개가 아니라 ‘막무가내’가 싫다
개가 아니라 ‘막무가내’가 싫다
  • 김선미
  • 승인 2017.11.14 15: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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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선미칼럼]“우리 개는 안 물어요”와 기시감 갖게 하는 어느 출국장의 풍경

고양이 피해서 우사인 볼트보다 빠르게 의자 위로 튀어 오르다

   김선미 편집위원

작은 음식점에서 지인들과 식사를 하고 있는데 갑자기 고양이 한 마리가 나를 향해 돌진하는 것이 아닌가. 순간 머릿속이 하얘졌다. 잠시 후 의자 위에 올라 서 있는 나를 발견했다. 한 눈에 실내가 다 보이는 좁은 공간에 옹기종기 앉아있던 사람들의 시선이 일제히 나에게 꽂혔다.

어린애도 아니고 나이든 어른이 왠 호들갑? 하는 눈치가 역력했다. 함께한 일행 중 몇몇도 어처구니없다는 듯 비어져 나오는 웃음을 참지 못했다. 행동이 별로 빠릿빠릿하지 못한 내가 언제 우사인 볼트보다 빠른 속도로 의자 위로 튀어 올랐는지 기억에도 없었다.

“괜찮다”는 식당 주인의 당황한 목소리와 한심하게 쳐다보는 눈초리가 민망해 슬그머니 의자에서 내려와 앉았지만 터질 것 같은 심장 박동은 쉬 가라앉지 않았다. 온 몸의 피가 빠져나가는 듯 얼굴이 서늘해졌다. 기가 막혀 하던 일행들도 새파랗게 질린 내 얼굴을 보더니만 입을 다물었다. 고양이만 무섭냐고?

식당 주인은 ‘괜찮다’지만 내 심장 박동은 공포심에 터질 듯

오래 전 집에서 개를 키운 적이 있었다. 소 닭 보듯 한다는 말이 무슨 뜻인지 생생하게 체험한 시간들이었다. 십년 정도 키웠는데 단 한 번도 쓰다듬거나 제대로 눈을 마주친 적이 없었다. 줄에 매어 놓았음에도 마당에 있는 개집 근처는 가지도 못했다. 당연히 키우던 개도 나 보기를 돌 같이 했다.

사자나 호랑이가 두렵지는 않다. 밀림 탐험을 하거나 사냥을 가지 않는 한 사자나 호랑이를 일상에서 마주할 일은 거의가 아니라 아예 없기 때문이다. 그러나 개나 고양이와 마주치는 일는 일상이고 리얼이다. 산책길에 만나는 온갖 치장을 한 앙증맞은 강아지가 내게는 맹수나 흉기와 다름없다.

동물 혐오자냐고? 미워하냐고? 아니다. 비록 동물애호가는 못돼도 혐오하지는 않는다. 오히려 모든 동물학대에 반대하고 동물복지를 옹호한다. 단지 두려울 뿐이다. 동물에 대한 극심한 공포심이 왜 생겼는지는 나도 모르겠다. 내게 왜 무섭냐고 묻는 것은 강아지와 고양이가 왜 그렇게 예쁘고 사랑스럽냐고 묻는 것이나 다름없다.

음악회에 온 모자, 집에서 대화가 부족했는지 연주회 내내 대화(?)

지난 주 음악회에 갔다. 대중적인 연주회도 아니고 작은 홀에서 하는 아주 작은 소리에도 민감하게 반응하는 그런 음악회였다. 한 자리 건너 옆자리에 젊은 엄마와 초등학교 3-4학년 쯤 되어 보이는 아들이 함께 있었다.

엄마와 클래식 음악회라니? 대견한 생각이 들면서 한편으로는 어른도 지루할 수 있는 더 없이 조용함을 요구하는 연주회를 잠시도 가만히 있기 어려운 저 나이의 남자아이가 견딜까 싶었다. 아니나 다를까. 모자의 끝없는 대화(?)가 이어졌다.

호불호가 갈리는 다소 전문적인 음악회에 어린 아들을 동반하고 올 정도면 음악에 대해 일가견이 있고 공연장 에티켓도 모르진 않을텐데 ‘내 자식’ 앞에서는 별무소용이었다. 아이가 아무리 몸을 뒤틀고 부스럭거려도 제재하지 않을뿐더러 오히려 아들의 질문보다 엄마의 답변이 장황했다. 마치 자상한 엄마임을 입증이라도 하듯이 말이다.

‘내 개’를 앞세운 비매너 ‘내 자식’ 만 외치는 것과 닮아 있어

내가 싫은 건 개나 고양이가 아니다. “우리 개는 안 물어요.” “우리 애는 아직 애기에요.” 라며 ‘막무가내’인 주인들이다. 자신들이 사랑(?)하는 반려견 반려묘를 무서워하는 나를 외계인 취급하는 그들 말이다.

한 연예인의 개가 이웃을 물어 결과적으로 죽음에 이르게 한 개물림 사고 이후 반려인 천만 시대의 펫티켓 문화에 대한 논란이 뜨겁게 달아올랐다. 안전교육, 예방책에 대한 여러 의견들이 화산처럼 폭발했지만 타인을 고려하지 않는 나만 편하고 나만 좋으면 그만이라는 막가파식 막무가내가 여전하다.

   바레인으로 출국하는 이명박 전 대통령,<사진 출처 : YTN화면 캡처>

자식을 동반한 모든 부모가 앞장서 자식에게 공연장 에티켓을 무시하는 법을 가르치지 않듯 모든 반려인들이 펫티켓을 지키지 않는 것은 아니다. 하지만 공중도덕을 가르치는 것을 ‘내 자식 기죽게 하는 일’로 받아들이는 것처럼 ‘내 개’ ‘내 고양이’를 앞세운 몰상식, 비양심적 행위 역시 사라지지 않고 있다.

인천공항 발언, 전두환·박근혜 전 대통령 골목 설명 연상케 해

지난 13일 광주에서 7세 아동이 공원에서 목줄을 하지 않은 개에 물려 견주를 입건했다는 언론 보도는 다시금 우리사회에 만연한 막무가내를 확인케 한다. 비록 부상은 경미했다지만 개물림 사고를 놓고 여론이 들끓어 올랐음에도 누군가에게는 여전히 소귀에 경읽기였던 셈이다.

이들까지 반려인이라고 불러야 하는지는 모르겠지만 우리사회의 이런 막무가내가 어디 ‘미개한’ 일부 반려인들의 몰지각한 행태뿐이겠는가. 국가 기관을 동원해 온갖 불법 탈법을 저지르며 국가권력을 사당화한 소위 말하는 정치지도층의 행태나 이를 옹호하는 일부 정치세력을 보며 “우리 개는 안 물어요.”하는 이들을 떠올린다면 모욕죄에 해당할까.

이명박 전 대통령이 인천공항 출국장에서 쏟아낸 적반하장의 발언을 보며 문득 든 생각이다. 기시감. 마치 20여 년 전 전두환 전 대통령이 검찰 소환을 앞두고 불응을 선언한 골목 성명과 지난 3월 탄핵 뒤 사저로 돌아가며 발표했던 박근혜 전 대통령의 골목길 대독 성명을 연상케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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