하ㅡ 아직 연습이 끝나지 않았니더 ㅡ"

"............."

"하하하 ㅡ 어디 헛소문을 들어신 모양인니더, 나는 여기 이 산중에 들어와 일생을 글씨 연습만 하고 살았니더. 주로 버릴 기(棄)자를 많이 썼니더. 맘에 있는 모든 것을 버린다는 뜻이니더. 하지만 아직도 버릴 것이 많으니 글씨 연습도 아직 끝나지를 않았니더. 우리 스승께서는! 내가 글씨를 쓴다고 하니. 붓 천자루가 달아 없어질 때까정 쓰고서야 글씨라고 하는 것을 내 놓아 보그라. 하셨니더."

".........."

"아직 붓 천자루를 다 달아먹게 글씨를 쓰지도 못했고, 마음에 버릴 것을 다 버리지도 못했으니. 무슨 글씨를 내 놓을 형편이 아이니더"

빈 손으로 산길을 내려오는데 김교수가 말했습니다.

"등산하다 길을 잘 못들어 저 곳에 들려 알게 되었지요.저분이 저정도로 내공이 깊은 분인줄은 나도 미쳐 몰랐습니다. 그나 저나 스님 덕에 글씨나 한점 얻으려고 모시고 왔는데, 그냥 빈손으로 가네요." <효림스님은 불교계에 대표적인 진보성향의 스님으로 불교신문 사장, 조계종 중앙 종회의원, 실천불교 전국 승가회 공동의장을 거쳤다. 2011년 세종시 전동면 청람리로 내려와 경원사 주지를 맡고 있다. 세종시에서는 참여자치시민연대 공동의장을 역임하는 등 시민운동 참가를 통해 진보의 목소리를 대변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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